계획형 인간으로서 계획이 틀어지는 것에 꽤 스트레스 받는 편이다. 2022년은 내가 꽤 오랜 시간 공들인 계획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시작한 해다. 덕분에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한 해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새해를 맞이했다. 그렇게 벌써 8개월이 지나버렸으니 시간 참 빠르다.

책을 읽으면 꼭 서평을 쓰는데 이게 내 커리어에서 굉장한 도움이 됐다. 이 방법을 전수하고자 함께 책을 읽는 친구들에게는 “쓰지 않으면 읽지 않은 것이다”라며 쓰기의 중요성을 말하곤 했다. 그리고 이 서평은 올해 세 번째 서평이다. 8개월 동안 고작 세 권을 읽었다니. 참 씁쓸한 2022년이다.

힘든 시기를 마치고 겨우 정신이 들때 쯤 친척 형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너가 힘든 시기를 견뎌낸 건 꾸준히 쌓아온 인문학 지식이 도움이 됐을 거라 생각한다.” 당시엔 그런가 하고 넘겼지만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됐겠구나 싶다. 꾸역꾸역 읽었지만 어느새 이 책은 내 네 번째 철학 책이다.

도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회사 독서소모임에서 읽은 책이다. 매주 수요일 점심 시간에 모임을 하는데 매주 50~100페이지를 읽고 모여 짧게 이야기를 나눈다. 매주 모임이 있어 때로는 빠듯하지만 1~2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분량이라 큰 부담은 없다. 이렇게 읽은 책도 몇 권 된다.

회사에서 매주 읽은 책이니 재미가 있으면 좋았으련만,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내 취향은 아니었다. 저자는 베스트셀러 작가라는데 영어식 농담인지 도대체가 하나도 재미 없었다. 차라리 딱딱하게 정제된 생각을 적었더라면 더 좋았겠다 싶다. 나름 친근감있게 독자에게 다가가려고 14명의 철학자를 여러 비유를 말하며 풀어내지만 오히려 그 비유들이 핵심에서 벗어나 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마음이 가는 내용이 있었는데 스토아철학이었다.

스토아철학

스토아철학은 기원 전 300년 경 제논이라는 사람이 탄 배가 난파된 뒤 소크라테스 전기를 읽고 ‘스토아 포이킬레(stoa poikile, 여러 가지 색으로 칠해진 주랑)’에 모여 학파를 만들었다. 이게 스토아학파이고 이들이 하는 게 스토아철학이다.

말년을 맞이한 제논은 다음과 같은 농담을 즐겼다. “배가 난파됐을 때 난 정말 좋은 항해를 했어.” 이 말은 훗날 스토아학파의 핵심 주제가 된다. 바로 고난을 통해 강해지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 로마의 정치가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바람에 수없이 시달리지 않은 나무는 땅에 튼튼하게 뿌리박지 못한다. 바람에 흔들려야 땅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난은 덕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는 제논을 비롯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에픽테토스 등 스토아학파 철학자 이야기를 담았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대화가 깊어지면 흔히 ‘철학자 같은 말’이란 표현을 쓰는데, 여러 철학 책을 읽으며 ‘철학’이라는 것에 참 다양한 관점이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철학’의 방향성은 스토아학파에 가장 근접한 것 같다.

스토아철학은 이처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과 성과를 “무관한 것”이라 칭한다. 이런 무관한 것들은 우리의 인성이나 행복에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무관한 것들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러므로 스토아철학은 무관한 것들에 ‘무관심’하다.

스토아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우리는 외부의 목표를 내면의 목표로 바꿈으로써 실망의 공격에 대비해 예방접종을 놓을 수 있다.

올해 초 힘든 시기를 겪으며 생각하는 시간 대부분을 자책하거나 인생을 비관하며 보냈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 혼자있는 시간이 즐겁지 않았다. 그렇다고 즐겁지 않은 시기에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결국 혼자서 있는 시간은 무척 외롭고 힘들었다.

힘든 시기에 내가 선택한 것은 일이었다. 좀 더 일에 집중했고 평소보다 한시간 더 일찍 출근하고, 한시간 더 늦게 퇴근하곤 했다. 주말에는 늦잠도 자고, 낮잠도 자며 최대한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줄였다.

그러나 극복하기 쉽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머릿속에서 내가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놓아봤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 모든 것을 놓아봤다. 그동안 가진 것을 빼앗겨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다 놓았더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리곤 스토아철학이 말하는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는 말이 일어났다.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선택임을 깨달아야만 더 나은 선택을 내리기 시작할 수 있다.

기쁨을 포기하는 것은 삶에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다.

만약 공중목욕탕에 간다면 “그곳에는 물을 튀기는 사람들, 거칠게 떠미는 사람들, 욕을 하는 사람들,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몸이 물에 젖는다고, 누가 물건을 훔쳤다고 놀라선 안 된다.

아마 내가 놓아서 오히려 힘이 났던 시기를 겪지 않았다면 스토아철학이 하는 말을 흘려 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더라.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었다. 내가 인생을 비관하며 수면에 기댈 때와 해야 할 일을 할 때 외부 상황은 바뀐 게 없다. 오로지 내 생각만 조금 틀었을 뿐이다. 그런데 모든 게 달라졌다. 그렇게 다시 인생의 주도권이 내게로 넘어왔다.

스토아철학은 지금껏 살아오며 내가 깨달은 무언가와 굉장히 닮아있다. 아마 다음 철학책은 스토아학파와 관련된 책이 아닐까 싶다.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스토아학파였지만 또 다른 철학이 내 마음을 적셨다. 쾌락주의다.

쾌락주의

쾌락주의라 하면 쾌락을 추구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느낀 쾌락주의는 쾌락을 위해 ‘절제’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절제는 ‘쾌락’을 위해서다.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우리는 오직 딱 한 번 태어난다. 두 번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인간의 삶이 우연의 결과물, 원자 운동에서의 일탈, 일종의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삶을 찬양해야 하지 않을까?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며, 올바른 마음가짐만 갖춘다면 아주 적은 양의 치즈만으로도 소박한 식사를 성대한 만찬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쾌락주의 철학을 펼친 에피쿠로스는 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는 걸 동적인 쾌락이라 하면, 물을 마신 상태는 정적인 쾌락이라 했다. 그리고 이 정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물을 마신 상태를 추구하기 때문에 물을 많이 마시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물을 마시지 않고도 물을 마신 상태가 되는 것 또한 정적인 쾌락이 될 수 있다. 많이 먹어서 배부른 상태가 될 수도 있지만, 많이 먹지 않고도 배부른 상태가 될 수 있다면 이 또한 쾌락인 것이다.

에피쿠로스와 부처의 가르침은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두 사람 다 욕망을 고통의 근원으로 보았다. 두 사람 다 평정을 수행의 궁극적 목표로 보았다. 두사람 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에피쿠로스에겐 정원이, 부처에겐 수행공동체인 승가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랬다. 언제나 그 다음을 추구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음식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맛있는 음식을 또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한 적이 많다. 음식이 아닌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 어떤 작은 성공 등 그 순간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를 반복할 수 있는 것을 고민했다. 결국 이 쳇바퀴 속에서 뱅뱅 돌 뿐이다.

사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음식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음 음식을 생각한다면, 나는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 쾌락을 느끼는 게 맞는지 싶다. 만족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이 쳇바퀴를 끊어버리는 게 진정한 쾌락으로 향하는 길 아닐까.

욕심을 버렸더라면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다 읽고 나니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는 왜 기차를 타고 가는 컨셉을 잡았을까. 저자는 왜 실생활에서 철학을 소개하려 했을까. 저자는 왜 딸과의 이야기를 담았을까. 만약 이 컨셉이 일반인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서라면 실패했노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그냥 차분히 철학자 14명을 소개했어도 괜찮은 책이 됐을 것 같다. 사이사이 나오는 자기 세계에 빠진 아재개그가 독서의 집중도를 대폭 하락시켰다. 자기 딸은 자기에게만 예쁜 법이다. 저자의 딸이라는 것 외 알려진 정보가 전혀 없는데 아이의 생각을 듣고 있자니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저자의 컨셉은 모두 실패다.

마무리

4개월만에 서평을 쓰려니 꽤 쉽지 않음을 느꼈다. 그동안 서평을 쓰기 어렵다는 친구들에게 뭐가 어렵냐며 핀잔을 줬는데 안 쓰다 쓰려니 그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다. 역시 꾸준함은 대단한 것이구나.

저자의 컨셉은 실패했지만 저자가 담은 철학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 이 책을 발판으로 또 다른 책을 찾아볼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니 절반 정도는 성공했다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저자의 책을 또 읽고 싶진 않다.

한줄평

  • 친근감있는 철학 이야기 컨셉에 실패한 블로그 모음집

인상 깊은 문구

  • 지식은 안다. 지혜는 이해한다.
  •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 영어의 ‘철학자(philosopher)’라는 단어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어 필로소포스(philosophos)에서 왔다.
  • ‘철학(philosophy)’이라는 단어와 ‘실용적인(practical)’이라는 단어는 오직 사전에서나 가까이 붙어 있다.
  • 삶을 성찰하려면 거리를 둬야 한다. 자기 자신을 더 명확하게 들여다보려면 자신에게서 몇 발짝 물러나야 한다. 이렇게 거리를 둘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과 대화는 사실상 동의어였다.
  • 마음을 들여다보는 진정한 창문은 눈이 아니라 질문이다. 볼테르가 말했듯,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대답이 아닌 질문을 보는 것이다.
  • 궁금해하는 행위는 광활하며 아무런 제약도 없다. 이 궁금해하는 마음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
  • 시도해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법이며, 궁금해하기 전에는 절대 시도해볼 수 없는 법이다.
  • 궁금해하는 것은 호기심과 달리 본인과 매우 밀접하게 엮여 있다. 우리는 냉철한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 냉철하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한지만 냉철하게 궁금해할 순 없다. 호기심은 가만히 있질 못하고 늘 눈앞에 나타나는 다른 반짝이는 대상을 쫓아가겠다며 위협한다. 궁금해하는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 마음은 오래도록 머문다.
  • 멈춤은 실수나 결함이 아니다. 멈춤은 말을 더듬는 것도, 말을 가로막는 것도 아니다. 멈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잠시 유예된 상황이다. 생각의 씨앗이다. 모든 멈춤은 인식의 가능성, 그리고 궁금해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 좋은 아빠가 무슨 뜻인지 아는 것, 참으로 아는 것은 곧 좋은 아빠가 되는 것과 같다.
  • 우리 문화에는 궁극적인 질문이 질문으로 존중받는 공간이 없어요. 우리가 가진 모든 제도와 사회 양식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만 최선을 다합니다.
  • 너무 자주 우리는 가장 빠른 해결책, 또는 가장 편리한 즐거움에 손을 뻗는다. 우리의 무지와 한자리에 앉는 것만은 어떻게든 피하려 한다.
  • 마음의 대답에 도착하려면 인내심도 필요하지만 기꺼이 자신의 무지와 한자리에 앉으려는 자세도 필요하다.
  • 성공은 나한테 어떤 모습이지? 그 모습을 본다면 내가 알아차릴 수 있을까?
  • 나에게 침묵은 흔한 상태가 아니다. 내게 말은 공기와도 같다. 하지만 나는 말없이 머릿속에서 제니퍼의 질문을 여러 각도로 뒤집어 살펴보았다. 좋은 질문은 더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과연, 제니퍼가 던진 하나의 질문이 내 머릿속에 수십 개의 질문을 일으켰다. 이제는 더 이상 제니퍼와의 대화가 아니라 나 자신과의 대화였다.
  • 이제 나는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잠시 멈추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성공은 어떤 모습이지? 솔직히 말하면 아직 이 질문의 답을 찾지 못했고, 어쩌면 영원히 못 찾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안경의 도수를 다시 맞추었고, 이제 앞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그게 철학의 본성이다.
  • 걷는 행위는 확실히 루소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정신은 시간당 5킬러미터의 속도, 즉 걷기에 적당한 속도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
  • 루소는 하루에 30킬러미터 이상을 걷곤 했다. 한번은 제네바에서 파리까지 480킬로미터를 걸은 적도 있었다. 제네바에서 파리까지 가는 데에는 2주가 걸렸다.
  • 우리 인간은 바다에서 왔는데, ‘걷다walk’라는 단어의 어원에서도 그 사실이 드러난다. 11세기에 이 단어는 바다처럼 ‘굽이치고 요동치다’라는 뜻이었다. ‘걷다’라는 단어가 해안으로 걸어 나와 몸을 말리고 현대의 의미를 획득한 것은 13세기의 일이다. 단어는 진화한다.
  • 관찰이 흥미로워지려면, 즉 중요한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주관적이어야 한다.
  •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것을 멈출 때에야 나는 비로소 그 대상을 보기 시작한다.
  • 여태껏 염세적인 철학자는 여럿 있었지만 염세주의를 진정으로 파고든 철학자는 쇼펜하우어 단 한 명뿐이다.
  • 언어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음악은 중력이나 뇌우처럼 인간의 사상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숲속에서 울리는 트럼펫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한다 해도 트럼펫은 여전히 울린다. 언젠가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음악은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 거의 의식이 없는 환자, 심지어 식물 상태에 있는 환자도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면 뇌가 더 활발하게 활동한다.
  • 진정한 듣기를 위해서는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처럼 아무런 판단 없이 음악을 들을 때 “절대적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 음악은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다. 음악은 감정의 본질을, 내용 없는 그릇을 전달한다.
  •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공부하며 불교를 가장 위대한 종교라 선언했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자기 서재에 부처상을 올려두기도 했다.
  • 그는 소음에 대한 내성이 그 사람의 지능과 정확히 반비례한다고 믿었다.
  • <서던메디컬저널>에 실린 한 연구에 따르면 소음공해는 “불안, 스트레스, 신경과민, 구역질, 두통, 정서 불안, 호전성, 성기능 장애, 기분 변화,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증가, 노이로제, 히스테리, 정신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 가장 최근에 쓰인 것이 늘 더 정확하다는 생각, 나중에 쓰인 것이 전에 쓰인 것보다 더 개선된 것이라는 생각, 모든 변화는 곧 진보라는 생각보다 더 큰 오산은 없다.
  •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너무 자주 책 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했다. “책은 자기 생각이 고갈되었을 때만 읽어야 한다.”
  • 소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 삶에 체계를 부여하는 것 중 음식만 한 것은 없다. 식사는 하루를 떠받치는 대들보다.
  • 모든 철학자는 모든 10대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 원래 그런 법이다.
  • 정원은 관리가 필요하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뒷마당에서 빈둥거리는 사람이 정원사가 아니듯, 생각한다고 다 철학자인 것은 아니다. 정원일과 철학은 둘 다 어린아이의 관대한 즐거움이 수반된 어른의 절제된 헌신을 필요로 한다.
  •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삶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마라. 만약 그 성취가 네 이웃에게 알려진다면 그 때문에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 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은 명성이나 부가 아닌 마음의 평화, “존재하는 데서 오는 순수한 기쁨”이다. 그러한 상태를 무언가의 부재가 아닌 측면에서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우리는 오직 딱 한 번 태어난다. 두 번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인간의 삶이 우연의 결과물, 원자 운동에서의 일탈, 일종의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삶을 찬양해야 하지 않을까?
  •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며, 올바른 마음가짐만 갖춘다면 아주 적은 양의 치즈만으로도 소박한 식사를 성대한 만찬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 에피쿠로스와 부처의 가르침은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두 사람 다 욕망을 고통의 근원으로 보았다. 두 사람 다 평정을 수행의 궁극적 목표로 보았다. 두사람 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에피쿠로스에겐 정원이, 부처에겐 수행공동체인 승가가 있었다.
  • “고통 없는 순수한 쾌락은 극히 드물어요.” 톰이 말한다. “그래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저한테 딱 맞는 거예요. 전 엄청 우유부단한 사람이거든요.”
  • 충분히 좋음은 안주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변명도 아니다. 충분히 좋음은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많은 경우 자신의 멀티태스킹 능력을 과대평가한다.
  • 관심은 사랑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다.
  • 집중은 수축한다. 관심은 확장한다. 집중은 사람을 피로하게 한다. 관심은 피로를 회복시켜준다.
  • 인내심은 좋은 덕목이다. 최근 연구가 보여주듯이 인내심은 자신에게도 좋다. 여러 연구가 인내심 있는 사람이 안달 내는 사람 보다 더 행복하고 건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내심 있는 사람은 더 이성적으로 행동할 확률이 높다. 이들은 대처 기술도 더 뛰어나다.
  • 관심은 우리 삶의 피다. 피는 잘 돌아야 한다. 관심을 썩히는 것은 곧 삶을 죽이는 것이다.
  • 심지어 역을 실제 간격 그대로 표시해서 더 큰 혼란을 주었다. 여고가 역 사이가 얼마나 먼지, 지하철을 탈 때 머리 위에 어떤 도라가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한 것은 이 역에서 저 역까지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지, 어디서 노선을 갈아타야 하는지였다.
  •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 간디는 목표보다 수단이 더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싸우느냐가 중요하다.
  • 간디는 부당한 법에 복종하는 것을 “남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여겼다. 그런 법에는 반드시 맹렬한 힘으로 저행해야만 한다. 비폭력적 힘으로 말이다. 간디는 그러려면 진정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바가바드기타>의 또 다른 교리는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의 화신인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겐 노력할 권리가 있지만, 반드시 그 노력의 결실을 취할 권리는 없다. 절대로 보상받기 위해 행동에 나서지 말 것이며,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바가바드기타>는 노력과 결과를 분리하라고 가르친다. 모든 시도에는 100퍼센트의 노력을, 그 결과에는 정확히 0퍼센트의 노력만을 기울일 것.
  • 약 300건의 비폭력 운동을 종합적으로 살핀 연구에서 연구원 에리카 체노웨스와 마리아 슈테판은 이 전략이 절반 이상의 사례에서 효과를 나타냈음을 발견했다.
  • 한 학생이 공자에게 사후 세계에 관해 질문하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
  • 쇼나곤은 “붓 가는 대로 따라간다”는 뜻의 즈이히츠를 하고 있다. 즈이히츠는 일본의 글쓰기 기법 아닌 글쓰기 기법으로, 내 눈엔 책이 아닌 책을 쓰기에 완벽한 방식으로 보인다.
  • 벚꽃은 그 짧은 수명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짧은 수명 때문에 사랑스럽다. 일본 연구자인 도널드 리치는 “아름다움은 덧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 니체는 거의 초인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책을 썼는데, 1872년에서 1889년 사이에 열네 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리고 예외 없이 모든 책이 거의 팔리지 않았다. 어떤 책은 니체가 직접 인쇄비를 내기도 했다. 세상은 아직 ‘실스의 은둔자’가 하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 나라면 세 번째 실패 이후 전부 관뒀을 것이다. 니체는 아니었다. 니체는 계속되는 거절과 육체적 질병에도 불구하고 계속, 심지어 속도를 늦추지도 않고 고집스럽게 글을 썼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도대체 무엇을 알았기에?
  • 니체의 나쁜 시력은 아무도 모르는 축복이었다. 덕분에 니체는 책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니체는 책을 읽지 못할 때 걸었다. 한 번에 몇 시간씩, 엄청난 거리를 걸었다.
  • 니체가 말했다. 우리는 손으로 글을 쓴다. 발로는 더 좋은 글을 쓴다.
  • 소크라테스가 물음표의 철학자라면 니체는 느낌표의 철학자다.
  • 니체가 영원회귀를 “가장 무거운 짐”이라 칭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영원보다 더 무거운 것은 없다. 만약 모든 것이 무한히 되풀이된다면, 인생에 가벼운 순간이나 사소한 순간은 없다. 아무리 보잘것없더라도 모든 순간이 동일한 무게와 질량을 갖는다. “모든 행동은 똑같이 크고 작다.”
  • 영원회귀를 매일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준으로 삼아보라. 당신은 지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정말로 그 데킬라를 다 마시고 영원한 숙취에 시달리고 싶은가? 영원회귀는 자기 삶을 무자비하게 검사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다움과 같이 질문하게 한다. 영원히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가?
  • 니체는 말했다. 고통은 청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답해야 하는 부름이다.
  • 불확실성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질병마저도, 신체적 고통이 계속될지라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미묘하지만 그 영향력이 엄청나다. 세상이 전과 달라 보인다.
  • 이 끝없는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니체는 묻는다. 아니,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기꺼이 끌어안을 수 있는가? 사랑할 수 있겠는가?
  • 스토아철학은 나이든 사람을 위한 철학이다. 몇 번의 전투를 이겨내고, 패배도 몇번 해보고, 상실도 경험해본 이들을 위한 철학이다. 크고 작은 인생 역경의 시기를 위한 철학이다.
  • 말년을 맞이한 제논은 다음과 같은 농담을 즐겼다. “배가 난파됐을 때 난 정말 좋은 항해를 했어.” 이 말은 훗날 스토아학파의 핵심 주제가 된다. 바로 고난을 통해 강해지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 로마의 정치가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바람에 수없이 시달리지 않은 나무는 땅에 튼튼하게 뿌리박지 못한다. 바람에 흔들려야 땅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난은 덕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다.”
  • 스토아철학은 이처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과 성과를 “무관한 것”이라 칭한다. 이런 무관한 것들은 우리의 인성이나 행복에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무관한 것들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러므로 스토아철학은 무관한 것들에 ‘무관심’하다.
  • 스토아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우리는 외부의 목표를 내면의 목표로 바꿈으로써 실망의 공격에 대비해 예방접종을 놓을 수 있다.
  • 고전 연구자 A.A. 롱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보통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질투를 느끼지 않느다. 자신이 나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 것이어야 할 성취를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 우리 생각과 행동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듯 우리 감정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 고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선택임을 깨달아야만 더 나은 선택을 내리기 시작할 수 있다.
  • 기쁨을 포기하는 것은 삶에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다.
  • 만약 공중목욕탕에 간다면 “그곳에는 물을 튀기는 사람들, 거칠게 떠미는 사람들, 욕을 하는 사람들,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몸이 물에 젖는다고, 누가 물건을 훔쳤다고 놀라선 안 된다.
  • 스토아철학의 핵심에는 깊은 숙명론이 있다. 우주는 내가 쓰지 않은 대본에 따라 움직인다. 언젠가는 직접 연출을 하고 싶겠지만, 포기하는 게 좋다. 우리는 연기자다. 자기 역할을 받아들여야 한다.
  • 다른 역할을 간절히 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며 우마차에 끌려가는 개처럼 불필요한 고통을 겪게 될 뿐이다. 스토아철학은 “지금 가진 것을 욕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 코트를 잃어버린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건 당신이 코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스토아철학의 세계관에서 당신은 사실 코트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반납한 것이다.
  • 스토아철학은 헷갈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간단하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몸조차도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빌릴 뿐, 절대로 소유하지 않는다. 해방감이 느껴진다. 잃어버릴 것이 없다면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할 것도 없다.
  • 우리는 노년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 플라톤은 여든에 죽을 때에도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흔아홉까지 살았고 아흔넷에 자신의 가장 유명한 작품을 썼다. 고르기아스는 두 사람을 한참 어린애로 보이게 하는데, 그는 백일곱 살까지 살았고 죽는 날까지 일에 매진했다.
  • 보부아르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었고,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자동차 사고가 크게 나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보부아르는 일을 했다. 사르트르가 오래 병을 앓는 동안 보부아르는 노화에 관한 책을 집필했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다. “내 방어 수단은 일이다. 그 무엇도 내가 일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 우리는 습관을 필요로 한다. 습관이 없으면 우리 삶은 수백만개의 무의미한 파편으로 산산조각 날지 모른다. 습관은 우리와 이 세계를, 우리 자신의 세계를 하나로 이어준다. 습관이 왜 생겨났는지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그 가치를 의심하기만 한다면 습관은 유용할 수 있다. 습관이 우리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습관을 지배해야 한다.
  •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지혜와 이론의 핵심은 결국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 슬픔은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 슬픔은 사람을 마비시킬 수 있다. 또한 슬픔은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 몽테뉴에게는 자신의 우연한 철학을 담을 문학 형식이 필요했다. 그 문학 형식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몽테뉴는 직접 하나를 만들었다. 바로 에세이다. 프랑스어로 에세이(assay)는 ‘해보다’라는 뜻이다. 에세이는 실험이자 시도다. 몽테뉴가 쓴 에세이들도 하나의 거대한 시도다. 무엇에 대한 시도냐고? 스스로를 더 잘 알기위한 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