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앉아 생각 정리하는 걸 좋아한다. 퇴근 후 저녁도 좋고 주말에 여유있는 오후에도 좋다. 그런데 연말에는 어느때보다 감성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 감성적인 시간을 무척 좋아한다.

동료들에게 손편지 써주는 걸 꽤 즐겨하는 편인데, 올해는 시간도 안 맞고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 메시지로 대신했다. 보내는 김에 올해 감사했던 사람, 내년에도 함께하고 싶은 사람, 좀 더 친해지고 싶은 사람 등. 여러 지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세상에 4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평범한 삶도 이런데 연말 시상식에 오르는 수상자들은 오죽하겠나 싶다. 고작 몇십 초에 감사한 분들 이름이라도 겨우 부르는 게 조금은 이해가 간다.

돌아보면 시간이 참 빨리 간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 많은 일이 있었더라. 다소 감정적인 행동이 떠오를 때면 지나고 나면 이런 것을 왜 그랬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2023년은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정리해보면 2023년 키워드는 크게 퇴사와 창업이겠다.

퇴사

조직에 관한 많은 감정이 남아있다. 내가 두 번째로 길게 다닌 조직이며, 리더로서 데뷔한 조직이기도 하다. 때문에 많은 아쉬움이 있고 무엇보다 여전히 많은 애정이 남아있다. 여전히 당시 동료들이 나오는 꿈을 꾸는 걸 보면 내 잠재의식도 많이 아쉽나보다.

퇴사에 관한 소회는 앞선 퇴사기에 충분히 녹여냈다. 이 퇴사기는 여러 SNS에서 많이 읽혔고, 특히 EO에서는 7천회가 넘게 읽힐 만큼 많은 분들이 관심을 줬다. 이 퇴사기 덕분에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도 했고 스몰톡 주제가 되기도 했으니 이 조직은 떠나서도 내게 참 여운을 남기는 것 같다.

스타트업 4년, 끈적했던 꿈을 마치며…코드에프 퇴사기

애정과 많은 아쉬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당시 퇴사를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다. 어쩌면 참 적절한 시기에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는 건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조직에서 만난 많은 동료들과 여전히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걸 보면 나는 참 행운아다. 불과 1년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있었던 만큼 이전 동료들과 언젠가 다시 일할 날을 꿈꾼다.

이렇게 좋아하는 조직과 함께했다는 것에 이 조직을 만든 많은 사람들이 나는 충분히 자랑스럽다.

창업

동기

퇴사는 3월 말이었다. 여전히 생생한 마지막 퇴근이 2023년의 고작 25%라니. 이제 나머지 75%를 말해볼까 한다. 유자랩스 창업이다.

그렇게 애정하는 조직을 다니면서도 나는 늘 창업을 꿈꿨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건 나를 굉장히 흥분시킨다. 제로투원.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건 내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 중 하나다.

그중에서도 창업은 굉장히 높은 가치였는데. 퇴사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창업에 관한 목적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그게 올해가 될줄은 몰랐다.

유자랩스 출사표…좋은 사람과 좋은 사업을

나는 늘 나로서 살아가길 원한다. 때문에 나로서 사는 게 어떤 것인지 굉장히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로서 살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달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본을 좇는 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돈을 좇는 것을 굉장히 금기시 한다. 나는 이 분위기가 굉장히 잘못됐다고 본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상상하는 대부분의 것은 자본으로 해결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자본주의다.

단, 어떤 수준을 넘어서면 분명 주의해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그 수준 자체가 대부분의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이번 퇴사를 통해 이를 뼈져리게 느꼈다.

나는 생각보다 내 것을 빼앗기는 것에 굉장한 분노를 느낀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조직과 나를 동일시 했으며, 조직에 속한 내 사람들과 나를 동일시 했다. 조직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내 사람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나는 마치 내가 무너지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조차 놀라웠다. 내가 책임감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내 것을 잃어버리는 느낌을 힘들어할 줄은 몰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내가 좋아하는 조직에서 함께하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것을 희생해도 내가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창업은 어려운 일이다. 이미 첫 번째 창업을 실패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막막함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첫 번째 실패 이후 많은 경험을 했고, 덕분에 많은 부분을 보완했다. 특히 풀타임으로 함께할 사람들이 모인 것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불투명한 미래를 나와 함께라면 가보겠다는 동료들을 보며 스스로 만들었던 확신 위에 또 다른 확신을 올렸다. 계산하고 또 계산했다. 내가 잃어버릴 것과 내 사람들이 잃어버릴 것 등을 계산했다.

여러 생각이 모여 나는 나를 비롯해 함께할 동료들이 이 창업을 통해 어떻게든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첫 번째 창업처럼 나와 함께할 이들이 분명 굉장한 경험치를 얻을 수 있음을 느꼈다. 그게 내 계산에서 가장 실패했을 때의 결과였다.

만약 내 생각대로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고객이 원하는 가치를 제품으로 제공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을 하며 자생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 수 있다. 그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자본주의에서 자본으로서 지킬 수 있다.

동기가 충분히 단단해졌다. 이 동기는 구성원 모두가 공감했고 이렇게 되면 너무 좋겠다는 것에 합의했다.

제품

제품을 찾기 시작했다. 시장이 어려워지며 투자가 끊겼다고 했다. 상관없다 나는 투자를 기반으로 성장 동력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 모델은 충분히 성공사례가 있지만 내가 추구하는 경영 철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나는 제품으로 자생하는 조직을 원했다. 때문에 제품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이 조직 내 있어야 했다. 특히 제품의 코어는 꼭 조직이 자랑하는 장점으로 구성돼야 했다.

유자랩스는 내가 가장 잘 아는 구성원들로 구성됐다. 때문에 이들의 캐릭터와 스킬셋, 장단점 등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이들이 잘할 수 있는 것과 선호하는 것, 감당할 수 있는 것 등을 정리했다. 이 범위 내에서 제품을 찾는다면 우리는 분명 제품을 만들고, 운영할 수 있다.

가능하면 월 반복매출이 나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이전 조직에서 경험했던 제품이고 반복매출이 갖는 매력이 상당하다고 생각했다. 작은 제품 조직이 만들 수 있는 월 반복매출이 나오는 사업. 그렇게 마이크로 SaaS(Micro SaaS)라는 개념을 찾아냈다.

마이크로 SaaS 개념은 해외에서 굉장히 핫했다. 시장이 어려워지며 당장 매출이 나는 사업에 관심이 몰렸는데 마침 이 분야가 내가 오랜 시간 커리어를 쌓아온 분야였다. B2B였다. B2B는 고객 숫자는 작지만 하나하나가 의미있는 매출을 만드는 점에서 매력이 있었다. B2B Micro SaaS. 여기까지 좁혀지자 정보가 정말 많이 나왔다.

이제 도메인을 찾아야 했는데 시장이 어렵다는 건 새로운 시장에 관한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거다. 투자가 없으니 장기적으로 보고 가는 시장도 어려웠다. 때문에 당장 매출이 나는 이미 형성된 시장이어야 했다. 당시 챗GPT를 필두로 AI 시장이 폭발했지만 당시엔 다소 뜬구름이라 생각했다. 또한, 첫 번째 창업 시 없던 시장을 만들려다 실패했던 경험이 있기에 이미 있는 확실한 시장에서 조금 더 나은 제품을 만드는 전략을 세웠다.

인류 역사에서 지속해서 존재했던 비즈니스가 있다. 심지어 지속 성장해왔으며 앞으로도 무조건 인류에게 필요한 비즈니스. 그런데 최근 격변의 시기가 있었고 IT인에게 굉장히 친숙한 비즈니스. 그래서 우리가 굉장히 접근하기 쉬운 것. 바로 이커머스였다.

이커머스는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으며 최근 코로나로 인해 굉장히 변화가 많았던 시장이다. 또한 코로나가 종식되며 다시 변화가 생기는 시장이다. 또한 쿠키리스 등 정보보안 이슈로 기술적으로 기회가 열려있다. 여기에 오픈마켓, 소셜커머스, 버티컬 커머스 등 지속해서 시장에 변화가 있다.

그러던 중 쇼피파이 모델을 발견했다. 쇼피파이라는 거대한 플랫폼 위에 스토어가 만들어지고 이 스토어에 자사몰을 위한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이 다양한 니즈를 해결한다. 쇼핑몰 역시 하나의 기업이니 B2B 애플리케이션이다. 내가 찾던 B2B Micro SaaS가 가능한 시장이다.

AI가 주목받으며 이 시장에 AI가 연결되기 시작했다. 아쉽지만 우리 팀은 AI와 다소 거리가 멀다. 하지만 디테일에는 자신이 있다. 꼼꼼하게 데이터 하나하나를 챙겨줄 수 있는. 다양한 고객 니즈를 듣고 이들의 가려움을 하나씩 긁어줄 수 있는. 화려한 AI보다는 시장 내 관행이 돼 버린 비효율을 하나씩 해결한다면. 그래서 고객사가 우리 제품으로 비용을 낮추고 나아가 새로운 매출을 올릴 수 있다면.

그렇게 마케팅 솔루션. 그 중에서도 빠르게 성장 중이며 아직 완벽한 지배자가 나오지 않은 인플루언서 마케팅 솔루션으로 제품 방향성을 잡았다. 마침 한국에서는 카페24가 쇼피파이 모델을 가져와 생태계를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쇼핑파트너스가 기획됐다.

영업&마케팅

유자랩스는 내가 잘 아는 동료들로 구성됐다. 반대로 나는 유자랩스의 한계를 가장 잘 알고 있다. 장점을 더 잘 하는 게 좋은 전략이라지만, 대표자로서 단점을 보완해야만 유자랩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만약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가 원하는 자생하는 조직은 어려울 수 있다.

때문에 나는 유자랩스가 부족한 영업적 능력치를 최대한 메워야 하는 미션이 있었다. 그리고 이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제품을 출시했다.

제품이 없는 상태에서 투자를 받거나 고객을 만드는 능력자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능력치도 없거니와 사실 성향과도 맞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엔지니어이고 제품 없이 고객을 만드는 건 굉장히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다.

유자랩스는 5월 법인 설립 후 6월에 MVP 제품이 나왔다. 제품이 있으니 나는 고객을 만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고객을 만나면 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이 희망은 빠르게 무너졌다.

분명 제품이 있는데, 고객은 늘 다른 기능을 말했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기능이나 로드맵상 굉장히 멀리 있는 기능을 원했다. 다른 기능을 원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만나는 고객사마다 다른 기능을 말하는 건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어떤 고객의 목소리를 들어야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흐르며 나는 굉장히 불안해졌다. 동료들에게 제품을 만들면 고객이 생길거라 호언장담했는데 고객이 느는 속도가 터무니 없이 느렸다. 그래도 서로 다독이며 첫 유료 모델을 오픈했다.

그렇게 8월, 유료 모델을 오픈하자마자 첫 결제가 발생했다. 우리는 굉장히 흥분했다. 아쉽게도 외부 미팅을 하던 나는 카페에서 혼자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이대로 가면 빠르게 자생할 수 있을 거란 확신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확신은 한달 뒤 와르르 무너진다.

첫 결제 고객사에서 환불을 요청했다. 구조적으로 미비한 기능이 있었는데 이 기능이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서드파티 애플리케이션으로서는 해결이 어려운 플랫폼 구조적 문제였다. 만약 계속 이런 아쉬움이 발생한다면, 찾아온 고객을 계속 떠나보내야한다면. 물고 무는 암울한 가설에 내 어깨가 크게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가야만 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고객사에 컨택했다. 원하는 것을 들려주면 적극 반영하겠다고 했다. 온/오프라인 미팅을 모두 진행했다. 만나주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렇게 몇몇 고객사가 원하는 기능을 추렸다. 다들 이 기능이 필요하다고 했다. 동료들은 서로가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였다. 그렇게 고객사가 한 입으로 당장 쓰고 싶다는 기능을 출시했다.

그런데 아무도 쓰지 않았다. 제품 특성상 고객사에서 직접 인플루언서를 모집해야만 했는데 인플루언서가 모이지 않아 쓰기 어렵다고 했다. 그건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해야만 했다. 그런데 어떤 고객사는 갑자기 다른 외주사를 통해 개발했다며 우리 제품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 이 상황에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눈 앞이 캄캄했다. 뭘 원할지 몰라서 막막했는데, 원하는 걸 만들어도 안 쓴다니. 아, 이게 참 쉽지가 않구나.

그러던 중 주요하게 생각한 대형 고객사에서 우리 제품을 사용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꼭 고객으로 잡고 싶어 몇몇 요청사항을 바로바로 개발해 추가했다. 주문이 폭발했다.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예상치의 10배를 상회하는 결과가 나왔다. 세상에, 우리 제품을 활용해 일주일만에 억단위 매출이 찍혔다. 대박이 났다. 담당자는 큰 칭찬을 받았고 내년 마케팅을 우리와 좀 더 함께하기로 했다. 첫 성공사례가 생겼다.

이 소식을 듣고 몇몇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비슷한 마케팅을 하고 싶다고 한다. 이와 별개로 몇달 전 가입했던 업체들이 하나 둘 쓰기 시작한다. 인플루언서를 모으는데 시간이 걸린다더니, 진짜였나보다. 그렇게 월반복매출이 조금씩 성장했다. 조금씩 긍정회로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경영

스타트업 대표는 한 가지 역할만 해서는 안 된다. 제품 설계는 물론 영업&마케팅까지 담당했지만 경영이야말로 대표자의 본업이다. 그리고 나는 경영을 잘 몰랐다.

법인을 만들려면 법인 정관을 써야 한다고 했다. 생전 처음보는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인감 도장을 받고 인감 카드도 지녀야 한다. 법인 등기부등본과 사업자등록증은 다른 거다. 통신판매업자 신고도 해야 한다. 서울에 법인을 설립하면 법인세가 3배인데 소프트웨어 업종은 과세가 면제된다고 한다. 법인 명의로 유선 전화를 만들려면 서류를 십수장 사인해야 하며, 초기 스타트업이 PG사 등록을 하려면 굉장한 절차가 필요하다. 세무기장을 맡겨도 대표자가 직접 내야 할 세금이 있으며, 월급명세서를 받아도 대표자가 직접 이체하고 메일을 보내야 한다.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는 무조건 받을 수 밖에 없고 모든 푸시 알림에 몸이 반응한다.

유자랩스는 마곡동에 사무실을 차렸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소호사무실을 둘러봤는데 그중 가장 작고, 저렴한 곳으로 골랐다. 무려 2평 사무실이다. 이 사무실에 책상을 5개 놓고 주루룩 앉았다. 작은 책상은 가로가 1m 정도 되는 것 같다. 이 사무실을 처음에 6개월 계약하며 6개월 뒤에는 옮기자고 했다. 그리고 6개월 뒤 어쩔 수 없이 3개월을 연장하며 울컥했던 기억이 있다.

멀리서 오는 동료는 1시간 반이 더 걸렸다.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를 오가며 고생하는 걸 보면 그저 미안했다. 여름은 어찌 견뎠는데 겨울은 조금 힘들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소호사무실 온풍기가 버티지 못했다. 발이 시려워 동동 굴렀고, 사무실 내 패딩을 입고 앉아있었다. 감기에 걸려 마스크를 끼고 있는 동료를 보고 있자면 그냥 내탓인 것 같았다.

사무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시간이 부족해 전날 꼴딱 밤을 샜다. 아쉽게도 서류 탈락한 날 굉장히 심난했던 기억이 있다. 이 공간을 결국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 내년에도 후년에도 2평을 벗어나지 못하면 어떡하나. 이 심난한 마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다.

다행히 공간 지원사업이 많았다. 하지만 적절한 위치에 있는 공간은 좀처럼 공고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상암에 있는 공간에 공고가 떴는데, 계산해보니 구성원 모두가 적절한 위치였다. 이 기회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업계획서를 40장 썼다. 서류를 꼼꼼히 준비하며 수십차례 확인했다. 다행히 서류에 합격했다. 발표를 준비하며 수십번 리허설 했다. 오랜만에 정장을 입고 수십번 심호흡했다. 유자랩스의 첫 정부사업 합격이었다.

염치라는 걸 지키고 싶었다. 적어도 내가 도움을 줬던 사람이어야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비즈니스 매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충분하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는데도 조직을 만드는 건 너무도 많은 능력치를 필요로 했다. 어쩔 수 없다 염치가 대수냐. 도와주십쇼.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사람은 물론 처음 보는 사람. 아니, 한 번도 안 본 사람에게도 도와달라고 했다. 어떻게든 부족함을 메워야만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 동료들도 모두 그랬다. 지인은 물론 지인의 지인에게까지 도움을 청했다. 나는 물론 동료들의 운까지 끌어다 썼다.

그제서야 뭔가 닿았다. 충분히 생각하고 설계한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운이라는 게 필요했다. 깨어있는 시간 내내 생각해도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꿈에서 만난 사람과도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이렇게하는 것을 두고 절실하고 절박하다고 말하는 걸까.

무엇보다 가장 큰 운은 내 동료들이다. 아쉽게도 떠나간 파트타임 팀원들이 있지만 지금 함께하는 풀타임 구성원 5명은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함께하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어쩌면 내 평생의 운을 다 끌어다 쓴, 어쩌면 전생의 운까지 끌어다 쓴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신의 역할 이상을 해주고 있다.

개인사

내 개인사 중 가장 큰 변화는 자취를 정리하고 부모님 댁으로 들어온 것이다. 무려 12년의 자취 생활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온 선택은 내가 올해 가장 잘한 것 중 하나다.

먼저 금전적으로 굉장히 안정됐다. 자취 생활할 때 썼던 금액의 절반이 원룸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었는데, 그게 모조리 세이브 됐다. 덕분에 내 생활비의 절반이 세이브 된 것이다. 둘째, 심적으로 안정이 됐다. 언제든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집에 있다는 건 굉장한 안정감을 주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헌신이 상당하다. 12년 전 학생 시절에는 내가 이렇게 편하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집안일을 부모님이 해주신다. 부모님은 원래 이렇게 살았다고 하시는데 12년을 자취하고 나니 이게 얼마나 편한 삶인지 새삼 알게 됐다. 덕분에 집안일을 위해 사용했던 시간이 온전히 개인 시간이 됐다.

스튜에서는 투자소모임을 지속했고, 독서소모임을 부활시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여기서 만난 친구들에게 창업에서도 큰 도움을 받았다. 2024년에도 스튜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게 될 것 같다.

이외에는 딱히 개인사라고 할만한 사건은 없었던 것 같다. 평소처럼 주말 밤에는 축구를 보고 풋볼매니저를 틈틈이 했다. 유튜브에서 재밌어보이길래 스팀 게임을 몇 개 사봤는데, 생각보다 재밌진 않았다.

마찬가지로 평소처럼 주 1-2회 헬스를 했다. 확실히 근력운동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 백팩을 메면 통증이 있는데 근력운동을 하면 완화되더라.

당장 개인적인 욕심은 없고 유자랩스에 집중할 수 있는 현재와 같은 개인사가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4년

2023년은 퇴사와 창업으로 정말 꽉 채운 한 해다. 모든 내 스케쥴이 유자랩스에 맞춰져있으며 이런 삶이 내게 썩 잘 맞는다는 걸 확인했다. 2024년에는 좀 더 유자랩스에 집중하는 한해가 될 것 같다.

2023년 올해의 단어는 ‘겸손’이었던 것 같은데, 여름쯤 ‘유자랩스’로 바꾼 것 같다. 되돌아보면 ‘감사’라고 정해도 될 것 같다. 너무 감사한 사람이 많았던 한 해다.

2024년 올해의 단어는 역시 이어서 ‘유자랩스’가 될 것 같다. 하루빨리 유자랩스가 재정적으로 안정화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