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좀 읽는 사람 중 니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신은 죽었다’는 문장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이 책은 도서 <생각의 싸움> 이후 내가 두 번째로 읽은 철학서다. 그 주인공은 니체.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로 자신의 철학을 소개하는 책을 저자 이진우 교수가 강의했다. 그리고 그 강의 현장을 책으로 풀었다.

굳이 해설서를 읽어야 하나 했는데, 다 읽고 난 지금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또 한 명의 철학자가 내게 들어왔다.

모든 이를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모순 그 자체. 이미 책 부제부터 모순이다. ‘모든 이를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이게 무슨 말인가.

다 그런 식이다. ▲차라투스트라를 따르되, 차라투스트라를 버려라. ▲더러워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한다. ▲모든 열정은 덕이고, 모든 악마는 천사다 ▲자신을 경멸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삶이 모두 정해져 있다고 믿진 않지만, 어떤 운명은 있다고 믿는다. 내가 만난 고마운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이들이 단순히 ‘어쩌다’ 내 곁에 왔다는 게 더 슬플 것 같다. 언제라도 함께이고 싶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를 지금 만난 것도 어떤 ‘운명’이라 생각한다. 최근 내가 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기에 이런 ‘우연’이 간절했고, 덕분에 이 책을 상당 부분 소화할 수 있는 경험이 쌓인 시기다. 아쉬운 것은 충분히 생각하고, 즐기며 읽을 물리적 여유는 없었다는 거다.

묵직한 펀치가 많아 어느 하나를 꼽기 망설여진다만, 몇몇 펀치를 골라보겠다.

자신만의 길을 간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남이 가는 평탄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 훨씬 더 쉽죠. 그런데 니체는 이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젊은이들을 유혹해서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라고 권유합니다.

꽤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자신만의 길이라. 이를 유혹하고 권유한다는 차라투스트라에게서 조금은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 역시 주변 친구들이 스스로의 길을 걷도록 유혹하는 편이니까.

자신의 내면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자신에게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경멸할 만한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는 자신을 절대 극복하지 못합니다.

이 ‘경멸’이란 게 처음엔 꽤 거부감이 있었다. 최근 많이 쓰이는 ‘혐오’라는 단어 같달까? 스스로를 경멸하라니, 그게 자신을 극복하며 ‘초인’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니.

다시 생각해보면 꽤 그럴싸한 단어 선택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얼마나 경멸했는지, 경멸했던 나는 얼마나 사라졌는지. 기회가 된다면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주제다.

‘나를 넘어서는 무언가’라는 구절이 중요해요. 나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동경하고, 사랑하고, 창조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 우리 삶이 달라집니다. 나를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면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극복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많은 철학자를 알진 못하지만, ‘초인’이 되라는 것에서, 결국 스스로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에서, 신은 죽었다는 것에서 니체가 꽤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상을 품은 현실주의자다. 이상으로 가기 위해서 현실을 알아야 한다. 내 현실이 이상이 됐으면 하거든. 만날 수 없는 이상만을 좇는 캐릭터는 정말이지 나와 맞지 않더라.

그런 면에서 니체는 스스로를 경멸하고, 넘어서라는 점에서 내 마음을 꽤 편하게 만들어 준다. 어쩌면 나를 위한 책일까 싶을 정도로.

모든 던져진 돌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최근 많은 일이 있었다. 조직 생활은 물론, 내 커리어, 내 인생, 친구, 자본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변화가 생겼다. 나는 이 과정에서 나아가기 위한 경멸이 아닌, 자존감을 잃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철학자들처럼 어떤 끝에 다다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몇 세기가 지난 지금도 적절한 문제의 실마리를 적어 둔 것은 놀랍다. 역시, 이 시기에 이 책을 만난 건 ‘운명’이라 하겠다.

‘모든 던져진 돌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물리법칙에 의하면 위로 던진 돌은 반드시 떨어지기 마련이죠. 아주 당연한 이야기인데요. 모든 던져진 돌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바로 너의 정수리 위로. 이 말은 이상과 가치를 높이 추구할수록 감당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종종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다. 사방에 뿌려둔 것이 한 번에 몰려올 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성숙하지 못한 시절엔 실제로 도망치기도 했다. 어쩌면 감당하지도 못할 높이로 돌을 던졌나 보다.

뭐, 나 혼자 던진 건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니체는 ‘불행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은 경험할 수 없고, 병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건강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불행 없는 행복이란 없고, 병 없는 건강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병을 제거하면 건강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으며, 병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걱정이 많은 편인데, 문제를 만들지 않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예방할 수 있을 것 같아서랄까. 사실 별문제가 아닐 수도 있고, 문제가 된 다음 푸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나도 이를 최근에서야 배우고 있다.

그런데 니체는 더 나아갔다. 문제(병)와 더불어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단다. 완전무결한 게 어디 있겠는가. 결국 내가 문제를 마주하는 게 두렵기 때문에, 결국 그게 무섭기 때문에 미리 겁먹고 발버둥 치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러분은 혹시 십 년 후를 위해서 사십니까? 십 년 뒤에는 죽을 수도 있는데요. 은퇴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나요? 열심히 일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은퇴하는 것이지 은퇴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없을거예요. 뭔가 새로운 게 열릴 거라는 망상과 착각을 하고 저는 열심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 순간이 삶의 시작이고 종착지라는 이야기예요. 과거, 현재, 미래를 직선적으로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머리 위로 던진 수많은 돌을 보면서, 나는 언제를 위해 사는지 물어본다. 모든 게 한 번에 바뀔 수는 없겠지만. 지금만큼은 나를, 경멸한다.

춤을 춰라

가벼움을 추구하는 철학자라니, 생각도 못 해봤다. 역시 니체는 모순덩어리다. 그런데 이 모순에 유혹되는 날 보고 있자니, 이 책의 제목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 그래, 한번이란 단어 말이다.

자신을 진정한 의미에서 경멸할 수 있는 자만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역설입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면을 견뎌내고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의지를 가질 때 우리는 그것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거죠. 따라서 사랑하는 자만이 경멸할 수 있어요. 약점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낙타와 사자 그리고 아이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사자에 가깝지 않을까?

그다음은 사자의 단계입니다. 사자는 자유 정신을 의미하죠. 최고의 권력자,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야수, 원하면 약탈해서라도 갖고자 하는 정신이 사자입니다. 사자에게는 다른 사람이 없어요. 내가 중심이에요. 사자의 단계에 오면 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아이들도 성장하다 보면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어서 방문을 걸어 잠그잖아요. 그걸 절대 나쁘게 생각하면 안 돼요. 사자의 단계로 진입하는 거예요. 이를 거부하고 문을 열라고 요구하면, 아이를 영원히 낙타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이 단계를 거치고 나야 나중에 스스로 문을 열어놓습니다.

여러 묵직한 펀치에 얼마나 니체를 소화했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마지막 펀치인 ‘가벼움’은 전혀 소화하지 못한 것 같다. 춤을 추라니, 춤추는 철학자라니.

진지함을 무기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가벼움을 좇으라니. 아이가 되라니. 다시 아이가 되라니. 잠시 차라투스트라를 경멸해본다.

니체의 관점에서 진지함은 죄악입니다. 우리에게서 웃음을 금지하는 것은 삶의 아름다운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 삶을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을 파괴하는 것이에요. 웃을 일이 없습니까? 삶의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춤추게 만드는 일이 없습니까? 우리의 의지와 열정이 소진되었다는 것을 의미해요. 어린아이들은 웃지만, 삶의 고통에 찌든 어른들은 웃지 않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진지해서 뭐 하나 싶다.

마무리

차라투스트라를 만나지 않았지만, 나만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 점에서 충분히 고독을 즐긴 내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고 싶다. 차라투스트라의 고독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꽤 고독했거든.

꽤 여러 부분에서 위안을 받은 걸 보면, 내가 외로운 길을 가고 있기도 하고, 여전히 함께 창조할 자들이 많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꾸준히 스스로를 경멸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니체는 투쟁하지 않으면 창조하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이야기해요. 우리가 사회생활에서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넘어가는 경우가 있잖아요. 영혼의 투쟁에서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궁극적 가치를 위해서는 실존적 투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초인은 투쟁하는 자,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 자신의 덕성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자입니다.

스스로가 피곤해 스스로를 놓을까 싶었던 적도 많다. 그래도 나를 지키며, 나를 바꾸며 지금까지 온 나와 앞으로도 함께 하고 싶다.

니체가 설정한 삶의 모토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즉 ‘아모르파티’입니다.

그래, 아모르파티다.

읽게 된 동기

스튜 독서소모임 지정도서

한줄평

그래,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

인상 깊은 문구

  • <차라투스트라>의 부제는 ‘모든 이를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입니다. 니체는 이 책을 스스로 깨우치고 문제를 해결하며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썼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 모두를 위한 책인 겁니다.
  •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게으름뱅이 독자들을 미워한다.
  • 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몹시 노력하여 얻는 집필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피가 생명을 상징하는 것처럼 글이 생명력을 갖도록 영감과 감정과 열정으로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로 쓴다는 것은 머리로 쓰지 않고 가슴으로 쓴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해석의 가능성이 천 가지입니다. 다양한 해석을 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겁니다.
  •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면 어떤 친구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면을 써야 한다는 거죠. 가면은 라틴어로 ‘페르소나’라고 합니다. 자기가 쓰고 있는 가면이 일체화되어서 자신과 가면이 분리되지 않을 때, 그것은 성격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잘 살아가는 것은 어떤 가면을 쓸지 결정하는 데서 좌우됩니다.
  • 자신만의 길을 간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남이 가는 평탄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 훨씬 더 쉽죠. 그런데 니체는 이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젊은이들을 유혹해서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라고 권유합니다.
  •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쓴 목적은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군중에게서 뛰어나가 독자적인 길을 가도록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 “창조하는 자는 함께 창조할 자들을 찾는다. 그들은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서판에 써넣는 자들이다.” 즉,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고 정리하고 설정하려는 사람만이 자신의 책을 읽으라고 말합니다.
  • 즉,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추구한 것은 기존의 도덕적인 관점에서 선과 악으로 분리되었던 것을 넘어서서 어떻게 새로운 도덕을 만들지에 관한 것이었어요.
  • 내려갈 수 있는 자만이 자기를 극복할 수 있어요.
  •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사건은 항상 그 반대의 결과로 일어난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올라가려면 내려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정말 깨어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또 다른 부분인 본능과 충동과 욕구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내려갈 줄 알아야 올라간다, 오르는 길과 내려가는 길은 같다는 의미예요.
  • 우리가 성당이나 절에 가서 기도를 드려 안위를 찾고 삶의 답변을 얻는다면 성당과 절이 미어터질 거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는 허무주의 시대에 살고 있어요. 허무주의 시대에는 성자의 말이 답이 아닙니다.
  • 자신의 내면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자신에게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경멸할 만한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는 자신을 절대 극복하지 못합니다.
  • 19세기에는 위대한 사상가가 많이 등장합니다. 1818년에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나고, 그다음에 프리드리히 니체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등장합니다. 그보다 조금 앞선 1809년에는 과학 분야에서 진화론을 발전시킨 찰스 다윈이 태어나죠. 이 네 명의 사상가를 알면 19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사는 문명의 기본적인 가치를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20세기와 21세기 문명의 방향을 설정한 사상들이 바로 19세기 중반에 태어났습니다. 이 때문에 19세기는 사상적・문명적 혼란기였다고 말할 수 있어요.
  • 허무주의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삶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삶 자체가 문제가 되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만약 어떻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어떻게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 어떻게 꿈을 실현할 수 있는지 안다면, 우리는 삶을 능동적으로 끌어안겠죠. 그런데 삶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어떻게 살아갈지 알 수 없다면 삶 그 자체가 문제가 됩니다.
  •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같지 않나요? 여러분은 ‘헬조선’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꿈과 희망을 갖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져버렸죠. 그러니까 어떻게 살지가 문제인 겁니다. 그런데 삶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시대가 우리 시대만이 아니라는 거예요. 19세기에도 똑같이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이것이 니체의 철학적 과제였습니다. 사람들이 삶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니체는 이것이 사람들을 필연적으로 우울하게 만든다고 믿지는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허무주의 시대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더라도 우울해질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죠.
  • 절대적 규범이 해체되고 이제까지 중요하게 생각했던 의미가 상실되는 시대, 이것이 우리가 사는 21세기입니다.
  • 허무주의가 지금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가? 전통적・윤리적 가치는 완전히 붕괴했습니다. 전통적 가치관이 지배적이었을 때 우리는 수직적 관계를 강조했습니다. 군신・부자・부부 등을 수직적 관계로 봤잖습니까. 스승은 마치 아버지고, 스승의 그림자를 함부로 밟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이 같은 전통적 가치가 붕괴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공유하고 지켜야 하는 새로운 가치가 있는가? 없습니다. 새로운 가치가 부재하는 거예요. 각자 개인주의・이타주의・자유민주주의・사회주의 등등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도대체 공통점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 니체는 허무주의의 기원이 ‘근원을 망각한 가치의 절대화’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인간이기 위해서 스스로 가치를 설정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가치 평가를 하고 가치를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기에 인간인 거죠. 다른 동물은 이런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가치를 창조하거나 설정하지 못해요. 이것이 인간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집단이 중요했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가치를 설정했다기보다 부족이나 민족 등 많은 사람을 결집해 문명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인류 문명 중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종교였습니다. 종교가 없는 시대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 신화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어요.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가치인데, 어느 날 우리는 가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그것이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으로 생각하고 절대화했어요. 이 때문에 오늘날 인간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 니체의 진단입니다.
  • 미래 철학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니체가 1880년대에 쓴 노트를 보면 주로 ‘미래 철학은 어떻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매달립니다.
  • 미래를 잃어버린 젊은이들은 나이가 들기도 전에 득도해요. 살아보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토리 세대죠. 사토리 세대는 명품, 좋은 자동차 등에 관심이 없습니다. 어차피 불가능하니까요. 할 수가 없으니까요. 미래에 대한 전망이 어둡다 보니 오히려 젊은이들이 득도를 해버렸어요. 이것이 오늘날의 모습이에요. 제가 대표적 문화 기호 세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욜로, 소확행, 사토리 세대. 우리보다 조금 먼저 일본에서 유행하고 한국에 들어온 개념이지만,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현상입니다.
  •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는데요. 심리학・인지과학・신경과학 등 현대 과학의 연구는 행복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수록 사람들이 덜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행복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 니체는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하늘나라의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마라!”라고 말합니다. 정념과 충동을 긍정하라는 거죠. 전통적인 기독교는 이런 것들을 악의 근원으로 전부 배척했잖아요. 우리가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 죄를 짓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니체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가 가진 모든 욕망・본능・충동을 초인이 될 수 있는 자원으로 만들라’고 말합니다.
  • ‘나를 넘어서는 무언가’라는 구절이 중요해요. 나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동경하고, 사랑하고, 창조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 우리 삶이 달라집니다. 나를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면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극복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 성급한 감정, 불같은 성질, 시기와 질투심을 경멸하고,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 말은 경멸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스스로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예요. 니체는 특히 현대인이 그런 것을 찾지 않으려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도 모르는 더없이 경멸스러운 존재가 마지막 인간이라는 겁니다.
  • “그대들이 체험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경멸의 순간이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 초인이 가능하죠. 지난 강의에서 왜 니체는 모든 이를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을 썼는지를 다루었는데요. “내게 필요한 살아 있는 길동무는 자기 자신을 따르고자 나를 따르는, 내가 가는 곳으로 나를 따라오는 자다.” 이것도 모순이었죠. 스스로 <차라투스트라>를 읽고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차라투스트라를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 초인의 길에 적힌 핵심적 과제는 다음과 같은 문장입니다. “더러워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한다.” 니체는 초인을 바다에 비유합니다. 모든 모순과 대립을 내면에 품고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 초인입니다. 이것이 니체가 초인 사상을 통해서 행복에 집착하는 마지막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이에요.
  •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문제를 겪습니다. 이 같은 문제를 판단해야 하는데, 여러분은 스스로 판단을 하십니까?
  • 유튜브가 가진 강력한 힘 가운데 하나는 시청각을 활용해서 우리가 순간적으로 판단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문자로 구성된 책은 우리가 상상하고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는데 비해, 유튜브는 휙휙 바뀌는 이미지를 통해 순간을 지배하는 거예요. 영상으로 어떤 상황이나 자료 화면을 보면서 우리는 이미 감정적으로 판단하고 들어가는 거죠. 이러한 순간의 지배자 세 가지는 모두 시장 논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가상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으면 상품이 팔리지 않습니다. TV나 잡지나 유튜브에 나오는 광고를 보고 꼭 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을 겁니다. 시뮬레이션은 결국 현실보다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사실보다 이미지가 더 중요한 시대, 진실보다 가짜가 훨씬 더 강력한 시대가 바로 우리가 사는 21세기 자본주의 시대입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달아나라, 나의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 달아나라, 거친 바람이 사납게 불어오는 곳으로!” 고독이 없으면 21세기에도 절대 초인이 될 수 없습니다.
  • 니체는 개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국가를 너무 신뢰하면 개인이 없어진다는 거죠. 국가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독재가 이루어지면 개인은 파괴된다는 것이 니체의 인식입니다.
  • 니체는 고독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 물리적 고독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고독을 느끼기 힘듭니다.
  • 니체의 이야기는 군중에게서 분리되어 ‘자신만의 길을 가라’는 것이지, 산속에 틀어박히라는 게 아닙니다. 산에 들어갔다가 내려와서 다시 사람들과 섞이고, 거기서 자신을 또다시 발견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길을 갈 능력을 회복하려고 다시 고독으로 되돌아가는 왕복의 길입니다. 끊임없이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교차되어야 합니다.
  • 외로움을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달려가는 사람은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너무 분리되어 자신의 내면 세계로 침전하며 성처럼 살아가는 사람 역시 진정한 의미의 고독을 향유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입니다.
  • 어떤 사람이 초인의 길동무일까요? 니체는 길동무를 ‘함께 창조하고, 함께 수확하며, 함께 축제를 벌일 자’라고 합니다.
  • 최근 정의라는 말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 같아요. 특정한 용어가 많이 사용된다는 것은 오히려 그 용어가 결여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유혹을 이겨야 덕성이 생깁니다. 악덕 없이는 덕성이 없는 것처럼, 유혹 없는 덕성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유혹에 냉담한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덕성이 없는 사람이죠.
  • 기독교적 가치관은 욕망을 억누르라고 이야기하죠. 니체는 반대로 욕망을 자연스럽게 승화시키고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무슨 욕망을 지니고 있는지 스스로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욕망을 나쁘고 악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자신이 어떤 종료의 옥망을 가졌는지 잘 모른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는 모든 열정은 결국 덕이 되었고, 그대의 모든 악마는 천사가 되었다.”
  • 이 세계가 너무 지옥 같잖아요. 그러면 죽은 다음에는 이런 고통과 갈등과 전쟁이 없는 완벽히 평화로운 세계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문제는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가 사는 세계말고 다른 행복한 세계를 꿈꾸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덕성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 세계를 긍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토피아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이것이 니체의 기독교 비판입니다.
  • 니체는 소위 지성, 영혼에 대해 ‘몸속에 있는 내장에 불과하다’는 비유를 해요. 흔히 영혼을 몸보다 훨씬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영혼 역시 몸의 하나일 뿐이라는 겁니다. 몸을 잘 가꾸는 사람이 영혼을 잘 돌본다고도 합니다.
  • 발전할 가능성은 모두에게 있어요. 변신의 가능성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존재하고, 모두가 초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극복해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니체는 ‘초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경멸할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찾아내야 한다’고 말해요. 자신에게서 참을 수 없는 부정적인 것,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 세 가지 변신 중 첫 번째는 낙타의 단계입니다. 낙타가 스스로 던지는 질문은 ‘나에게 제일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낙타가 어떤 동물일지는 잘 알 겁니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동물, 무거운 짐을 싣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동물, 복종하면서 황야를 걸어가는 동물이 낙타입니다. 그래서 낙타는 강하고 인내력 있는 정신을 상징해요. 낙타 단계의 덕성은 바로 잘 참아내는 인내력입니다.
  • 낙타 내면의 도덕적 법칙을 영어로 표현하면 ‘you should’예요. 이것을 행해야만 한다는 도덕적 명령이죠.
  • 그다음은 사자의 단계입니다. 사자는 자유 정신을 의미하죠. 최고의 권력자,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야수, 원하면 약탈해서라도 갖고자 하는 정신이 사자입니다. 사자에게는 다른 사람이 없어요. 내가 중심이에요. 사자의 단계에 오면 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아이들도 성장하다 보면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어서 방문을 걸어 잠그잖아요. 그걸 절대 나쁘게 생각하면 안 돼요. 사자의 단계로 진입하는 거예요. 이를 거부하고 문을 열라고 요구하면, 아이를 영원히 낙타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이 단계를 거치고 나야 나중에 스스로 문을 열어놓습니다.
  • 사자에게 내면화된 도덕적 법칙은 ‘I will’입니다. 자기 의지대로 하고 싶어 해요. 파괴의 정신입니다.
  • 사자가 자기의 의지를 갖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지닐때 비로소 도달하는 단계, 그것이 바로 아이의 단계입니다.
  • 아이는 삶의 시작이죠. 삶을 즐기듯이 놀아요. 특별한 놀이 기구가 없어도 스스로 놀이를 만들고, 놀이 규칙을 만드는 존재가 아이입니다. 여러분이 어렸을 때를 떠올려보세요. 놀이 기구가 없더라도 정말 재미있게 많은 놀이를 하면서 지냈잖아요. 그래서 아이처럼 유희하듯이 인생을 사는 게 제일 좋겠죠.
  • 아이에게 내면화된 도덕적 법칙은 ‘I am’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존재.
  • 니체는 투쟁하지 않으면 창조하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이야기해요. 우리가 사회생활에서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넘어가는 경우가 있잖아요. 영혼의 투쟁에서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궁극적 가치를 위해서는 실존적 투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초인은 투쟁하는 자,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 자신의 덕성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자입니다.
  •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하는 자가 있으려면 고통과 많은 변신이 필요하다.” 제가 니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도 니체의 책을 자주, 많이 읽습니다. 니체가 꿈꾸는 삶은 가볍게 사는 거예요.
  • 차라투스트라는 십 년 동안 고독을 즐기고 깨우침을 얻은 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나누고 싶었어요.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와 시장에서 초인을 가르쳤지만, 그곳 사람들은 반응이 전혀 없었죠. 사람들은 그를 존중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았어요. 정말 고통스러운 상황입니다.
  • 그 후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산으로, 자신의 동굴의 고독 속으로 돌아와 사람들을 멀리했다. 그리고 씨를 뿌련호고 수확을 기다리는 농부처럼 지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을 매우 초조했으며, 그가 사랑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도 가득했다. 그들에게 줄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다른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았던 차라투스트라는 일정한 거리를 둡니다. 혼자 생활해요. 그런데 고독이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면 사람을 파괴하죠. 고독도 적절해야 해요. 우리는 고독 속에서도 끊임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합니다.
  • 영원회귀 사상을 다룰 때 다시 언급하겠지만, 우리는 타인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고 스스로 착각합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삶을 훨씬 멋지고 아름답게 살아갈 거라고 확신하죠. 하지만 니체는 ‘똑같은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삶에는 여전히 고통과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고 해요. 이런 사실을 알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나요? 그러니까 위장을 해야 해요. 펼쳐진 것을 감출 수 있는 자기만의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삶을 위해 심오한 환싱이 필요해요. 모든 가치는 환상이에요. 환싱이 없는 가치는 없습니다.
  •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구원할가요?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 모든 종교는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종교예요. 따라서 앞으로도 종교가 사라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 우리가 신이 되지 않고서는 고통을 승화시킬 수 없습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견대낼 수 있단 말인가?’라는 이야기도 해요. 굉장히 독선적으고 오만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말은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고 해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 우리가 가볍게 살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니체는 단언해요.
  • 니체가 설정한 삶의 모토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즉 ‘아모르파티’입니다.
  •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만들어서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려면 개념을 잘 만들어야 해요.
  • 마지막 인간은 왜 사는지 질문을 던지지 않아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거죠. 그러면 결과적으로 노예가 된다고 합니다.
  • 니체는 평등주의를 반대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다는 것만큼 혐오스러운 사상도 없다고 이야기해요.
  • 평등은 본질적으로 쇠퇴에 속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격, 계층과 계층 사이의 간격, 유형의 다수성,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고자 하는 의지, 내가 거리 두기의 파토스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강한 시대의 특징이다.
  • 우리가 살아가는 데 중요한 가치가 딱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해보죠. 그리고 그 가치가 돈이라고 가정합시다. 우리의 삶은 자산과 소득에 따라 결정되겠죠. 이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받아들일 수 없어요. 우리는 가치의 스펙트럼을 놓고, 스스로 가치의 위계질서를 정해서 살아갑니다. 가치의 위계질서는 사람마다 다 다르죠. 어떤 것이 나에게 최고의 가치인지를 결정하다 보면, 겨로가적으로는 독특한 개성이 있는 삶을 사는 거죠. 따라서 니체는 ‘영혼 안에서 가치관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 자기 나름의 고유한 위계질서를 정립하는 것이 자아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인간은 살아가는 데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인식하고,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 권력 없이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두 사람 이상의 관계에서는 반드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순간적으로 변동이 될 뿐이죠.
  • ‘순종보다 명령이 어렵다.’ 늘 명령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이 제일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도 욕을 먹기가 쉬워요.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새로운 가치를 설정하고, 새로운 목적을 추구하는 일은 정말 어렵죠.
  • 무력감을 가진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를 기만합니다. 자기가 약하다는 것을 알지만, 약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기만하죠. 그리고 상상의 복수를 합니다. 상대방은 원래는 강한 것이 아니고 악한 것이라고 평가하죠. 이것이 타성이 되면 부정적 힘이 지배하게 돼요. 니체는 결국 문명에 퇴화를 가져온다고 결론 내립니다.
  • 삶의 가장 무거운 짐은 영원한 반복입니다. 사실 일상의 반복을 고통스럽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이 의미가 있든 의미가 없든, 이것만큼 우리를 짜증 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도 없죠. 매일 아침 일어나면 밥을 먹고, 직장에서 일하거나 학교에서 공부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행위를 반복하죠. 사실 고통의 원천은 반복입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된다는 것. 우리는 때로 싫증이나 불쾌감을 말하지만, 그보다 더 큰 고통은 권태와 지루함이죠.
  • 니체는 신체적・정신적 건강 문제, 친구와의 다툼, 살로메와의 실연 등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었어요. 더 힘든 것은 삶을 도저히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아무리 노력을 해도 똑같이 반복돼요. 이 사람은 아픈 사람이었잖아요. 매일매일 구토와 두통이 반복되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침묵하게 된 이유는 어느 날 갑자기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과학적 근거도 증거도 없어요. 어느 날 그렇게 인식하고 통찰하게 된 거죠.
  • 지혜의 돌은 세 가지 명제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이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체험하는 존재다.’ 앞서 자신으로 돌아오려면 자신을 떠나야 한다고 했죠. 예컨대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갈 때 그 나라의 사람과 문화, 정신을 만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런 낯선 것을 통해서 자신을 마주합니다. 외지에서 궁극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나인 거예요. 나의 낯선 면, 이질적인 면, 견딜 수 없는 성격은 여기 있으면 몰라요. 우리는 떠나야 해요. 그러다 보면 자신의 새로운 면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결국 체험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 수많은 책을 펼쳐 보고, 수많은 사람과 만나서 대화하고, 수많은 경험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우리가 얻는 것은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라는 거죠.
  • 셋째, ‘모든 던져진 돌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물리법칙에 의하면 위로 던진 돌은 반드시 떨어지기 마련이죠. 아주 당연한 이야기인데요. 모든 던져진 돌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바로 너의 정수리 위로. 이 말은 이상과 가치를 높이 추구할수록 감당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의미입니다.
  • 니체는 ‘불행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은 경험할 수 없고, 병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건강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불행 없는 행복이란 없고, 병 없는 건강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병을 제거하면 건강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으며, 병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 니체는 매일 산책을 했거든요. 돈이 없으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간단히 빵과 커피를 먹고 두세 시간 산책했어요.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고지대에서 문득 사상이 찾아와 노트에 휘갈겨 썼습니다. 니체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삶의 지혜를 얻는데, 왜 우리는 일상의 의식을 반복해도 삶이 버겁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실존적 체험 없이는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없어요. 용기를 가지고 각자 걸려 넘어지는 문제와 싸우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한마디의 문장일 수도 있고, 뺨을 스치는 바람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의 눈길일 수도 있어요.
  • 여러분은 혹시 십 년 후를 위해서 사십니까? 십 년 뒤에는 죽을 수도 있는데요. 은퇴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나요? 열심히 일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은퇴하는 것이지 은퇴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없을거예요. 뭔가 새로운 게 열릴 거라는 망상과 착각을 하고 저는 열심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 순간이 삶의 시작이고 종착지라는 이야기예요. 과거, 현재, 미래를 직선적으로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 우리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때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삶이 괜찮았고 그대로 다시 살기를 바랄 수 있다면 굉장히 멋지게 산 거예요. 그렇게 살라는 거죠.
  •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면 기억의 덫에 걸리는 과거의 기억이 달라져요. 반대로 지금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면 과거의 기억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죠. 그런데 우리는 착각을 하는 겁니다. 미래도 마찬가지예요. 미래도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투사하는 거예요.
  • 니체는 어떻게 영원회귀를 극복할 수 있을지 델포이의 신탁을 받았어요. 그랬더니 성문에 ‘순간’이라고 되어 있었죠. 니체는 주를레 바위를 보면서 순간이라는 의미를 깨우친 거예요. 삶은 영원히 반복되는데,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순간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은 모든 것이 시작점이자 종착점이기에 생성을 긍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 니체가 마지막으로 쓴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의 부제는 이렇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있는 그대로의 자기가 되는가?” 아주 간단한 문장이잖아요. 사람은 어떻게 본래의 자기가 되는가는 니체가 추구한 철학적 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 꿈을 가지지 않는 자는 절대 방랑하지 않습니다. 집에 머물죠. 방랑은 어딘가 내 삶에 맞는 곳을 찾거나 내 삶을 새롭게 보는 관점을 얻으려는 목적이 있어요.
  • 우리가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권력에의 의지를 지니고 초인이 되었을 때, 이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최고의 덕성은 사랑입니다. 최고의 권력자는 베풀 수 있는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 우리 인생이 비극이라도 그 비극을 온전히 수용하고 긍정하면서 가볍고 명량하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와 ‘가볍게 살기’예요. 이 두 가지는 상보적인 전제 조건이죠. 자신을 사랑해야 가볍게 살 수 있고, 가볍게 살 수 있어야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요. 세상을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요.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의 3부 모토입니다.
  • 나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이 좀 더 나아지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내가 좀 더 나아진다면 그것은 일종의 초인이 되는 것과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결혼할 이유가 없죠. 결혼을 윈윈 관계가 되어야 하고 시너지 효과가 나야 합니다.
  • 자신을 진정한 의미에서 경멸할 수 있는 자만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역설입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면을 견뎌내고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의지를 가질 때 우리는 그것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거죠. 따라서 사랑하는 자만이 경멸할 수 있어요. 약점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 사랑하는 자이고 싶은가, 아니면 기생충이 되고 싶은가? 차라투스트라가 시장으로 내려와서 만난 마지막 인간, 이들은 기생충입니다. 니체가 기생충을 아주 적절하게 정의했는데요. “이 짐승은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사랑을 먹고 살기를 원했다.”라고 했습니다. 현대인 중 이런 사람이 많다는 거죠. 본인은 다른 사람에게 베풀려 하지 않으면서 사회나 다른 사람이 주는 이점은 누리려는 사람이 기생충입니다.
  • 아모르파티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존재를 판단하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에요.
  • 내 존재에 책임을 물을 사람은 누구도 없어요. 신의 뜻, 우주의 의지도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에 있어요. 우리가 여기 존재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밖에 없죠.
  • 다른 하나는 나의 존재는 필연적이라는 뜻입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여전히 인간을 초인으로 기르고자 하는 사육자이고 훈육 교사입니다. 차라투스트라의 행복은 초인을 기르는 일에 있는 것이죠. 그는 여전히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사람들 사이로 내려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 자신이 이룩한 성과가 만족과 행복 대신에 고통을 초래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성과에 대해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이룩한 것이 실제로는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약간은 냉소적인 태도죠. 니체는 4부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초인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러한 말은 우리를 맥빠지게 합니다.
  • 니체는 절망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 인물로 카이사르, 나폴레옹, 쾨테, 베토벤을 꼽습니다.
  • 저는 허무주의 시대, 즉 모든 사람이 획일화되고 평준화된 시대에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고귀함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존중해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존중받는 법입니다.
  • 누군가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따라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것일 수 있는 무엇인가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결코 개인이 될 수 없습니다.
  • 차라투스트라에게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으려면 사랑하는 대상과 접촉해야 합니다. 온갖 욕망을 갖고 대상을 유혹해야 합니다.
  • 태양의 사랑은 다릅니다. 태양의 사랑이 위대한 것은 사랑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에요. 태양은 대상을 단지 눈으로만 사랑하지 않습니다. 태양은 대상과 모든 열정과 쾌락을 함께 나눕니다.
  • 우리는 끊임없이 지금보다 더 나은, 더 높은 존재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우월한 인간들은 대중에게서 벗어나 초인이 되고자 합니다. 이러한 발전의 과정에서 ‘지금’은 항상 극복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의 영원회귀 사상은 ‘지금’ 그리고 ‘순간’을 평가절하하는 어떤 입장도 반대합니다. 또 영원회귀 사상은 무한한 발전과 진보에 대한 믿음도 거부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개선될 수 있다는 것도 믿지 않아요. 우월한 인간들이 본래의 뜻처럼 ‘보다 높은 인간’을 추구한다면, 그들은 결코 초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순간을 긍정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 니체의 관점에서 진지함은 죄악입니다. 우리에게서 웃음을 금지하는 것은 삶의 아름다운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 삶을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을 파괴하는 것이에요. 웃을 일이 없습니까? 삶의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춤추게 만드는 일이 없습니까? 우리의 의지와 열정이 소진되었다는 것을 의미해요. 어린아이들은 웃지만, 삶의 고통에 찌든 어른들은 웃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