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게 된 동기 ]


뉴스 큐레이션 비즈니스를 할 때 샀던 책. 뉴스에 대한 누군가의 관점이 궁금했다.
 

[ 한줄평 ]


지극히 개인적인, 뉴스에 대한 한 작가의 견해. 딱, 그 정도.
 

[ 서평 ]


난 사실 뉴스가 재미 없었다.
아버지는 매일 9시만 되면 공중파 뉴스를 보셨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가 있는 날에도 꼭 9시에 맞춰 헤드라인을 보셨다. 도대체 무슨 재미로 그걸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성인이 돼서도 뉴스는 재미 없었다.
네이버 실검에 오른 유명인이 연관된 사건, 스포츠 기사 등이 내 관심 기사였다.
 
뉴스에 관심을 갖게 된건 불과 4년 전 일까?
 
우후죽순 생겨나는 스타트업이 부러웠다. 안드로이드 앱을 개발할 능력은 있었지만, 원하는 곳에 어떻게 닿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스타트업이 하고 싶었다. 주위 동료를 설득해 작은 앱을 만들기로 했다.
뉴스 큐레이션 서비스 SWIKI 였다.
 

내게 뉴스란?


뉴스 큐레이션 서비스였으니, 큐레이션을 해야 했다.
큐레이션을 하려면 매일 수백개의 뉴스를 읽어야 했다. 수백개 뉴스의 헤드라인을 읽고, 그 중 재미난 기사를 찾고 몇몇 기사는 상세히 읽은 뒤 코멘트를 달아 뉴스를 보다 쉽게 전달했다.
 
폭발적이진 않았지만, 스스로의 흥미를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나는 큐레이션 서비스를 1년간 운영한 뒤 퇴사해 ‘도밍고컴퍼니’를 창업했다.
 
콘텐츠의 홍수에서 ‘큐레이션’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개발자로서 개발자가 소비하기 좋은 뉴스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비즈니스를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도밍고컴퍼니는 2년간의 도전 끝에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당시 내게 뉴스는 콘텐츠였고, 비즈니스 아이템이었고, 관심사였고, 풀고 싶은 문제였다.
분명히 기회가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 기회에 내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패를 인정하며, 나는 새로운 포지션으로 자리를 옮겼다.
IT 기자가 됐다.
 
어느새 기자로 산지 세 달이 돼 간다.
지난 2년간 만들어진 뉴스를 가지고 비즈니스를 할 방안을 고민했다면, 이제는 내가 뉴스를 만드는 사람이 됐다. 비록, IT에 한정된 뉴스라지만 요즘 IT가 접목되지 않은 곳이 어디 있는가?
 
뉴스는 그동안 내겐 오로지 ‘소비하는 것’ 이었다.
누군가가 만들고, 누군가가 분석하고, 누군가가 외치는 그것을 그저 읽고 평가하는 소비자였다.
 
뉴스를 생산하는 기자가 된 뒤, 뉴스에 대한 내 시야는 확연히 달라졌다.
무려 3년 전에 구입한 이 책을 이제서야 재미나게 읽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제 내게 뉴스는 때론 내 스스로가 될 수도 있는 강한 연결이 이어졌다.
 

이 책이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인 이유?


알랭 드 보통은 한국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꽤 이름을 알린 작가다.
나는 STEW 독서소모임을 통해 [서평] 불안 ★★★☆☆ 이라는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었다.
 
그래서일까?
작가가 보는 뉴스가 궁금했다.
뭔가 색다른 분석을 기대했다. 그래, 다소 실망스럽다.
 
알랭 드 보통은 철저히 소비자 입장에서의 측면’만’ 적었다.
아마, 3년 전의 내게 이 책을 다 읽었더라면 ‘맞아!’ 라며 스스로의 도전을 합리화 했을 것이다. 그다지 뭔가 얻지도 못한 채 말이다.
 

언론은 제도상 어쩔 수 없이 기사 이면에 있을 더 확실하고 포괄적인 것을 이해하게 되기까지 기다리기보다 어떤 주제에 대해 미심쩍고 불완전할지라도 당장 감을 잡는 쪽이 더 낫다고 암시하느라 여념이 없다.

 
알랭 드 보통은 위에서 스스로가 언급한 ‘제도상’ 문제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이야기 했어야 했다.
결국 스스로가 뉴스에 대해 비판한 내용을 스스로의 책에서도 똑같이 보여줬다.
 

뉴스란 본래 오랫동안 동요하고 겁먹고 괴로워하는 대중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

 
뉴스를 소설이나 책 따위로 대입하면 크게 다르지 않다.
뉴스는 독자가 있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뉴스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독자가 보기 위해서는 독자가 원하는 뉴스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뉴스는 독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의 직업의식은 독자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달 할 의무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뉴스를 만드는 주최가 어디인지를 알면서도 이론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알랭 드 보통 스스로도 알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너무 빤하고 흔한 것들이 지닌 상대적인 미덕 혹은 결점을 조명하는 것이 뉴스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

 
언론사는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기업이다. 마땅히 그들이 가진 임무가 있겠다. 하지만, 현실은 이론과 다르며 어느 한 쪽의 희생만을 바라는 것은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기도 일 뿐이다.
 

뉴스는 이런 두서없는 분노에 대해 일부 책임이 있다.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납득할 수 없어 절망감을 느끼게 하고, 좀더 평등한 세상을 향한 당찬 포부를 교묘하게 박살내버리는 경제 분석으로 대중을 완전히 나가떨어지게 하는 데 일조하는 게 바로 뉴스다.

 
글쎄, 그런 뉴스를 만든게 ‘독자’ 아닐까?
 
뉴스를 조목조목 따지고, 이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함께 깐 부분들이 아주 틀리진 않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책의 부제인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처럼, 모든 것을 언급했을까?
 

우리의 두려움을 부채질하는 데, 뉴스는 잔인하게도 원근감에 대한 우리의 나약한 지각 능력을 악용한다.

 
‘뉴스’를 비판하며 스스로가 ‘뉴스’가 된 것은 그의 의도일까?
 

셀러브리티의 농담에 웃지 않거나 그의 재능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곧 셀러브리티 한 사람뿐 아니라 그를 추대한 사회 전체에 맞서는 것이다.

 
그를 추대한 사회 전체에 한 번 맞서본다.
 

[ 인상 깊은 문구 ]


  •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뉴스가 매시간 제공하는 언어와 이미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오셀로’의 플롯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뉴욕 포스트’ 1면을 해석하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간주된다.
  • 뉴스를 찾아 보는 건 귀에 조개껍데기를 갖다 대고 거기서 들리는 인류의 울부짖음에 압도당하는 것이다.
  • 시간이 흐르면 이 모든 뉴스들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 언론은 제도상 어쩔 수 없이 기사 이면에 있을 더 확실하고 포괄적인 것을 이해하게 되기까지 기다리기보다 어떤 주제에 대해 미심쩍고 불완전할지라도 당장 감을 잡는 쪽이 더 낫다고 암시하느라 여념이 없다.
  • 하지만 이런 것들이 진정 의미하는 바가 뭐란 말인가?
  • 언론이 칭찬받을 만한 지점은, 사실을 모으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그 사실들의 타당성을 알아내는 (지적 편향을 통해 갈고닦은) 기술이다.
  • 정치 뉴스가 따분하다는 대중적 인식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 우리의 두려움을 부채질하는 데, 뉴스는 잔인하게도 원근감에 대한 우리의 나약한 지각 능력을 악용한다.
  • 뉴스란 본래 오랫동안 동요하고 겁먹고 괴로워하는 대중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
  • 뉴스가 좀처럼 언급하길 꺼리는 것은 왜 세상이 그다지 크게 바뀌질 않느냐, 왜 거대한 권력과 자원이 우리의 어려움을 한 방에 해결하지 못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 설사 재벌 혹은 권력을 휘두르는 각료들을 죄다 감옥에 가둔다 해도, 국가는 여전히 해결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골치 아픈 문제들을 수없이 떠안고 있을 것이다.
  • 주류 언론은 우리가 노동의 목적, 정의의 본질, 시장의 적절한 역할 같은 보다 고유하면서도 폭넓은 질문들은 제기하지 못하게 막는다.
  • 시청자들과 독자들이 외국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진짜 이유가 특별히 천박하거나 고약해서가 아니고, 사건 자체가 지루해서도 아니고, 다만 뉴스가 충분히 호소력 있는 방식으로 사건들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라면 어쩔 것인가?
  • 우리가 보기에 너무 빤하고 흔한 것들이 지닌 상대적인 미덕 혹은 결점을 조명하는 것이 뉴스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
  • 우리는 어떻게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쏟게 되는 것일까? 어째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걱정거리와 동떨어진 것에 귀중한 정신적 자원을 기꺼이 소비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이 겉보기에는 2000년 전 이탈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특정한 정치적 음모를 다루고 있어도, 실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나는 우간다로 갔다.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면서도 왜 가고 싶지 않은지 알고 싶었다.
  • 나는 내가 세상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은 사진을 보고 수많은 출판물들을 읽었음에도 우리 행성 위에 존재하는 나라들 대부분에 대한 내 심상이 기껏해야 하나 정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우리는 좌파와 우파 정치세력 양쪽으로부터 보증받은 어떤 관념, 즉 국가 재정 상태야말로 한 국가의 가장 근본적인 실제라는 관념의 상속자들이다. 그에 따라 경제 뉴스는 모든 뉴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숫자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들기도 한다. 경제지표로 한 국가를 평가하는 것은 혈액검사 결과를 통해 어떤 사람을 다시 그려보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 뉴스는 이런 두서없는 분노에 대해 일부 책임이 있다.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납득할 수 없어 절망감을 느끼게 하고, 좀더 평등한 세상을 향한 당찬 포부를 교묘하게 박살내버리는 경제 분석으로 대중을 완전히 나가떨어지게 하는 데 일조하는 게 바로 뉴스다.
  • 뉴스는 대체로 탄탄한 정치적 관점을 갖춘 적절한 경제학 교육을 제공하길 꺼린다. 경제 문제 자체가 복잡하고 정신 사나운 것이어서, 또는 현상 유지를 통해 이익을 얻으니까 그럴 것이다.
  • 우리 시대의 가장 막대한 부가 가장 의미 있는 상품과 서비스, 그러니까 시나 연애 상담 같은 것을 판매함으로써 축적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 고상한 사람들은 차라리(착수된 사업이나 완성된 영화작품 같은) 그들의 실제 성과물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엘리트들의 주장은, 우리와 동시대인이지만 우리를 모르는 유명인을 영웅처럼 숭배하고픈 열망에는 어딘지 격이 떨어지고 유치한 데가 있다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다. 영웅 숭배는 수동적이고 열등하며, 무능을 표출하는 행위이자, 자신의 꿈과 포부를 충실히 좇지 않기에 삶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해서 아예 ‘도피하는’ 길을 택했다는 증거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 우리는 전례없이 기회의 평등을 중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 진취성, 인내와 노력, 자아실현에 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기사화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론적으로는 오늘날 성취할 수 있는 것에 한계란 없다.
  • 뉴스는 또한 통계적 현실을 일깨움으로써 우리를 도와야 한다.
  • 뉴스가 보여주는 것과는 반대로, 사실 대부분의 사업이 실패한다.
  • 우리가 지금껏 이룬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었나 생각하며 개별적으로 괴로워하기보다, 시기심을 가능한 한 충분히 탐구한 뒤에 이 감정에 대해 다 함께 속상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 셀러브리티의 농담에 웃지 않거나 그의 재능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곧 셀러브리티 한 사람뿐 아니라 그를 추대한 사회 전체에 맞서는 것이다.
  • 권리를 주장할 필요도 없고 평범한 직업에도 만족할 수 있는 행복한 무명의 성인은 이런 시나리오에서 진정으로 특권을 가진 사람이다.
  • 셀러브리티에게 딴죽을 거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저 경솔하고, 공감 능력이 부족하며, 질 낮은 기준에 익숙하고,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이들이다.
  • 우리는 주목받지 못해 화가 나 있고, 그래서 우리 몫을 빼앗아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단죄함으로써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 뉴스의 진지한 임무가 여기에 있다. 끔직한 사건에 대한 보도는, 인간의 혼란스러운 일면으로 인해 저질러버릴 수 있는 일들을 우리가 저지르지 않도록 최대한 격려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 심각한 범죄 기록이 없는 건 대체로 운이 좋거나 환경이 좋아서일 뿐, 본성이 타락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 유럽에서는 여러 세기 동안, 권력자의 서재와 침실에 진짜든 그린 것이든 인간의 해골을 장식품으로 놓아두었는데, 이 해골은 시선을 확실히 끌 수 있는 곳에 놓여 있어서 권력자가 라이벌에게 시시한 복수를 꾀하거나 연인을 배반할 궁리를 하는 동안 그의 사고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끊을 수 있었다.
  • 자연은 우리의 분수를 깨닫게 해준다.
  • 살인이나 폭발 사건은 열심히 취재하면서도, 뉴스는 평범한 죽음과 관련해서는 쓸데없이 비위가 약한 척 행동한다.
  • 우리는 조용하고 평온한 호텔에 그저 며칠 묵고 싶어 찾아가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조용하고 평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더 큰 포부를 거들어줄 물리적 환경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 표면상 우리는 문화에 접근할 기회가 흔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필요한 예술작품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은 기이하면서도 가슴 아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