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게 된 동기 ]


 
2017 STEW 독서소모임 네번째 지정도서.
 

[ 한줄평 ]


 
그동안 당신이 우울했던 이유. 그리고 내가 우울했던 이유.
 

[ 서평 ]


 
사회생활 6년차.
업계에 따라, 속한 조직에 따라, 그리고 개인 편차에 따라 6년간 얻을 수 있는 경험치는 천차만별일테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나름’ 의 성향이 생겼고, ‘나름’ 의 자존심이 생겼고, ‘나름’ 의 방법이 생겼고, ‘나름’ 의 예상 결과가 생겼다. 그래, 6년 전 아무것도 없이 사회에 뛰어들때와는 달리 이제는 꽤 많은 것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름’ 갖게 된 무언가 만큼의 ‘행복’ 과 ‘성취’ 를 얻게 되었을까? ‘나름’ 갖게 된 무언가 만큼의 더 나은 ‘결과’ 를 낼 수 있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나름’ 갖게 된 무언가 만큼 ‘잘’ 살고 있는걸까?
 
 

그래, 이제는… 이제는…

 
빠른년생. 어쩌다 보니 재수 없었고, 어쩌다보니 군휴학도 딱 맞아 떨어졌고, 어쩌다 보니 졸업 전에 취업이 덜컥. 24살 늦은 겨울 사회에 나왔다. 모든게 새로웠다. 몇 해가 지나야 대리가 되는지, 그리고 얼마가 지나야 과장이 되는지. 부장님은 얼마나 높은 사람이고, 이사님은 왜 피해다녀야 하는지. 그렇게 하나씩 눈 앞의 장애물을 넘다보니 어느새 서른. 그래, 이제는 마냥 어리광 부릴 수는 없게 되었다.
처음 업무에 투입되었을 때, 내가 만든 서비스가 세상에 출시될 때, 갑자기 지방으로 파견을 갈 때, 덜컥 작은 일의 책임자가 되었을 때. 조직이 개편되고, 팀이 바뀌었을 때, 정말 단단한 팀워크가 발휘될 때, 어느새 작은 파트를 리딩하게 될 때, 그리고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될 때. 그렇게 조금씩 새로움을 만나다보니, 나는 어느새 조금씩 무언가를 손에 쥐게 되었다.
별로 가지지도 않았으면서, 그리 대단하지도 않으면서, 양손에 한껏 쥔 무언가를 놓칠까? 빼앗길까? 그래, 어느새 ‘불안’ 은 내게 스며들었고, 그렇게 스스로가 되어갔다.
 
불안했다. 앞서 만났던 무책임한 사람들을 따라갈까봐.
불안했다. 앞서 만났던 무능력한 사람들을 따라갈까봐.
불안했다. 지금 서있는 이곳이 끝일까봐.
불안했다. 이 길이 낭떠러지일까봐.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구를 산 사람을 비웃기보다는 그들이 살았던 사회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장식장을 구매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필요한 일일 뿐만 아니라 보람 있는 일이라고 느끼도록 상황을 조성한 것이 그 사회이기 때문이다.

 
세용이 잘하네? 하는 칭찬이 듣고 싶었다. 아니, 그 칭찬을 더 못들을까봐 불안하고 무서웠다.
세용이가 한거야? 하는 칭찬이 듣고 싶었다. 아니, 그 칭찬을 더 못들을까봐 불안하고 무서웠다.
세용이가 했겠지. 하는 칭찬이 듣고 싶었다. 아니, 그 칭찬을 더 못들을까봐 불안하고 무서웠다.
오대리가 그랬어. 하는 칭찬이 듣고 싶었다. 아니, 그 칭찬을 더 못들을까봐 불안하고 무서웠다.
오대리한테 물어봐. 하는 칭찬이 듣고 싶었다. 아니, 그 칭찬을 더 못들을까봐 불안하고 무서웠다.
 

이 방정식은 우리의 자존심을 높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도 암시한다. 하나는 더 많은 성취를 거두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취하고 싶은 일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제임스는 두 번째 방법의 장점을 지적한다.

 
나는 내 불안감을 감추려, 스스로를 속이려 자존심을 부려댔고, 빈틈을 공격해댔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지금 살아야 다음이 있었고, 다음으로 갈 수 있다고 해야 불안감이 사라졌다. 예민한 나는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어느새 나는 누구보다 껄끄러운 사람이 되어있었다.
 
더 잘하고 싶어서, 더 칭찬 받고 싶어서 발버둥 쳤건만.
그래… 이제는 나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그래 그러면 날 칭찬하더라고.
그래… 이제는 내가 잘하는 것만 소리쳤다. 그래 그러면 날 칭찬하더라고.
 
 
어쩌다보니… 그래… 이제는… 이제는… 내가 왜이러고 있는지.
아니, 내가 누군지 모르겠더라.
 
 

사회인.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나는 부모님 곁을 떠나 독립했다.
그래, 떳떳한 사회인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냈고, 주말의 대부분을 사회활동을 하며 보냈다. 언젠가부터 늘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과 스스로의 부족함, 그리고 불안감에 휩싸여 달리고 달렸다.
2015년 독립을 선언한 이후 그래 2년간 맘편히 쉰적이 없더라.
 
주기적으로 묻는 편이다. 나는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서 왔는지.
매번 물을 때마다 답이 달라져, 늘 혼란스럽다. 지난 6년간 쓴 350개의 내 사색노트에는 내 감정선이 모조리 담겨있다. 스스로가 행복하기 위해선 그 무엇도 필요치 않다고 하더니만, 얼마 지나지않아 스스로의 행복에 필요한 목록을 적어놓고 있다. 나의 이중성에 분노하는 글과 스스로를 보호하며 행복감을 느끼는 글까지. 과연 나는 어디로 가는걸까? 나는 누굴까?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고용주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내가 작성한 버킷리스트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궁금한 것이 있다. 버킷리스트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게 맞는건가? 우와! 이걸 다 이루면 정말 좋겠다! 하는 감정이 드는게 맞는건가? 이렇게 살다간 이루지 못할거야… 하며 좌절감이 드는게 맞는건가?
이건 꼭 이루고 싶은데… 누군가 나타나서 날 좀 도와줘야 하는데, 그러면 내가 영어도 준비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혹, 기회가 나타났는데 준비가 부족해서 기회를 놓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드는게 맞는건가?
 
사회인은 한사람 몫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사람 몫을 하고 있는건가?
서른이 되면 단단하고 멋진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단단한가?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자신감있게 나아가는 내가 되고 싶었다. 나는 사회인인데, 서른인데. 지금의 스스로에 대한 잣대는 과연 내가 만든 것인가? 사회가 요구하는 것인가? 내 주변의 사람들이 정해둔 것인가?
 

“어디에서나 가장 터무니없는 관습과 가장 어처구니없는 의식들이 ‘하지만 그것이 전통이야’라는 말로 용인되고 있다. 유럽인이 남아프리카 호텐토트 사람들에게 왜 메뚜기를 먹고 몸에 붙은 이를 삼키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도 바로 그런 말을 했다. ‘그것이 전통이오.’”

 
과연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가? 무시해야 하는가?
사회인이 사회를 빼면 ‘인’ 이 남는건가? 그러면 나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나 때문인가 아니면 나의 사회적 지위 때문인가?”

 
내게서 사회적 지위를 뺀다면, 온전한 내가 남는건가?
그렇다면… 온전한 나는 과연 무얼까?
 
 

코크… 플리즈.

 
“스페인. 그곳에서 저는 행복하기 위해 그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콜라 한 캔이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죠.”
 
그래, 그렇게 말하고 나는 면접에서 합격했다.
진심이었다. 운동화에 반바지, 티셔츠에 밀짚모자. 스페인 어디든 짧은 영어와 바디랭귀지로 이동 가능했고, 나는 두 눈으로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것만도 행복인데, 시원한 콜라까지 마시면 세상을 가진 듯 했다.
 
대학교 4학년 여름. 한 달간의 스페인 여행은 내 인생을 바꾸었고, 그곳에서 돌아온 뒤 내 6년은 일로 가득차게 되었다.
행복을 위해서 아무것도 필요없었다고 말해놓고, 6년간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긁어모았다.
 
그렇게 맛있던 치킨이 맛없게 느껴질때, 그렇게 맛있던 캔맥주가 밍밍하게 느껴질때, 축구를 보며 잠이 들고, 게임이 재미없어질때. 아마도 그때마다 나는 조금씩 행복을 잃었던것 같다.
 

우리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

 
분명 개발도 잘하게 되었고, 프로젝트 리딩도 잘하게 되었고, 몸값도 올랐고, 커리어도 쌓았는데… 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떠나버렸을까? 맛있는 치킨과 캔맥주, 축구와 게임. 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던 그것들과 바꿀만큼 사회에서의 내 위치는 중요한 것이었을까?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여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과연 그게 맛있는 치킨보다 중요한게 맞는걸까?
 
학생시절 즐기던 그 행복들을 이제는 놓아줘야 하는걸까?
내 행복을 추억으로 바꾸며 나는 더 가치있는 것을 얻게 된걸까?
 
내 불안한 갈증을 없애줄 콜라는 더이상 없는걸까?
 
 

니들이 불안한 이유.

 
알랭드 보통. 꽤 유명한 작가.
소설가로 유명한 그의 첫번째 책이 철학서가 될줄이야.
 
내가, 인간이 불안한 이유를 역사부터 예술, 사회, 종교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다양한 이유를 만나게 될줄이야.
고대 철학자부터, 신까지. 알랭드 보통은 옮긴이의 말처럼 스스로의 사색을 마음껏 풀어냈다.
 
안그래도 불안하던 찰나, 작가의 이야기는 내 의문점들을 후벼팠다.
도대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고, 도대체가 아주 행복해 미치겠는 일거리가 없었다. 도대체 나란 놈은 왜이리 까탈스러운지, 우리나라 정서와 안맞는 놈인지, 시대를 잘못 탄건지, 그냥 모두가 이렇게 사는건지.
작가는 마르크스부터 애덤 스미스까지 인간이 불안한 이유라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끌어모아 토해냈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모르겠다. 우리네 인생은 당췌 뭘 위함인지.
인생을 살면서 행복에 겨워 미친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언론에서 비추는 일부분 말고, 한 사람의 일생 말이다.
 
우울함으로 가득 찬 이 책은, 다소 무겁고 충격적이라 다 읽은 뒤에도 소화가 되질 않는다. 작가는 이 묵직한 직구를 던지며 독자에게 무얼 원했을까? 독자들은 이 직구를 받으며 무얼 느꼈을까?
수많은 질문지만 남겨두고 떠나버린 이 책. 알랭드 보통의 스타일은 원래 이런건가?
 
하하.
당혹스러움과 불안감. 의문점과 불만족.
전혀 바뀌지 않는 내 생각과 인생. 그렇게 끝나버린 이 책에 대한 황당함.
이 서평에 이러한 내 감정이 잘 담겼을까?
 
정말이지 한 번 읽어서는 소화가 불가능 하겠다.
아니, 책을 읽는 것 만으로는 안되겠다.
 
어째 더 불안하게 만들어놨네.
 
 
 

[ 인상 깊은 문구 ]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구를 산 사람을 비웃기보다는 그들이 살았던 사회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장식장을 구매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필요한 일일 뿐만 아니라 보람 있는 일이라고 느끼도록 상황을 조성한 것이 그 사회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예를 들어 부나 존중—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준거집단(準據集團),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토크빌은 귀족 사회의 제약을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1776년이나 1789년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근대 서양의 주민이 중세 유럽의 낮은 계급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중세의 궁핍한 계급은 근대의 후손이 결코 누리지 못할 정신적 평온을 누렸다고 보았다.
그러나 귀족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과는 달리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기대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이 방정식은 우리의 자존심을 높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도 암시한다. 하나는 더 많은 성취를 거두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취하고 싶은 일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제임스는 두 번째 방법의 장점을 지적한다.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
수많은 이웃에게 폐를 끼치면서 가장 불필요한 제품을 발명하는 사람이 옳든 그르든 사회에는 가장 좋은 친구다. 나라에서 허세와 사치를 일거에 추방해버린다면, 포목상, 실내 장식업자, 재단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반년 안에 굶어죽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이른바 자선행위에 쓰는 1,000달러 가운데 950달러는 차라리 바다에 버리는 것이 낫다. 자선으로 먹여 살리는 주정뱅이 부랑자 또는 무익한 게으름뱅이 하나하나가 이웃을 부도덕하게 감염시킨다. 열심히 일하는 근면한 사람에게 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더 쉬운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정은 적을수록 좋다. 자선 행위로는 개인이든 인류든 나아질 수가 없다.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도움을 요구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귀한 사람은 결코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고용주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장점 자체보다는 장점의 표시에 보답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라로슈푸코)
우리가 저녁을 먹게 되는 것은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이나 빵가게 주인이 자비로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요구가 오랜 기간 이렇다 할 마찰 없이 공존할 수도 있지만, 이 둘 사이에서 진지하게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상업적 체제의 논리 때문에 언제나 경제적 요구가 선택된다.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임금에 의존하는 모든 노동자의 삶에서는 불안이 떠날 수가 없다.
하나는 사업의 일차적 목적은 이윤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경제적 요구다. 또 하나는 피고용자가 경제적 안정, 존경, 종신직을 갈망하도록 이끄는 인간적 요구다.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라는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술작품을 통하여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다
“[품위는] 다른 사람의 증언에 좌우되지 않는다.”
불안 덕분에 안전을 도모하기도 하고 능력을 계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한다면, 이런 점과 관련하여 다른 감정들의 쓸모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성의 도움을 받아 중도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샹포르는 그의 이전과 이후의 여러 세대의 철학자들의 염세적 태도를 반영하여 이 점을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했다.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
“어디에서나 가장 터무니없는 관습과 가장 어처구니없는 의식들이 ‘하지만 그것이 전통이야’라는 말로 용인되고 있다. 유럽인이 남아프리카 호텐토트 사람들에게 왜 메뚜기를 먹고 몸에 붙은 이를 삼키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도 바로 그런 말을 했다. ‘그것이 전통이오.’”
“도덕적이고 고결한 태도로, 합리성과 진실한 마음을 갖추고, 관습이나 허영이나 격식 같은 상류사회의 소도구 없이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만 만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이렇게 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멍청하고 허약하고 흉물스러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우리는 결국 혼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지 엘리엇은 계속해서 이 스페인의 성자만큼 똑똑하고 창조적이지만 자신의 잘못과 불리한 사회적 조건 때문에 위대한 행동으로 자신의 특질을 표현하지 못한 사람, 따라서 내적 자아와 비례하지 않는 지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도 세상에는 많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높은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들이 계속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지위에 대한 불안을 촉발하는 요인들도 바뀌어간다.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정치라는 말을 사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런 주장을 검토하면서 근대의 물질주의적 사회에는 육체적 생존의 관점에서 보자면 불필요한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동시에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필수품”으로 꼽히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으면 아무도 품위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따라서 심리적으로 편안한 생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득이 생존에는 모자라지 않는다 해도 공동체의 소득에 비해 현저하게 뒤처지면 언제나 가난에 시달리게 된다. 그럴 경우 그들은 공동체가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최소한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가질 수 없으며, 품위가 없다는 공동체의 심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다.”
몽테뉴는 힘 있고 부유한 자를 만날 때 흥분을 억제하고 가난하고 미미한 자를 만날 때 판단을 억제할 것을 요구했다.
건강해지기 위해 뭔가를 소비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정신과 신체가 같지만, 루소는 몸도 물이 필요할 때 술을 찾고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때 춤을 찾는 것처럼 정신도 모순된 요구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교역이 증가한다고 행복도 증가했던 것은 아니다. 자살과 알코올중독은 늘었으며, 공동체는 분열되었고, 유럽의 물자를 놓고 자기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오랜 고통 끝에 이제 병든 아이처럼 동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인정하기는 부끄러웠지만) 순간들이 있었다. 어린 아이를 위로하고 달래듯이 누가 안아주고, 입맞추어주고, 울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턱수염이 허연 중요한 관리였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갈망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 때문인가 아니면 나의 사회적 지위 때문인가?”
1850년 제라르 드 네르발은 애완동물에 대한 기존 관념에 순응하지 않고, 파란 리본에 가재를 묶어 뤽상부르 공원을 돌아다녔다. 드 네르발은 물었다. “왜 개는 괜찮은데 가재는 우스꽝스러운가? 또 다른 짐승을 골라 산책을 시킨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나는 가재를 좋아한다. 가재는 평화롭고 진지한 동물이다. 가재는 바다의 비밀을 알고, 짖지 않고, 개처럼 사람의 단자(單子)적 사생활을 갉아먹지 않는다. 괴테는 개를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괴테가 미쳤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농장 건설 몇 년 전에 보스턴에서 앨콧을 만난 에머슨은 프루트랜즈 회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교의는 모두 영적이지만, 늘 마지막에는 ‘돈을 좀 더 보내주실 수 없습니까?’ 하고 말한다.” 프루트랜즈가 시작되고 나서 여섯 달 뒤 공동체는 적대감과 절망감 속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부르주아적 규율조차 완강하게 거부한 결과 이상주의마저 맛이 가버리게 되었다는, 귀에 익은 보헤미안의 실패담을 남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