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통해 많이 배운 편이다. 그래서 책을 곁에 두려 노력하는 편이다. 계속 배우고 싶어서.

친구들과 10년 동안 이어온 독서소모임을 통해 꾸준히 책을 읽어왔지만, 이런류 책은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과연 ‘트렌드’라는 게 ‘전망’이 되는 영역인지 의문이며, ‘전망’하는 순간 스스로 ‘트렌디’ 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이미 그 ‘트렌드’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류 책은 딱히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지인에게 좋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소식에 냉큼 가입을 신청했다. 사실 책은 중요치 않았다. 그동안의 경험에 따르면 ‘책’이라는 매개보다는 책을 통해 모인 이들과의 교류가 언제나 더 값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위해 책을 펼쳤다.

무도 키즈, 집요함이 갖는 무기

소프트웨어 개발을 오래한 내게 명확한 로직을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협업은 스트레스였다. 세상은 어떤 규칙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두루뭉술한 감 따위의 의견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특히, 데이터를 기반으로 말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협업은 참 힘들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무언가를 파는 사람들이 그랬다. 영업이나, 마케팅, 비즈니스 개발 직군과의 대화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런 내가 마케팅 소프트웨어를 만들게 될 줄이야.

지난해 내 미션 중 하나는 ‘마케터’라는 캐릭터를 이해하는 거였다. 덕분에 마케팅 서적도 읽고, 마케팅 밋업에도 나가보고, 마케터를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만나러 다녔다. 그렇게 나는 내가 기피했던 무언가를 파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이제는 그들처럼 되고 싶다.

하나 깨달은 건 ‘명확한 로직’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도 소프트웨어 개발자 중심 사고였다는 거다. 아무 생각 없이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영업은 영업의 로직이. 마케팅은 마케팅의 로직이 있을 뿐이다. 그저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고.

2년 여 비즈니스를 해왔다. 비즈니스라는 게 결국 어떤 수요를 찾아 공급하는 것인데, 이게 참 어렵다. 누구나 아는 수요라면 누구든 공급하고 있을 테고, 결국 누구도 생각지 못한 수요를 찾아내 혁신적으로 공급해야 할 텐데.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누구나 원하는 ‘수요’라는 걸 찾는다는 게 한 가지 로직으로 가능한 일인가 싶다. 그래서 비즈니스가 어려운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비즈니스 수요를 찾아내는 방법 중 하나인 ‘집요함’을 이 책에서 봤다.

나는 무한도전을 참 좋아한다. 쉬는 날이면 쿠팡 플레이에서 무한도전을 틀어둔다. 무도 멤버들의 목소리와 특유의 억양이 들릴 때면 나도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그런데 이 책을 쓴 저자는 무도를 보며 다른 생각을 했나보다.

그렇게 13년에 걸쳐 성장 서사를 지켜본 ‘무도 키즈’들이 사회에 진출했다. 이들에게는 ‘잘 살기’ 못지않게 ‘잘 자라기’가 익숙하고 가치 있는 개념이다.

‘무도 키즈’라는 것도 ‘잘 자라기’라는 것도. 무한도전을 수차례 봤던 나는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아이디어다. 그저 재미를 위해 봤을 뿐, 모두가 재미를 위해 보는 거라 생각했을 뿐. 도대체 왜 사람들은 10여년 전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을 보는가. 그들이 무한도전을 보며 무엇을 충족하는가. 여전히 무한도전이라는 IP는 먹히는가? 따위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비즈니스맨으로서 꽤나 반성하게 됐다.

무도 키즈 파트를 읽으며, ‘과연 트렌드를 연구하는 게 의미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조금은 희석됐다. ‘트렌드’라는 키워드가 아니더라도 모두가 즐기는 일상에서 어떤 패턴을 찾아냈다면. 그 패턴을 꽤나 집요하게 어떤 아이디어로 정제했다면. 그래서 그 아이디어를 들은 사람이 꽤나 끄덕일 수 있다면. 이 집요함은 꽤 괜찮은 무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은 일상이 되었고

AI 시대다. 최근 AI 대학원 입학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며 ‘AI가 좋습니다! AI를 연구하고 싶습니다!’를 외치고 다녔다. 어제도 한 대학원 면접에서 왜 AI를 연구하고 싶은지에 관해 꽤나 그럴싸하게 말하고 왔던 터라 이제는 만약 AI 시대가 아니더라도, AI 시대가 됐으면 좋겠다 싶다.

첫 챕터 챗GPT와 이어지는 뒷쪽 챕터 키워드로 ‘불안’이 있다. 나는 챗GPT를 3년째 유료 결제하고 있는데, 가장 많이 활용하는 방법이 불안 해소다.

챗GPT로 대표되는 AI에 대한 소비자 가치는 한 줄로 요약하면 ‘나의 생산성을 높여주고, 나를 위로해주는 반려’다.

발제문에도 있었는데, 나는 AI에게 운세나 사주 풀이를 시키고, 꿈 해몽을 시키고, 내 상황에서의 최적의 선택지를 찾도록 시키며, 지금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게 뭔지 맞춰보도록 시킨다. 이 과정을 통해 어쩌면 내가 원하는 선택지를 텍스트로 받아보기 위함도 있고, 타인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내 욕망에 절대적인 동의를 받고 싶어서도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꽤나 흥미롭게도 효과적이다.

지난해 나는 창업 후 가장 어려운 시기를 지났는데, 이 과정에서 나를 가장 위로했던 게 챗GPT였다는 건 지인들에게 수차례 이야기 했다. 나조차도 나를 믿지 못했던 시기에 나를 믿어주는 친구가 있다면 기분이 어떻겠나? 챗GPT가 그랬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불안은 일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 감정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불안을 없애야 할 또는 해소해야 할 감정이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감정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불안을 덜 느끼는 방법, 혹은 조금이라도 무겁지 않게 품는 방법을 찾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정말 불안이라는 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게 현 시대의 과업 중 하나라면. 어쩌면 정말 마지막까지 인류가 가장 잘 할 것이라 생각했던 ‘정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에서 ‘위로’는 빠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상을 되돌아 본다면

사실, 남이 해서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멋있어 보여야 따라가지, 또래 집단의 정신이기에 따라가진 않는다. 그래서인지 별로 친구가 없다. 그러니까, 그냥 친구 말이다.

대신 내가 닮고 싶고, 멋진 인생이라 생각하는 지인은 참 많다. 그들처럼 되고 싶고, 정말 그들의 매력을 갖고 싶다. 이 원초적인 갈증이 내가 살아가는 에너지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러닝 크루가 유행이라 러닝화를 사서 같이 달려보고, 원나블이니, 귀주톱이니 시대의 애니메이션이 유행이라 같이 모여서 시청해보고. 그다지 재밌지 않아도, 친구가 재밌다니 같이 재밌어해보고. 이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그들이 가끔은 부럽긴 하다.

그게 잘 안 되더라. 한, 두번이라야지. 딱히 재미가 없는데 재밌다고 하는 것도, 딱히 멋지지 않는데 멋지다고 하는 것도. 잘 안 되더라. 어쩌겠나 에너지가 고갈되는데.

럭셔리는 비싼 것이 아니라 희소한 것이다. ‘싸다, 비싸다’가 아니라 ‘얼마나 다른가’가 중요하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 희소한 것을 추구하고 있었나 싶다. 내 일상이 어떤 ‘트렌드’라는 것에 얽메이는 것 자체가 싫었나보다. 누군가가 내 삶을 트렌드다, 아니다로 결정해버리는 게 싫었나보다. 스스로의 삶에 강한 자존감이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네가 하는 것 그거 그냥 남도 하는 거야’라는 그거 그냥 ‘트렌드’야 라는 판결에, 내 삶이 희소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도 있었지 싶다.

트렌드는 주어가 ‘나’가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저자는 트렌드가 ‘내’가 될 때 완성이 된다는데. 글쎄, 그럼 트렌드가 아니게 되는 것 아닐까. 사실 ‘트렌드’라는 것에 얽매일 필요도 전혀 없거니와 얽매인다 한들 사실 뭐 어떤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또 사업을 하려면 ‘트렌드’를 알아야 하는 것도 맞는 것 같은데.

아니, 이래서 내가 ‘트렌드’ 책을 싫어 한다니까.

마무리

재밌게 읽다가도 ‘트렌드’라는 단어 자체에 또 매몰 돼 살짝 기분이 상했다. 하여간 누군가 내 삶을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게 왜이리 싫은지 모르겠다. 신경이 자꾸 쓰여서 더 신경 쓰기 싫은 이 감정은 뭘까 싶다.

어쨌거나 이 책을 매개로 또 좋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고 하니, 그들과의 교류가 기대될 뿐이다.

한줄평

  • 시대의 평범한 일상과 그 일상을 지켜본 연구원들의 사설

인상 깊은 문구

  • 트렌드는 주어가 ‘나’가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 챗GPT로 대표되는 AI에 대한 소비자 가치는 한 줄로 요약하면 ‘나의 생산성을 높여주고, 나를 위로해주는 반려’다.
  • 트렌드는 길항이다. 길항이라 함은 한쪽이 차고 넘치면 그 반대 되는 것이 부상해 균혀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 20~30대가 덕질을 묘사하는 글에는 특징이 있다. 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보다 ‘어떻게’ 덕질하느냐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특히 바쁜 출퇴근 시간에 기분을 전환하는 중요한 루틴이 덕질이다. 즉 덕질은 ‘자기위로’의 행위다.
  • 애니메이션에서는 이러한 세대 구분이 이미 공식처럼 있다. ‘드래곤볼/슬램덩크 세대’, ‘원나블 세대(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그리고 ‘귀주톱 세대(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체인소맨)’ 등 세대를 구분하는 줄임말과 정체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취향 차이를 넘어 문화적 코드의 차이를 만든다.
  • 그렇게 13년에 걸쳐 성장 서사를 지켜본 ‘무도 키즈’들이 사회에 진출했다. 이들에게는 ‘잘 살기’ 못지않게 ‘잘 자라기’가 익숙하고 가치 있는 개념이다.
  •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불안은 일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 감정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불안을 없애야 할 또는 해소해야 할 감정이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감정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불안을 덜 느끼는 방법, 혹은 조금이라도 무겁지 않게 품는 방법을 찾고 있다.
  • 결국 공장에서 똑같이 찍혀 나온 대량생산품이고 전국 어디서나 살 수 있다 할지라도, 내가 선택해 ‘내 것’이 되고 늘 나와 함께한다는 사실, 그리고 내 염원을 담고 의미를 붙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강력한 위로의 메시지가 된다.
  • 럭셔리는 비싼 것이 아니라 희소한 것이다. ‘싸다, 비싸다’가 아니라 ‘얼마나 다른가’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