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게임을 하다 보면 캐릭터의 레벨이 오를 때가 있다. 띠링! 하고 효과음이 발생하고, HP와 MP가 모두 회복되며, 새로운 스탯과 스킬 포인트가 생긴다. 레벨에 따라 새로운 직업으로의 전직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게임 속 세상이지만 가끔은 현실 세계에서도 이런 효과가 생기면 좋겠다 싶다. 내 레벨이 몇이고, 내가 찍은 스탯과 스킬 포인트가 몇점이며, 그래서 내 수준이 수치화 됐으면 하는 상상 말이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지, 웹 소설 <나 혼자만 레벨업>에서는 이런 상상을 글로 표현했고, 이어서 웹툰과 애니메이션으로도 상용화가 됐다.

내가 가진 스탯
스탯(Statistics, 통계수치)은 게임에서의 능력치를 뜻하기도 하고, 스포츠에서 선수의 성과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평범한 직장인도 나름의 스탯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왔다.
최근 청년창업사관학교(청창사)에 입교해 많은 동기 대표자들과 코치, 교수님을 만나고 있다. 지난해 초기 창업 기업 대상 정부 과제에 모조리 탈락한 시점에는 도대체 왜 내가 합격하지 못했는지 불만이 가득했다. 그런데 청창사에 입교하고 보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첫 번째 충격은 나이였다. 청창사는 만 3년 미만 사업자와 만 39세 미만 대표자만 지원할 수 있는데, 나는 당연히 30대가 주를 이룰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입교하고 보니 20대 대표자들이 절반이 넘었다. 그토록 지원했건만, 나는 늘 탈락해왔는데. 저들은 도대체 왜 벌써 이 기회를 얻었나 싶어 충격을 받았다. 정말 재능의 영역이 있구나 싶었다.
두 번째 충격은 그들의 스토리였다. 나는 30대 후반이 돼서야 기회를 얻었고, 14년의 커리어를 기반으로 창업 스토리를 꾸려 간신히 합격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20대에 내 스토리보다 훨씬 매력적인 스토리를 만들었다. 심지어 이미 매출을 내는 대표자들도 있는데, 더욱 충격인 건 창업한지 만 1년이 채 되지도 않은 대표자들도 많았다. 어떻게 20대에 30대보다 매력적인 스토리를 만들었으며, 더 성공적인 사업을 꾸리고 있을까?
세 번째 충격은 멘토링이었다. SNS에서 정부의 창업 과제를 비판하는 글을 정말 쉽게 볼 수 있다. 심사 평가자의 역량이나 각 사업 계획서를 평가하는 시간, 불필요한 행사와 무의미한 멘토링에 그저 시간만 낭비한다는 글이다. 어느 누구 하나를 짚어서 말하는 게 아니다. 조금만 검색해보면 이런 글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지난 1개월 반 동안 굉장한 기회를 얻어왔다. 매 강의마다 지루할 틈이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으며, 강의를 마친 후에도 강사님들과의 네트워킹이 이어질 수 있다. 이들은 실제 10여년 사업을 이끌던 대표였으며, 이미 많은 코칭을 진행한 교수이자 멘토였다. 이제서야 이 기회를 얻은 게 너무도 아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이 기회를 얻음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대표자에게 요구되는 스탯이라 하면 매출, 고용 따위가 될텐데 단순히 스탯 자체에서 내게 절로 겸손이 주어지는 상황을 마주하다 보니 마치 <나 혼자만 사업 레벨업>이란 소설 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내가 가진 스킬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지를 보면 기의 흐름을 읽는 고수들이 등장한다. 워낙 상상 속의 이야기라 콧웃음칠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상상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마 더 시간이 흐른 뒤에도 푹 빠져있을 상상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최근 내게도 어떤 기의 흐름이 보인다. 바로 사람의 호감도다.
나는 개발자로 10년을 일했고, 언론사에서도 IT 기자를 했기 때문에 엔지니어 베이스의 창업가라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엔지니어 베이스의 창업자는 제품 개발을 최우선으로 둔다. 나도 그랬고 이는 당연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그게 가장 효율이 높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는 극한의 효율러다. 효율이 낮아지면 스트레스를 받으며, 효율을 추적하지 못하면 좌절하고, 효율을 챙기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우울하다. 그게 곧 엔지니어의 KPI이자 자존심이다.
내가 창업한 라프디는 어필리에이트 SaaS, 링크디를 만든다. 링크디를 처음 만들 때 내가 가장 자신할 수 있었던 건 MVP를 정말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거였다. 실제로 링크디는 법인 설립 후 1개월만에 MVP를 만들었고 이 MVP를 가지고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하지만 내가 일반적인 엔지니어 베이스 창업자와 조금 다른 전략을 세운 게 있는데, 아무리 SaaS 사업이더라도 고객과 오프라인으로 만난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일해본 적은 없으니 SaaS 사업의 글로벌 스탠다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SaaS 개발자로 일해보고 SaaS 사업을 해본 대표자로서, 우리나라에서 SaaS 사업을 잘 꾸리려면 고객을 오프라인으로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SaaS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업은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라프디 대표로서 갖는 경영 철학 중 하나다.
내가 자신있게 이 전략을 말할 수 있는 건 얼굴을 마주한다는 건 효율적이지 않은 전략이기 때문이다. 즉, 효율을 추구하는 엔지니어 베이스 창업자가 갖기 어려운 특성이다. 이는 마치 판타지 소설 속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구사하는 마검사와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엔지니어 베이스 창업자가 고객을 만나게 되면 굉장한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데, 바로 나 혼자 미팅에 가도 모든 답변을 실시간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링크디는 내가 설계를 시작했으며, 팀에서 함께 고도화해온 서비스다. 제품의 아이디어와 구현 방안, 실제 아키텍처를 모두 숙지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의 확장 방향성도 내가 추측할 수 있으며, 따라서 고객이 ‘지금 없는 이 기능, 앞으로 만들어줄 수 있어요?’라고 말했을 때, 실제 제공 시점과 별개로 가능 여부를 그 자리에서 답할 수 있다. 생각보다 이 답변에 굉장한 시원함과 신뢰를 느끼는 고객이 많다.
어쩌면 엔지니어링을 이해하면서 비효율을 이겨내고 대면 영업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내가 가진 어떤 스킬이 아닐까 싶다.

깨어나는 직업 스킬
게임에서는 고급 스킬을 얻기 위해서는 특정 레벨이 요구될 수 있다. 레벨 10 이상부터 파이어볼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식이다. 다소 게임 오타쿠 같지만 넘어가자.
창업 후 2년간 대표자 신분으로 영업을 다니다 보니 그동안 구사하지 못했던 어떤 감이 깨어난 듯하다. 굳이 텍스트로 표현하자면 상대의 호감도가 느껴진달까.
앞서 SaaS 사업에서도 얼굴을 마주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는데, 업계에서는 이를 ‘라포 형성’이라 부른다. 라포(Rapport)는 심리학 용어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형성되는 상호 신뢰 관계 또는 유대감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대화 상대가 내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상황에 따라 실시간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가 라포를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당장 떠오르는 세 가지만 이야기 하자면.
1. 감사
첫 번째는 감사다. 처음 만난 상대에게 뭐가 감사하냐 할 수도 있겠다. 나도 이렇게 영업을 다니기 전까지는 영업 사원들의 친화력이 참 신기했다. 내 친구 중 하나는 순댓국집에 가면 순댓국을 주문하지 않고 철판볶음을 주문한다. 순댓국은 서비스로 받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처음 만난 상대에게 감사를 표하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건 ‘나를 만나준 것에 관한 감사’다.
그렇다고 빈 말을 하라는 게 아니다. 이건 나를 만나주지 않은 사람을 무수히 경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감사함이 나온다. 얼마나 감사한가? 귀찮고 바쁠텐데, 그것도 자신의 업무 시간을 내어서 나를 만나주다니. ‘바쁘실 텐데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멘트 한 번에 어색한 분위기 자체가 밝아지며 미팅이 시작된다. 물론 미팅을 마칠 때도 똑같이 감사하며 마친다. 그동안 나를 만나주지 않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도 감사할 따름이다.
2. 공감대 형성
두 번째는 공감대 형성이다. 나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10년을 일했고, 팀장과 부서장을 경험했다. IT 기자때는 수백명의 개발자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때문에 대부분의 개발자와는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이건 내게 너무도 쉬운 일이다. 하다못해 ‘요즘 AI IDE 뭐 쓰세요?’라는 질문만 던져도 신이 나는 게 개발자란 종족이다. 신이 난 개발자는 내가 말을 막아야 할 정도로 말이 많아진다.
마케팅 솔루션을 만들다 보니 마케터와도 참 많이 만났다. 이들은 늘 ROAS라는 KPI에 압박을 느끼고 있고, 다양한 노가다 작업에 지쳐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잘 나가는 업체는 이렇게 하라고요?’라는 레퍼런스다. 마케팅이라는 게 개발과는 달리 마케터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서 성과가 보장되지 않는다. 개발은 개발자가 개발을 잘 하면 대부분 문제가 해결된다. 때문에 개발자는 자신이 잘 하기 위한 도구 따위에 관심이 많고, 마케터는 자신보다 잘 하는 레퍼런스 정보에 관심이 많다. 타 업체의 마케팅 방법은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기 때문에 이런 정보는 내게 어려운 재료가 아니다.
상대가 말하고 싶은 주제를 물어봐주고,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것. 이것보다 강력한 공감대 형성이 있을까 싶다.
3. 칭찬
세 번째는 칭찬이다. 나는 사람을 관찰하는 패시브 스킬을 가지고 태어났다. 주변인들의 변화를 감지하고 전과 다른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건 내 노력으로 얻지 않은 기본 장착 스킬이다. 그리고 이는 상대에게 던질 수 있는 칭찬 거리를 찾는 방향으로 스킬 업을 해왔다.
먼저 타인과 조금 다르게 힘을 준 부분을 찾는다. 헤어 스타일이라던가 안경, 시계와 같은 악세사리. 신발과 같은 패션 아이템 등에 힘을 줬다면 이건 의도했을 확률이 높다. 생각보다 단순하다. 나는 그들의 다른 점이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보이고, 그 노력에 감탄할 뿐이다. ‘오, 헤어 스타일이 매력적이시네요’, ‘오, 안경 스타일이 독특하시네요.’, ‘오, 신발 컬러감이 좋습니다.’ 역시 빈 말이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다. 전혀 오바할 필요 없다. 그리고 대체로 동성인 남성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동성에게 칭찬하기 가장 쉬운 것 중 하나가 목소리다. 나는 다소 하이톤의 목소리를 가졌는데, 때문에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에 관한 갈증이 있다. 적어도 지난 14년의 커리어 중에서 30여년의 삶 중에서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남성 중 자신의 목소리를 컴플렉스라 느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매력적인 목소리를 칭찬하는 건 거저 먹는 칭찬 거리다. 근데 진짜 부럽다.
이성인 여성은 칭찬 난이도가 다소 높다. 괜한 오해를 살 수 있고, 일을 하며 그런 오해를 만들면 정말 조금도 좋을 게 없다. 이럴 때 가장 쉬운 칭찬은 상대의 노력에 관한 칭찬이다. ‘팀장님, 늘 친절하게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리님, 바쁘실 텐데 제 문의에 늘 빠르게 회신 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장님, 혼자 일 다 하시는 것 같아요. 정말 많은 업무 처리하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기분 나쁠 일이 뭐가 있나? 고맙다는데 뭐가 고맙냐고 비아냥 거리는 사람은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지난 창업기를 쓰고 벌써 두 달이 흘렀다. 그 사이 내게는 정말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그 중 하나가 헤어 스타일을 바꾼 것이다. 가르마 펌을 했는데 이렇게 긴 머리로 펌을 한 건 내 인생에 처음이라 주변 지인들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그리고 나는 내 헤어 스타일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오늘 펌을 한지 한 달 만에 미용실에 갔다. 미용사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주변에서 너무 반응이 좋았어요. 그리고 그런걸 다 떠나서 제가 너무 만족스럽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표정이 바뀌더니 너무 즐거워했다. 종종 조수에게 맡겼던 드라이도 직접 해주고, 머리에 볼륨도 넣어줬다. 그냥 내 한 마디로 선생님의 토요일 오후가 살짝 기분 좋아졌다는 사실 자체에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 묘한 소리가 들렸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많은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이야기들 아닌가? 감사해라, 칭찬해라. 지루하고 시시한 얘기라 넘겼던 유튜브 영상 섬네일들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감사하며 살면 감사할 일이 생긴다던데, 어째 최근 내 삶이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업 후 2년이 흘렀다. 2년 회고를 아직 못했는데, 2년 중 요즘이 가장 마음이 평온하고 일도 잘 풀리는 것 같다. 여전히 고민이 많고, 걱정도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생각이 왠지 앞으로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어쩌면, 그동안 다음 스테이지가 허락되지 않았던 건, 진입 허용 레벨 제한에 걸려서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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