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은 내가 커리어를 시작한 기념일이다. 매년 찬 바람이 불면 한 해를 잘 이겨냈다는 마음에 다소 들뜨곤 한다. 뭐든 초기에 가장 많이 느는 법. 내 커리어도 주니어 시기엔 새로운 무언가를 경험하며 정말 많이 배웠다. 내 배움이 날아가지 않도록, 특별히 가진 게 없으니 갖게 되는 건 잃지 않도록 차곡차곡 잘 쌓았다. 그렇게 10년을 쌓았더니 이제는 작은 언덕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올해는 11월 1일을 잊었다. 10년을 챙겼던 기념일인데, 기념일 챙기는 것 참 좋아하는 사람인데. 어느새 12월을 맞이한 2022년은 정말이지 무언가를 얻어내기 정말 쉽지 않았던 해다.

도대체 2022년은 왜 그랬을까. 언제나처럼 늘 한쪽에서는 치열함을 놓지 않았는데. 왜 얻어내지 못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조금은 다른 생각을 만나게 됐다. 나는 왜 얻어내야만 할까. 얻어내기란 뭘까. 얻어내지 않고 커리어를 이어 나갈 순 없을까? 얻어내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건 없을까? 어쩌면, 얻어내기에 다음 레벨이 있는 건 아닐까?

찬 바람이 불다 못해 찬바람이 머무는 계절에서야 지난 시기를 돌아본다. 과연 얻어내기란 뭘까. 이 글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얻어내기’의 3단계를 적어본다.

1단계 : 원하는 것 정하기

언젠가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세용아 너는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것 같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날의 친구 목소리가 떠오르는 걸 보면, 나는 그 문장이 참 마음에 들었나 보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힘에 부칠 때 그 목소리가 떠올랐던 걸 보면, 나는 그 문장이 참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나는 원하는 것을 늘 얻어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퇴사를 고민하거나 현 조직에 바뀌지 않는 불만을 토로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늘 ‘원하는 것’을 정하라고 말했다. 원하는 게 명확하지 않은 채 고민만 지속하는 건 결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고. 그냥 그렇게 불만만 토로하고 멈추면 내일 또 원치 않은 상황을 마주해야 한다고.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이렇게 답한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사실 쉽지 않은 것 맞다. 인생이라는 건 꽤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한가지 상황만 떼어내서 볼 수 없다. 직장에서 문제가 풀리면 가족과 문제가 생기고. 가족과 문제가 풀리면 친구와 문제가 생긴다. 원하는 것을 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일단, 원하는 게 뭔지 정해야 한다. 잡스옹은 말했다. 내면의 소리에 기울이고 직관을 따라가라고. 다른 건 다 부차적인 것이라고. 인생의 대부분을 일에 몰두했지만 잡스는 그걸 원한 것이다. 나는 잡스처럼 극단적이고 싶진 않지만, 나는 그렇게 산다면 즐겁지 않을 것 같지만. 잡스는 그걸 원했다. 즉, 잡스는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면 친구의 말이 맞았다. 나는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내가 상상하는 걸 현실화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개발은 가진 것 없는 내게 좋은 도구였다. 시간이 흘러 직접 개발하는 것 외에도 내가 상상하는 걸 현실화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생겼다. 이제 나는 직접 개발하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

글 쓰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내 생각을 잘 정제해서 전달하고 상대가 내 메시지를 이해할 때 굉장한 쾌락이 있다.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었고, 언젠가 책을 쓰고 싶었다. 우연히 책 만드는 일을 배웠고, 출판사를 만들어 직접 책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한 출판사의 제안으로 정말 책을 썼고, 그렇게 작가가 됐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일단, 원하는 게 뭔지 정해야 한다. 대부분은 이것 하나면 된다. 시작이 반이라 했다. 삶에서 마주하는 문제 중 절반 이상은 원하는 것을 정하는 행위 자체로 해결이 됐다. 어쩌면 내가 가진 능력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게 아니라 ‘원하는 것을 정하는 것’ 아니었을까?

2단계 : 원하는 것 얻어내기

내 주니어 시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SI 개발자다. 주어진 환경에서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는 일이다. 이 환경은 마치 대학 시절 PASS/FAIL로 나뉘는 과목과 같다. 고객사가 원하는 일정에 원하는 퀄리티만 내면 그 이상은 그다지 중요 요소가 아닌 환경이다. 나는 이 환경에 나름 잘 적응했다. 여전히 그 경험치를 활용하고 있으니 어쨌든 그 환경에서 얻어야 할 건 참 많이 얻었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스타트업 창업자다. 세상 모든 창업자가 그렇듯 성공한다는 마음은 있지만 무조건 성공한다는 법칙따윈 없다. 때문에 늘 플랜B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0대 마지막 해에 창업했던 내 플랜B는 이 창업 시기를 커리어와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내 창업 스토리를 칼럼으로 연재했고 이 칼럼으로 이어진 몇몇 사람들과 다음 커리어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내 주니어 시기 세 번째 커리어로 이어졌다. 스타트업 성공이라는 플랜A는 실패했지만 플랜B가 성공했으니 두 번째 계획은 성공이었다.

셋째는 IT기자다. 글쓰기를 좋아했고 IT에서 일했다. 이를 조합하는 건 막연한 상상이었는데 두 번째 커리어의 플랜B가 세 번째 커리어를 만들었다.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기자라는 직업은 뭐든 물어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나는 창업자에게, 개발자에게 그동안 묻고 싶었던 것을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었다. 화려한 호텔에서 에스토니아 대통령에게 에스토니아 IT교육에 관해 물었던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 4K 영상으로 저장돼있다.

그렇게 내 주니어 시기는 원하는 것을 정하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건 사실 참 쉬운 일이다. 원하는 걸 얻어낼 확률이 50%라면 원하는 것을 2개 정하면 된다. 그러면 50%인 1개는 얻어낼 수 있다. 25%라면 4개, 10%라면 10개를 정하면 된다. 문제는 확률을 계산할 수 없는 환경을 마주했을 때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지 못할 환경을 마주할 때가 있다. 정확히는 얻는 것 보다 잃는 게 더 많은 상황을 마주했을 때다. 주니어시기를 마치고 현 조직에 합류한 뒤 시니어가 됐다. 개발팀 5명의 팀장으로 시작한 게 작년인데, 어느새 개발부서 10명의 부서장이 됐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만 했던 내게 이제는 잃는 것도 생각해야 하는 시기가 됐다.

얻어내는 게 익숙했던 내가 얻지 않는 게 이득이 상황을 마주했다. 어느새 다음 단계에 도착한 것 같다.

3단계 : 견뎌내기

‘열심히’라는 저주에 빠진 적이 있다. ‘열심히’가 미덕인 주니어 시절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그저 열심히 살았다. 언젠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열심히’를 위한 ‘열심히’를 하는 내가 보였다. 일을 열심히 하면 그저 더 많은 일이 주어지는 참 바보 같은 상황 말이다.

때문에 나는 생각을 해야 했다. 원하는 것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가진 것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했다. 때로는 얻지 않아야 잃지 않는 상황을 마주한다. 언젠가 들어온 이 단계를 나는 ‘견뎌내기’라 부르기로 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A, B, C 등 3개를 가진 상황에서 D를 얻어내야겠다는 선택을 했다. 나는 D를 얻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고 결국 D를 얻어냈다. 금의환향을 기대하며 돌아왔을 때 내가 가졌던 A와 B가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D를 얻고 A와 B를 잃었다. A, B, C 등 3개를 가졌던 나는 이제 C, D 등 2개만 갖게 됐다. 나는 과연 D를 얻어냈다고 할 수 있을까.

C, D 등 2개를 가진 상황에 E를 얻어낼 고민에 빠졌다. 이제 내게는 E를 얻어내야겠다는 1단계 선택에 더불어 C, D 등 2개를 지켜야 하는 또 다른 문제를 마주했다. 만약 E를 얻고 C, D를 잃는다면 나는 과연 E를 얻어냈다고 할 수 있을까? A와 B를 잃었던 경험을 떠올리며 나는 결코 E를 얻어내야겠다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내가 얻어내고야 말았던 전략을 백지화하고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밤마다 눈앞에 E가 보이고 원하는 것을 얻어낼 방법이 있는데 C, D를 잃을까 두려워 움직이지 못하는 내가 너무 한심스럽다.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 단계는 어느샌가 내가 들어온 ‘견뎌내기’ 단계다. 나는 C, D를 지키기 위해 E를 얻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한다. 지난 10년을 얻어내며 살아온 내게 움직이지 않는 건 굉장히 괴로운 일이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얻어내라 말해온 내 지난 철학에 반하는 건 때로는 내 커리어 전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내 직관은 말한다. 결국 견뎌내야 한다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요. 잃는 것이 얻는 것”이라 말하던 군자들의 맥락을 이제 조금 이해한다. 얻어내던 것보다 놀라울 정도로 올라간 난이도에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겠다. 얻어내기의 단계가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겠다만, 4단계와 5단계가 있다면 아마도 3단계와는 또 다른 난이도를 보일 것이다. 아마도 잃지 않으며 얻어내는 단계가 아닐까 싶다.

견뎌내기는 결코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원하는 것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시련이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온 자에게 주어지는 상당한 무게감이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과정의 쾌락을 참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선택이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나로서 살기

원하는 것을 정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견뎌내기까지. 얻어내는 3단계를 정의하고 행하며 삶의 안정적인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려 한다. 기하급수적이라던가 J커브 등의 급격한 경사는 삶의 특정 영역에서는 즐거울 수 있으나 삶 전체를 보자면 굉장한 리스크라고 생각한다. 결국 세상은 균형과 조화를 원하니 혼자가 아닌, 함께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회를 만들고, 기회를 얻어내는 게 미덕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고 실천하는 용기가 멋진 삶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에 매몰돼 찾아온 기회를 보지 못한다면 그것 나름대로 바보 같은 삶 아닌가 싶다. 결국 내가 원하는 건 나로서 사는 것이지 어떤 것 하나만을 얻어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에 흔들리는 삶을 원치 않는다. 반면에 감정이 없는 삶 역시 원치 않는다. 커리어에서 리더가 된 지 어느새 1년. 비로소 시니어 레벨에 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나로서 살기 위해 감정을 다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