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네이버 사전)

사회생활을 한다면, 정치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 이 바닥에서 다다익선은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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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

내가 꽤 재밌게 본 미국 드라마다. 주인공 케빈 스페이시의 명연기는 물론, 스토리라인 또한 훌륭하다. 물론 시즌이 넘어갈수록 내 취향과 달라지긴 하더라.

정치가 적절할 경우


과유불급이라 했지, 정도를 지켰을 경우의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정치는 늘 위험할까? 정치는 늘 옳지 않을까? 글쎄, TV에서 보이는 정치인의 행위만 정치는 아니다.

정치는 주어진 자원, 그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생각해보자. 그동안의 이해관계만으로 일사천리가 되는 일이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다. 구관이 명관이라 했다. 정치의 사전적 정의에도 ‘이해를 조정한다’는 문구가 나온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결국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리를 떠나 은퇴자가 돼서도 여기저기서 연락이 온다면 성공한 인생이라 하더라. 아직 은퇴를 하지 않았더라도 생각해보자. 조직의 구성원이 아닌 ‘나’로서 이해관계를 형성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자. 이미 만들어진 이해관계가 있다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생각해보자. 이해관계를 만드는 것이 나쁜 일인가? 정치를 하는 것이 나쁜 일인가? 과유불급이라 했다. 정도를 지키면 된다.

적절한 사람들과 적절한 관계로 적절한 삶을 산다면, 정치는 결코 악이 아니다.

정치가 부적절할 경우


문제는 역시 정도를 벗어났을 경우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도를 지킨다. 사회가 정상적인 경우엔 말이다. TV에서 나오는 ‘갑질’은 흔치 않은 경우다. 특이하기에 기삿거리가 되고,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비이성적인 경우가 많이 보이긴 한다.

누군가와의 이해관계에 부적절한 ‘목적’이 들어갈 경우 이는 부적절한 정치가 된다. 재산을 노리고 맺은 이해관계, 불륜, 청탁. 부적절한 ‘목적’이 잘못된 것이다.

컴퓨터를 악의적으로 다루는 ‘크래커(cracker)’가 나쁜 것이지,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부적절한 정치는 부적절한 ‘목적’에서 나온다. 결코 정치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이해관계. 선을 넘는다면, ‘삐빅’ 오프사이드(offside)


‘오심도 경기의 일부다’

지난 밤(9/15) 손흥민의 경기가 있었다. 경기 막판에 손흥민이 페널티 라인 안에서 반칙을 당했지만, 주심은 반칙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과는 1-2 손흥민이 속한 토트넘의 패배였다.

손흥민의 팬으로서 참 아쉬운 장면이었다. 분명 디딤발을 차였고, 페널티킥이 주어져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심도 경기의 일부다’는 말은 가혹하다.

지난 월드컵에서 VAR(Video Assistant Referee, 비디오 보조 심판)이 도입됐다. 하지만 VAR 판독권을 주심에게 줘 여전히 문제의 소지를 남겼다. 그럼에도 VAR로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는 점에 한 걸음 나아갔다고 본다.

공격수는 수비수 라인을 무너뜨리고 골을 넣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패스를 받기 전 수비라인을 넘어 있으면 ‘오프사이드’라는 반칙에 걸린다. 이 경우 공격수가 잘못한 것일까? 오프사이드 반칙만 두고 본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오프사이드 반칙의 경우 반칙자는 선을 넘은 공격수니까.

하지만, 오프사이드를 만들기까지는 패스를 주는 선수의 빠른 판단력도 필요하다. 어쩌면 라인을 잘 컨트롤해 반칙으로 만든 수비수들이 ‘잘’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경우 무조건 공격수를 나무랄 수는 없다. 비록 공격수가 반칙자가 됐을지라도 말이다.

이해관계를 잘 형성하고, 적절한 범위의 선을 넘지 않는다면 그래서 우리나라가 세계 시장에서 적절한 위치를 고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를 두고 ‘외교를 잘 했다’ 평한다.

외교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나라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관계를 맺는 일’이다.

자원이 한정된 우리나라는 이처럼 외교를 잘 해야만 한다. 대륙과 섬 사이에 지리적으로 낀 나라이기도 하고,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낀 나라다.

옛부터 한정된 지형에서 살아왔기에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정치’는 뗄 수 없는 생존법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 ‘선’이란게 참 모호하다. 잘 지키면 ‘라인브레이커’가 되는 것이고, 못 지키면 ‘오프사이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오프사이드’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무게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스스로를 버릴 시간이 온다. 내가 하고 싶은 화려하고, 고귀한 일을 하며 돈을 긁어 모으는 일 따위는 없다. 비즈니스는 원래 남이 하기 싫은, 할 수 없는, 번거로운 일을 대신 해주는 것이다. 설사 고귀하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곧 빼앗길 것이다.

정치 행위 자체에 대해 자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역시 문제는 ‘선’이다.

스스로가 정한 ‘선’,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선’, 꼭 지켜야할 ‘선’을 지킨다면 정치 행위는 괜찮다.

알겠지만, 꼭 지켜야할 선은 ‘법’이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선은 ‘도덕’이요, 스스로가 정한 선은 ‘자신’이다.

법은 지켜져야만 한다. 도덕은 VAR에 따라 때때로 죄가 되기도, 아니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선이 무너진다 하여 너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않아도 되겠다. 다시 말하지만, 법과 도덕은 이 이야기에서 논외다.

창업시절, 스스로의 삶을 살기 위해 독립을 택했건만, 오히려 스스로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하지만, 스스로란 무엇일까? 스스로가 생각한 선을 넘었다면, 선을 넘은 스스로는 스스로가 아닐까? 나는 무엇일까? 내가 추구하던 내 모습을 잃는다면, 그 모습을 잃은 나는 내가 아닌가?

혹, 스스로의 선을 넘었다면? ‘축하한다’ 드디어 당신이 스스로를 가둬둔 그릇을 깼다. 이제 당신은 더 큰 그릇을 가지게 됐다.

어디에 무게를 두고 있는가? 어느 곳을 바라 보는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떤 것이 옳다고 보는가?

기억하라. 당신이 지키려 했던 그 ‘선’을 그은 것은 바로 당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