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물을 좋아하는 편이다. 남들과 다른 그러니까 남들보다 무언가 특출난 사람이 되는 건 소년이라면 누구나 바라던 꿈이다. 그 무언가는 하늘을 나는 것일 수도 있고 손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초능력이나 마법. 뭐든 상관 없다.
최근 드라마 <무빙>을 보는 중이다. 초능력을 가진 이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진부한 주제임에도 결국 이들도 사람이라는 서사에 많은 사람이 공감을 하며 인기를 끄는 듯 하다. 글로벌 인기 콘텐츠인 <마블> 시리즈는 물론 장르 소설이나 웹툰 등에도 히어로물은 단골 소재다.
결국 이런 류 콘텐츠는 다 비슷하다. ▲남들과 달라서 고통 받던 주인공이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역경을 이겨내고 ▲그럼에도 남들과 같아서, 결국 같은 사람이라서 아파하고 ▲그렇게 우리는 결국 모두 다르되, 모두 같다는 메시지. 어쩌면 이 콘텐츠는 인류 역사가 지속하는 한 함께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나도 초능력이 있을까?
조금 불편한 이야기
나는 2018년부터 노트 앱 <노션>을 사용한다. 지난 회사에서는 <노션>을 업무 도구로 활용했고 전사에 도입하기도 했다. 이 과정을 책으로 쓰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노션>에 애정이 컸고 여전히 주요 도구로 활용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노션> 사용자로서 느끼는 사용성이 지속 떨어졌다.
<노션>이 불편한 이유는 많다. ▲먼저 한글을 쓰다 보면 자주 문장이 지워진다. 동기화 로직에 오류가 있는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이 버그가 지속 중이다. ▲업데이트 방향성에 공감이 가지 않는다. 초기에는 업데이트 방향성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어 주요 업데이트가 기대됐는데 요즘은 관심도 없을 만큼 와닿지 않는다. 특히, AI 기능은 굳이 이 기능을 위해 시간을 할애했어야만 했나 싶다.
▲결정적으로 고객지원 퀄리티가 심각하게 떨어졌다. 내 워크스페이스에 오류가 있어 문의를 넣었는데 일주일 동안 고객지원 담당자가 4명이 메일을 보내왔는데 결국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고선 다음날 문의에 관해 평가를 해달라고 한다. 불만족스럽다는 평가를 남겼지만 아무런 회신도 없다. 그러면 뭐하러 물어보나?
남들과 다른 것이 초능력이라면. 어쩌면 내 초능력은 불편함을 느끼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분명 개선돼야 할 문제를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행하는 이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힘들다며 불평을 토로해놓고선 다음날 똑같이 사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커리어 초기에는 이런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바뀌어야 한다고. 바뀔 수 있다고. 그러지 말라고. 그런데 안 바뀌더라. 그들은 바꾸고 싶지 않더라. 결국 그들과 다른 나만 고통 받을 뿐이었다.
꽤나 피곤한 삶
타인의 행동에 늘 불편함을 느끼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지점은 꽤나 많은데 특별히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이 불편함에 무척 피곤하다. 정말 초능력인가 싶다.
내가 자주 오는 카페가 있다. 카페는 거친 바닥재를 사용했는데 의자 다리 표면도 거칠다. 때문에 사람이 앉고 서며 의자를 움직이는 소리가 꽤나 거슬리는 소음이다. ‘끼익, 끼익’ 지속해서 들리는 소음을 듣고 있자면 짜증이 올라온다. 많은 생각이 든다. ▲저 사람은 의자를 살짝 들어서 옮기면 될 텐데 왜 저렇게 할까? ▲바닥재를 저렇게 했으면 의자 다리에 테니스 공을 달면 소리가 안 날텐데 카페 주인은 왜 이대로 둘까? ▲그런데 나만 거슬리나…? 그럼 참아야지. 그렇게 나는 음악과 대화 소리가 들리는 카페에서 종종 귀마개를 낀다.
며칠 전 지인과 치킨을 먹으러 갔다. 지하에 자리가 넓다며 안내하는 주인을 따라 내려갔더니 1층과 달리 지하엔 손님이 아무도 없더라. ‘이제 곧 손님이 오겠지’ 했는데 우리가 나가기 전까지 손님은 오지 않았다. 치킨을 주문하고 주위를 둘러 봤는데 세상에 의자에 거미가 줄을 쳐놨더라. 식당 의자에. 그것도 벽면 앉는 의자 곳곳에 거미가 있는 거로 봐서는 한동안 지하를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 맥주가 나왔는데 맥주에 모기가 빠져있다. 바꿔달라 했더니 서빙하는 할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새로운 잔에 맥주를 따라서 건낸다. 함께 나온 뻥튀기는 눅눅해서 이에 낄 정도다. 치킨이 나왔다며 1층에서 주인이 계단 바닥에 치킨을 두고 간다. 서빙하는 할아버지는 말 없이 바닥에 둔 치킨을 들고 와서 탁자에 내려두고 말 없이 돌아간다. 빠르게 치킨만 먹고 나왔다. 그래도 장사가 참 힘든데… 생각이 들어 ‘잘 먹었습니다’ 말 하고 나왔다.
여권이 만료 돼 여권을 발급 받으러 구청에 갔다. 증명사진을 가지고 갔는데 여권 사진은 다르니 앞에 사진관에 가서 찍어오란다. 사진사는 앉으라며 ‘하나, 둘, 셋’을 세 번 하며 ‘탁, 탁, 탁’ 세 번 찍었다. 5분이 흘렀을까? 사진이 다 됐단다. 동공 촛점도 맞지 않고 사진이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더니 안 이상하단다. 고객이 이상하다는데 주인이 안 이상하다고 하면 안 이상한 건가? 그래, 여권이 필요한 거지 사진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 싶어 나왔다. 사진을 가지고 공무원에게 갔더니 민원을 처리하는 내내 시큰둥 하다. 그래, 날도 좋은데 오후에 일 하기 싫겠지. 우편으로 받으면 전자 여권 칩을 테스트 할 수 없단다. 그게 뭐냐고 했더니 화면을 읽어 보란다. 우편으로 받으면 왜 칩을 테스트할 수 없을까? 궁금해서 물어보니 화면을 읽어 보란다.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아, 대화 하기 싫구나. 날 쳐다도 안 본다. 내가 민원인데, 왜 내게 설명해주지 않을까? 카드 결제를 하려는데 IC 칩이 잘 읽히지 않는다. 내 카드를 가져가더니 벅벅 카드 리더기에 긁는다. 결제가 완료 되자 탁자에 ‘탁’ 내려 놓는다. 기분이 나쁜가? 왜 일을 그렇게 하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일 하기 싫은 사람에게 물어봐서 뭐하나. 여권 발급을 하러 온 것인데, 여권 발급이 됐으니 됐지 뭐.
나도 피곤한 건 싫다. 그냥 별 생각 없고 싶을 땐 별 생각이 안 들었으면 한다. 그런데 정말 이들은 왜 이렇게 하는 걸까?
만약 내가 카페 사장이라면 바닥재를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어쩔 수 없었다면 의자 다리에 테니스공을 다 끼웠겠지. 쿠팡에서 테니스공 20개에 만 원이 조금 넘는다. 대충 세어보니 의자가 150개 정도 된다. 그럼 테니스공 600개. 그럼 500원 기준 30만 원. 30만 원이면 이 카페는 의자 끄는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이 30만 원을 사용하고 카페 홍보 콘텐츠 몇 개는 만들 수 있겠다. 3개 만들면 개당 10만 원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건데 왜 이렇게 하지 않을까?
만약 내가 치킨집 사장이라면 당연히 매일 청소를 한다. 내가 못 하면 직원이 하게 하고, 적어도 청소 상태는 매일 확인 한다. 거미줄은 하루 만에 생긴 게 아니다. 뻥튀기는 영업 시작 전 몇 개는 먹어볼 테고, 1층에서 내려오는 게 그렇게 귀찮으면 직원에게 올라와서 음식을 가져가라고 하겠지. 적어도 바닥에는 안 내려놓겠다. 환승 지하철역 바로 앞에 있는 비싼 건물 임대료를 내면서 왜 이렇게 하지 않을까?
만약 내가 공무원이라면 적어도 공손히 민원 업무를 보겠다. 나는 2개월 대학생 신분으로 읍사무소에서 민원 알바를 한 적이 있다. 등본을 떼라며 돈을 집어 던지는 사람도 봤고, 와이프 등본을 떼 달라는데 왜 자기 등본을 떼 주냐며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봤다. 와이프랑 본인이랑 부부인데. 등본은 똑같은데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차분히 설명했다. 여권 민원 업무를 보면, 대부분 민원인 질문이 비슷할 거다. 그럼 비슷한 질문에 관한 FAQ를 만들어 코팅해서 책상에 붙여두겠다. 아, ‘서류부터 작성하세요’는 붙여뒀더라. 2개월이 아니라 2년, 4년, 6년 하면 달라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일이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다른 걸 했겠지. 그렇게 하기 싫은데 거기 앉아서 왜 그러고 있을까.
피곤한 삶이다. 그들의 삶도, 그들을 보는 내 삶도.
그래도 같다
누군가는 나를 보며 다른 불편함을 느낄 거다. 왜 저럴까 하면서. 어쩌면 내가 느끼는 불편함보다 더 큰 불편함을 느낄지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나보다 더 피곤할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결국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에 관한 불편함에 무뎌져야 한다. 가능하다면 이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정도 여유는 없는 것 같다. 동시에 내 행동에 타인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불편함을 느끼는 행동을 줄여야 하고. 적어도 타인과 함께하는 동안만큼은 불편한 행동을 최소화 해야 한다.
물론 서로가 불편함이 적은 사람들도 있다. 이들과 얼마나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느냐가 행복의 척도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더해서 불편함이 많은 사람들과 접점을 얼마나 최소화 할 수 있느냐 역시 행복의 척도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얼마나 함께 할 수 있느냐가 결국 불편함을 최소화 하는. 그러니까 편안한 삶으로 향하는 길 아닐까.
이런 피곤한 나와 함께해주는 사람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만약 내가 초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내 사람들과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는 그런 초능력을 얻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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