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를 설계하다 보면, 많은 벽을 만난다. 고객이 없을 때, 고객이 생겼을 때, 고객이 100명일 때, 고객이 1천 명일 때, 개인 고객일 때, 기업 고객일 때, 팀 고객일 때, 모바일 고객일 때, 웹 고객일 때, 데스크톱 앱 고객일 때 고려 사항이 모두 다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수도. 지금은 맞고 언젠간 틀릴 수도 있다. 완벽한 설계나 은탄환(소프트웨어 개발의 복잡성을 일거에 해소할 마법) 따위는 없다.
우려했던 상황이 왔다. 번아웃이다. 사회생활 초기엔 번아웃이 몇 개월 단위로 왔다. 3개월 달리고, 3개월 쉬는 식이었다. 본업은 늘 최우선 순위에 둬야 하기에, 본업에 무리가 간다 싶으면 다 그만뒀다. 수차례 번아웃을 경험하며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다. 체력을 올리기 위해 운동을 하고, 너무 무리한다 싶으면 내가 좋아하는 일만 마구 하는 날을 만들곤 했다. 그렇게 며칠 지내면, 몇 달간 지속하는 번아웃을 막을 수 있었다.
이번 번아웃은 언젠가 터질 일이긴 했다. 불과 7개월 전만 해도 나는 기자였다. 6년간 개발자 생활을 했지만, 1년 여 기자 생활을 한 뒤 돌아와 다시 개발하는 것이 익숙진 않았다. 고작 1년 했을 뿐인데, 글을 읽고 쓰는 것이 더 익숙했다. 움직이는 게 익숙하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 모니터를 뚫어지라 보는 게 때론 즐겁지만, 최근에는 지루하고 괴로웠다. 분명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인데, 스트레스가 됐다.
여기저기 벌인 커뮤니티 STEW 일도 스트레스가 됐다. 독서소모임, 경영소모임, 아비랩, 매거진, 공식모임. 너무 많은 일에 벼랑 끝에 몰렸다. 그동안 터득한 노하우로 간신히 번아웃 절벽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몸이 무너진 것이다.
언데드가 됐다
월요일, 바빠서 정신을 못 차린 지난주를 만회하고자 헬스장에 갔다. 가볍게 몸을 풀고, 오랜만에 사이클을 탔다. 5분 탔을까?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아침이라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무척 불편했다. 당장 집으로 돌아와 10분여 숨을 고르고 간신히 회복했다. 몸이 말이 아니었다. 고작 5분 사이클을 탔다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구토 직전까지 가다니. 이때부터 몸이 소리를 질렀다. 종일 멍했고, 말이 헛나오는 상황이 시작됐다.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았다. 한숨이 10분 단위로 나도 모르게 나왔다. 멍한 정신을 만회하겠다며, 평소처럼 야근했고, 귀가해 책상에 앉았지만 역시 멍 때리다 잠이 들었다.
화요일, 몸이 더 쳐졌다. 운동은 생각도 못 했고, 시간에 따라 몸이 움직였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SNS에 도움을 요청했다. 몸이 정말 힘들어 도움을 요청하는 글에 장난을 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댓글을 보고 있자니, 정신마저 망가지는 기분이었다. 좀비가 된 기분이었다.
비극이 있으면, 희극도 있는 법. 내 증상을 보고 가까운 의사 선생님이 전화 상담을 해줬다. 30여 분 통화하며, 내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도 무척 마음이 편안해졌다. 몇몇 솔루션도 받았지만, 그가 내 일상을 잠시 함께해준 것만으로 이미 치유 받았다. 이대승 브람드 선생님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휴식을 권한 브람드 선생님의 말을 들었다. 화요일 저녁부터 수면 시간을 1~2시간 늘렸다. 일은 줄이고, 여가를 늘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을 되찾았다. 축구게임을 하며 성질을 내고, 소리도 질렀다.
예상치 못한 일로 회사에서 무척 정신이 없었다. 상사의 빈 자리를 메우다 내 일은 거의 하지 못했다. 그래도 퇴근 후엔 최대한 머리를 비우려 노력했다. 그렇게 한 주를 지냈다.
혼자였던 한 주
매일 여기저기 연락을 뿌렸지만, 이번 한 주는 무척 자제했다. 열심히든, 멍 때리든 시간은 흘러갔다. 누군가는 이 시간에도 멀리 달아날 거라 생각하면 다시 조급해졌지만, 나를 최우선순위로 올렸다.
오랜만에 빨간 날을 찾게 됐다. 문득 여름 휴가를 쓰지 않은 게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이직 후 이사 때 휴가 쓴 것을 빼면 쉰 적이 없었다. 휴가가 8일 남았다고 한다. 매주 목요일 서비스 반영 일에 휴가를 쓰는 못된 상상을 하며 얄밉게 혼자 웃어봤다.
내게 스케줄은 공기와 같아서, 빈 스케쥴을 보면 막혀있던 공기가 마구 몰려든다. 바쁘지 않으면 어쩌나 고민할 필요가 없더라. 세상엔 생각보다 재미난 게 많다.
다시 생각해보니, 올해는 참 다사다난했다. 퇴사했고, 입사했다. 칼럼과 독서소모임, 경영소모임, 아비랩 덕에 거의 매주 주말엔 카페에서 글을 썼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며 일하느라 늘 무지와 싸웠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나를 갈았다. 바쁘게 살았지만, 그대로인 것 같아 힘이 빠졌다. 욕심을 긁어모아도 내 것이 아닌 것은 가질 수 없더라.
혼자가 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가 될 한 주를 걱정했지만, 나를 혼자 두지 않았다. 나를 혼자 두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은 참 즐겁고 따뜻했다.
내 떡은 맛있다
까탈스러운 편이다. 까탈스러운 사람은 맛집을 많이 알고 있으니, 곁에 두라는 말 들어봤는가? 나는 꽤 맛있는 것을 곁에 두고 있는 편이다. 좋은 사람, 좋은 팀, 좋은 친구, 좋은 취미, 좋은 습관. 좋은 것, 더 좋은 것을 찾다 보니 잠시 무너졌지만, 내가 그동안 모은 여러 맛있는 것은 혼자가 된 나를 반겨줬다.
라볶이 하나에 이토록 기뻐질 수 있는 인생을, 왜 애써 외면했을까? 스테이크 따위가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다고, 라면에 김밥을 외면했을까? 잠시 남의 떡은 보지 않으련다. 그깟 떡 커봤자 얼마나 클까? 크면 뭐하나? 아니, 크다고, 무척 크다고 치자. 그럼 어떠랴. 내 떡은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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