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

이 말 외에 사실 니체에 관해 잘 몰랐다. 몇해 전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를 읽었는데, 읽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지 꽤 만족스럽게 읽었다는 건 완전히 잊었었다. 그런데 다시 서평을 읽어보니 <마흔에 읽는 니체>를 읽으며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서평]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 ★★★★☆

초인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참 어려운 존재다. 끊임없이 자신을 경멸하며 파괴하고, 그렇게 새롭게 태어나며 지속 발전해야 한다. 편한 친구들과 있을 때면 기회가 닿을 때마다 뭔가 더해야 한다고 말하는 편인데, 사실 내 삶 전체에 이 모토를 지키기는 꽤 어렵다.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비판하는 시간을 갖는다.

얼마 전 친구들과 13년 동안 운영하는 스튜라는 커뮤니티에 관해 이야기 하게 됐는데, 13년 동안 꽤 많은 친구들이 스쳐 지나갔더라. 그렇게 끝까지 남은 친구들과 이야기 하고 있자니 나도 참 많은 고통을 받았더라. 그때마다 나는 누군가 내 그릇을 시험하는 것 같아서 시험을 이겨내고자 어려움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13년이 흐르니 대부분은 내가 견디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 고통들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결과적으로 나는 조금씩 조금씩 성장했으니 말이다.

초인은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삶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두 번째 창업을 시작한지 어느새 1년이다. 요즘 힘든 건, 나야 이런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게 늘 하던 것이지만, 나와 함께하는 동료들을 너무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다. 모두가 고통을 성장 과정으로 생각하지는 않고, 또 내가 경험한 성장 과정을 똑같이 경험하진 않았으니 서로가 생각하는 게 다를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가 힘든 이유는 내 동료들이 여전히 나를 믿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을 겪으며 스스로 성장하는 건 자신이 있고, 내 동료들도 이 과정에서 성장하리란 확신이 있다. 다만 나 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고통을 보고 있자니 꽤 힘이 든다.

그리고 나는 이럴 때마다 내 선택이 정말 옳았는가에 관해 지속 사색하는 편이다.

니체는 모든 가치의 전도를 통해서 이제까지 자신의 삶을 이끌어 왔던 가치가 정당한지를 진지하게 묻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에 한걸음 더 다가가리라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서 내 동료들 또한 이런 경험을 느끼고, 나아가 그 결과뿐 아니라 과정에서도 늘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리스도교

얼마 전 오래된 친구가 찾아와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종교에 꽤 빠져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정도로 완벽히 빠져있을지는 몰랐다. 물론 사이비교는 아니지만, 더이상 나와는 어떤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아쉽긴 했다.

최근 알게돼 종종 만나는 대표님이 있다. 사업 고민을 나누던 중 어려운 시기에 종교에 기댄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특별히 종교는 없지만 성당이든, 절이든 어디든 가서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마음은 편해졌던 것 같다며, 힘들땐 종교에도 기대보라 권유했다.

나는 천주교 모태신앙으로 20대 중반까지 꽤 오랜 시간 성당에 나갔다. 그냥 신자뿐 아니라 할 수 있는 대부분의 활동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성당에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아쉬움을 명확한 문장으로 발견했다.

니체는 약한 자들을 본능적으로 서로 뭉치는 데서 쾌감을 느끼고 만족한다고 지적한다.

나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물론 굉장히 모났던 학창시절 내 모습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받아준 감사한 사람들이 있다. <마흔에 읽는 니체>를 읽으며 그때의 감사했던 여러 선배들이 떠올랐다. 참 미성숙했던 내 모습들이 오버랩되며 미안한 감정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내가 원한 건 어떤 새로운 그림이었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길 바랐던 건 아니었다. 나는 어떤 그림을 끊임없이 원했고 결국 그 그림을 찾아 떠났다.

니체는 기독교의 신이 오히려 인간을 병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인간은 죄를 지은 병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의미하고 두려운 삶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신이 결과적으로 인간을 더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는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자신을 광인에 비유하면서 우리가 신을 죽였다고 말한 이유이다.

누군가는 이 문장을 보고 신성모독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니체의 말이 내 간지러운 부분을 잘 긁어줬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제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극복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나답게 사는 것이다. 나답게 산다는 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초인의 삶일 것이다.

나는 그저 매주 모여서 함께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때때로 힘에 부칠때면 그 시절 나를 받아줬던 많은 사람들이 생각나곤 한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느껴왔다. 잠시 휴식할 수는 있겠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은 그곳에 없다고.

내 이야기를 만드는 것

나는 학창시절부터 모든 성격유형 검사에서 주도적인 편으로 나왔다. 최근 다시 유행하는 MBTI는 ENTJ로 할때마다 바뀌지 않더라. 그런데 대학 시절까지는 이 성격대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해 늘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때문에 나는 내 학창 시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대학시절 완전히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며 이들은 나에 관해 전혀 모른다는 게 무척이나 신기했다. 내가 강한 캐릭터가 되고자 하면 그렇게 됐고, 반대로 하면 또 반대로 여겨졌다. 초등학교를 제외하고는 내가 공부를 잘하는 캐릭터로 여겨진 적이 많지 않은데, 우연히 첫 학기에서 1등을 하고는 4학년 내내 공부를 잘 하는 캐릭터로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사회에 나와서는 내가 보이고 싶은 캐릭터로 보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비춰지려 노력했고, 해를 거듭할 수록 내가 원하는 모습이 돼 갔다. 때문에 나는 모든 부분에서 만족하진 않지만, 늘 과거에 비해서는 오늘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과거의 잘못된 선택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해서 현재 절망스럽고 후회스러운 날이 많다 해도 걱정과 후회는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내가 위기와 곤경에 빠졌던 순간이 큰 축복을 받기 위한 과정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과거를 받아들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누군가의 앞에 서서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느낀 적이 많다. 외모가 극히 뛰어나다거나, 두뇌가 극히 뛰어나다거나, 뭐든 극도로 뛰어난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초라하고 싶지 않았고 누구든 앞에 섰을 때 나라는 존재가 각인될 수 있었으면 했다. 이는 결국 ‘비교’의 영역이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그러니까 나만의 유니크한 뭔가를 갖추길 원했다.

그래서 나는 내 이야기를 만든다.

사회생활 초기에는 내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만 앞서서 늘 말을 많이 했다. 내 이야기를 억지로 각인시켰던 것이다. 때문에 말이 많다며 나를 피했던 사람도 많다.

조금 경험이 쌓이고서는 도전해봄직한 것들이 많이 보였다. 그래서 이런저런 도전을 해봤다. 창업도 해보고, 프리랜서도 해보고, 직종도 옮겨보고. 그랬더니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내 이야기 자체가 유니크해졌더라. 그렇게 상황에 따라 내가 유니크해지는 방법을 터득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상대에 따라 나를 다르게 보일 수 있게 하는 능력치와 상대가 없는 내 이야기를 건낼 수 있는 능력치 등을 익혔다. 내 이야기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내 이야기가 조금씩 만들어지니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내 이야기를 나와 함께하는 이들이 ‘우리 이야기’로 여기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노력하는 만큼 목표들이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을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에서 경험을 그 반대의 것으로, 합목적적인 것을 무목적적인 것으로, 필연적인 것을 임의적인 것으로 전환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운명처럼 생각한 일, 꼭 이루고 말겠다던 목표, 기대했던 경험들보다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우연한 일들이 오히려 우리를 기쁘게 한다는 것이다. 무의미하고 사소한 것들에서 즐거워하고 웃음이 터질 대 소소한 행복감이 찾아온다.

내 이야기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나를 곁에 두고 싶어 한다. 내 이야기에 속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연예인을 선망하진 않지만 큰 무언가가 아니라도 그냥 한 번 마주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몇 번 더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종종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나처럼 적극적으로 내 이야기를 보이며 알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꽁꽁 숨기면서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기 위해 저마다의 노력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 노력이 누군가에게는 사소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노력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이 또 다른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과 만나 어떤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그 일상을 사소하게 여기던, 여기지 않던 말이다.

어쩌면 이시대 초인은 그런 사소한 일상에서 자신을 부수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마무리

진지하다 못해 무겁디 무거워진지 1년이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 어느 정도까지 노력하면 된다는 어떤 규칙 따윈 없다. 그저 원하는 걸 얻기까지 지속할 뿐이다.

생각해보면 지금처럼 뭔가를 원했을 때가 얼마나 있었을까 싶다. 어쩌면 원하는 걸 얻는 것보다 뭔가를 원하는 이 감정 자체가 이미 축복이 아닐까 싶다. 이 감정 자체가 지난 1년 동안의 모든 것을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버거워서, 힘들어서 때론 놓고 싶었던 나의 강한 자아가 썩 마음에 드는 오늘이다.

한줄평

  • 때때로 놓고 싶었던 강한 자아가 마음에 들어진 순간

인상 깊은 문구

  • 모든 삶의 순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 니체는 기독교의 신이 오히려 인간을 병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인간은 죄를 지은 병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의미하고 두려운 삶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신이 결과적으로 인간을 더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는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자신을 광인에 비유하면서 우리가 신을 죽였다고 말한 이유이다.
  •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역시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와 죽어서 영원한 구원을 통해 가야 할 천국이라는 ‘저 세계’로 나누었다. 기독교는 이 세계를 죄와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 즉 참된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폄하한다. 결과적으로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에는 참된 세계이자 신의 세계였던 ‘저 세계’를 사라지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세계이다.
  • 20세기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 알베르 카뮈는 그의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그리스도교에서는 고통과 시련을 받는 이 세계의 삶은 단지 신의 시험이고, 그러한 모든 고난은 사후에 천국에서 보상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통과 모순으로 가득한 이 세계는 단지 저 세계인 천국을 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삶의 목표일 것이다. 목적 없이 사는 사람은 자신을 무기력한 삶으로 빠뜨린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뚜렷한 삶의 목표가 없는 상태로 살아간다.
  • 그렇다면 왜 우리는 초인이 되어야만 하는가? 왜 니체는 인간 너머의 인간이 되라고 말한 것인가? 그 이유는 이제 우리에게 ‘이 세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어 빈자리에 올라가 앉아야만 한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제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극복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나답게 사는 것이다. 나답게 산다는 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초인의 삶일 것이다.
  •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수시로 고민해야 한다.
  • 나답게 살려면 마음이 이끄는 일을 해야 한다.
  • 초인은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삶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 어느 정도 안정된 40대에 새로운 꿈을 갖는다는 것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는 꿈꾸지 않고 그대로 멈추어 버린 사람도 많다.
  • 니체가 말하길, 인간에게는 동물처럼 행동하는 것을 망각하기 위해서 많은 굴레가 씌워 있다. 그 덕분에 실제로 인간은 다른 어떠한 동물보다도 더 온순하고 지적이며 명량하게 보이며 사려 깊게 되었다. 한편 인간은 이렇게도 오랜 시간 동안 쓴 굴레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렸고 지금까지도 괴로워한다.
  • 니체는 모든 가치의 전도를 통해서 이제까지 자신의 삶을 이끌어 왔던 가치가 정당한지를 진지하게 묻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 마흔에는 이제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어 왔던 정신적 가치들을 의심해 볼 시간을 가져야 한다.
  • 모든 가치의 전도는 ‘모든 가치의 가치 전환’과 ‘새로운 가치의 설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니체는 자신의 때가 아직은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자신이 이해하는 삶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살도록 하고 가르치게 될 기관이나 <차라투스트라>를 해석하는 일을 하는 교수직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니체의 이러한 자신감은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 삶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감사의 힘이다.
  • 인간의 자유 의지를 긍정하는 철학에서는 무엇이든지 노력하면 다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이란 없고, 누구든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유 의지의 철학은 실패한 사람에게 ‘당신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며 일방적으로 책임을 묻는다.
  • 니체는 이러한 입장을 ‘단죄의 철학’이라 부른다. 그는 <우상의 황혼>에서 “의지에 관한 학설은 본질적으로 처벌을 목적으로, 즉 죄를 찾아낼 목적으로 고안되었다”라고 말한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의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을 탓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자.
  • 숙명론은 말 그대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이론이다. 숙명론은 자유 의지와 노력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이므로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서 활동적이고 성공지향적인 사람들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 “자신을 원하라, 그러면 너 자신이 될 것이다”라는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고 한다. 세상에 이미 결정된 일은 없듯이 이미 정해진 나의 모습도 없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의 모습이 변해 갈 뿐이다. 운명의 여신은 항상 자신의 바람직한 모습을 적극적으로 꿈꾸는 사람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선사한다.
  •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커다란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종적인 해방자이다”라고 말한다. 고통스러운 삶이 우리를 더 심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 우리는 삶이 아무리 고달프고 괴로울지라도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통스러운 내 운명을 사랑할 수 있을까? 바로 열정을 갖는 것이다. 열정은 독일어로 ‘Leidenschaft’이다. 이 단어에는 고통을 뜻하는 ‘Leiden’을 포함하고 있듯이 열정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전제로 한다. 열정이라는 감정은 항상 고통과 기쁨을 함께 동반한다. 곧 삶에 대한 열정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전제로 한다. 열정이라는 감정은 항상 고통과 기쁨을 함께 동반한다. 곧 삶에 대한 열정은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극복하려는 태도이다.
  • 이미 엎질러진 물을 놓고 후회해 봤자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다. 니체는 “후회는 어리석음에 또 다른 어리석음을 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잘못된 선택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해서 현재 절망스럽고 후회스러운 날이 많다 해도 걱정과 후회는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내가 위기와 곤경에 빠졌던 순간이 큰 축복을 받기 위한 과정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과거를 받아들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상실하고 또다시 자신을 발견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 니체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삶에서 지금 이 순간은 다 한 번밖에 없다”라는 것이다.
  • 우리는 두 가지의 삶의 태도 중에서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순간을 마주하고 있다. 하나는 고통과 절망에 빠진 이번 삶을 바꾸기를 포기하고 다음 삶을 기약하는 태도이다. 하지만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은 이번 인생을 포기한 사람의 기대를 꺾어 버린다. 지금처럼 엉망으로 산다면 다음 삶도 똑같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결국 이번 삶을 포기한 사람은 무의미한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생각으로 더욱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된다.
  •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 낙타, 사자, 아이로 세 번의 변화를 거쳐 우리는 초인에 이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초인이 되는 방법을 외부 세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삶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
  • 플라톤은 영혼이 육체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하는 이성 중심의 이원론을 주장했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분리하는 이분법적 플라톤의 사상은 신과 인간, 천상의 세계와 이 세상을 나눈 중세 기독교 사상으로 이어졌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데카르트가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독립된 두 개의 실체로 규정한 심신 이원론을 주장한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 40여 년을 살아온 많은 이의 인생이 그렇다.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영혼을 강력하게 끌어당길 만큼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조차 모를 수밖에 없다. 성공적인 삶을 꿈꾸는 사람은 자신만의 특별한 청사진을 가져야 한다.
  • 니체는 환자에게 가장 좋은 치료제는 건강상태가 약간식 나빠지고 좋아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 질문의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다.
  • 질문은 항상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적어야 한다. 내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 맞게 질문할 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해답을 찾게 된다.
  • 꿈꾸는 자만이 삶을 변화할 수 있다.
  •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려면 자신이 원하는 것, 소유하고 싶은 것, 삶에서 체험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 살다 보면 꿈의 실현을 막는 장애물은 언제든 나타나기 마련이다.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좌절과 절망감에 빠진다면, 당신은 그 누구에게라도 해결책을 구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잘된 인간은 인생의 답을 구하기에 급급하지 않고 시련에 맞서 싸운다. 그는 자신이 정말 가치 있다고 세운 목표를 이루는 데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남들보다 특별한 인생을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길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 초인이 되기 위하여 우선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위대한 경멸의 순간을 체험하라”라고 말한다. ‘위대한 경멸의 순간’이란 지금까지 행복했다고 생각한 수많은 시간,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라는 생각, 그동안 추구했던 모든 미덕이 하찮고 역겨워지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모든 가치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위대한 경멸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 현재의 삶에 대한 불만과 증오는 또 다른 삶을 추구하게 한다. 몰락은 변화의 성장통이다. 삶에 하강이 없으면 성취도 없다. 삶의 최저점에서 우리는 야망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다시 상승할 수 있다. 삶의 최고점에서 다시 몰락한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다시 성장할 기회는 분명히 오기 때문이다.
  • 인생은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다. 그래서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감정은 기본적으로 편안함이 아니라 불안감이다.
  • 작은 변화가 모여 운명이 된다. 작은 행복에 감사해하는 사람에게 더 큰 행복이 찾아오는 법이다.
  •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지만 온전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세상살이는 참으로 녹록지 않다. 살다 보면 불행이 닥쳐 곤경에 빠지기도 한다. 이때 불운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둘러싸여 현실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 고귀한 종류의 인간은 자신을 가치를 규정하는 자라고 느끼기 때문에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고귀한 인간처럼 자존감이 높은 사람도 타인이 자신을 좋게 평가할 때 기쁨을 느낀다. 니체는 이것을 결코 허영심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고귀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삶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성공을 하면 기쁘고, 실패해도 스스로 책임을 지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 결국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타인의 기대에 맞추어 살기 때문에 실패에 대단한 원망과 증오의 화살을 타인에게 날린다.
  • 고귀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으로 니체는 ‘깊은 고뇌’를 겪어 보라고 말한다. “인간은 얼마나 깊이 고뇌할 수 있는가에 따라 등급이 정해진다”라는 것이다.
  • 니체가 우상으로 규정하고 망치로 부수는 대상은 세계를 참된 세계와 가상 세계로 나누는 플라톤 철학이다. 플라톤은 가짜인 이 세계의 삶을 깔보고 부정하고 비방하기 때문이다.
  • 트라우마는 ‘큰 상처’를 의미하는 라틴어 ‘Trauma’에서 유래했다.
  • 니체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억보다는 망각의 중요성이 더 크다고 본다.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아이처럼 “망각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망각할 수 있는 힘은 인간을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며 수단이다. 그래서 니체는 “가장 작은 행복에서나, 가장 큰 행복에서도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잊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이야말로 성스러운 정신을 거스르는 죄다. 걸으면서 얻은 생각만이 가치가 있다.
  • 오늘날 대형 서점에 가 보면 매주 신간 서적이 엄청나게 쏟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글을 쓰는 문화가 대중화되면서 많은 사람이 이전보다 쉽게 책을 출간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책이 그저 저자 자신이 체험해서 잘 알게 된 지식과 정보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통찰이 담긴 책을 발견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 사람들이 대중을 위한 저급하고 품위 없는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 니체는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질책한다. 즉 글은 독자만을 염두에 두고 쓸 것이 아니라 저자 자신을 위해 써야 한다.
  • ‘아포리즘 Aporism’이란 잠언이나 경구, 격언을 의미하며, 자신이 체험으로 깊이 깨달은 진리를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 니체는 자신의 글이 한 가지로 해석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독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해 다양하게 해석하기를 바랐다.
  •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서 “사람은 누구나 훌륭하게 그리고 점점 더 훌륭하게 글 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니체가 말한 글을 보다 훌륭하게 쓴다는 것은 더 훌륭하게 사색하라는 것이다. 결국 글을 잘 쓴다는 것은 훌륭한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삶은 고통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염세주의라고 부른다.
  • 금욕주의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죄악시하고 욕망을 억압하는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보는 태도이다.
  •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스러운 삶 자체를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니체는 맹목적 의지가 야기하는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쇼펜하우어와 달리 고통은 단지 회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므로 직면할 것을 요구한다.
  • 힘에의 의지는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의지이므로 항상 고통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 니체는 약한 자들을 본능적으로 서로 뭉치는 데서 쾌감을 느끼고 만족한다고 지적한다.
  • 사람들 대부분의 고통으로 인해 불행할 때 친구들을 만나거나 모임에 참여한다. 그 순간 고통과 불괘감을 잠시 잊을 수는 있겠지만,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밀려오는 상실감과 소외감은 더욱 커진다. 사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고통과 외로움이 치유되지는 않는다.
  •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고통과 고뇌는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진정으로 고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고통을 고뇌를 향한 열정으로 바꿀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니체는 고통을 추구할 때 그 고통으로 인해 창조적 역량이 더 세련된다고 말한다.
  • 니체는 죄책감을 조장하는 금욕주의의 치료법으로 인해 어느 정도 고통은 완화되었을지 몰라도 인간은 길들여지고 약해지고 용기를 잃게 되었다고 말한다.
  • 고통에 대한 처방은, 고통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창조자가 되기 위한 길을 가려고 한다면, 무리에서 벗어나 고독이 주는 고통을 감당할 만한 권리와 힘이 있는지 보여 달라고 한다.
  • 고독을 즐기지 않고서는 결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 혼자 있어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비로소 고독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 노예는 강자를 부정하다가 결국 ‘악한 인간’으로 규정하고 이와 대조적인 ‘선한 인간’을 생각해 낸다.
  • 노예 도덕은 약자는 무조건 ‘선’이고, 자기보다 강한 지배자는 모두 ‘악’으로 규정했다.
  • 그 이유는 ‘강자는 악하고, 약자는 선하다’, ‘부자는 악하고, 가난한 자는 선하다’ 같은 노예 도덕이 오늘날에서도 보편화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 고귀한 인간은 자신을 가치를 창조하는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다. 또한 타인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기 대문에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존중한다. 고귀한 인간은 자기만의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꿈꾸고 주어진 삶을 긍정하는 존재이다.
  • 초인같이 자부심이 강한 천성을 지닌 사람에게 쉽게 얻은 물건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초인은 가치의 기준이 외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
  • “희망은 참으로 재앙 중에서도 최악의 재앙이다. 희망은 인간의 괴로움을 연장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니체가 말하는 희망은 이중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희망은 기대감과 괴로움을 동시에 준다.
  • 우리는 살면서 예상치 못한 좌절로 인해서 고통을 당할 수 있다. 이러한 불행이 자주 반복된다면 고통에 점점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약간의 고통이라도 삶을 망쳐버리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니체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했을 때 더 감사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삶을 잃을 만큼 위험한 순간을 겪다 보면, 그런 인생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 행복을 원한다면 불행이 찾아올 대 오히려 더 감사해야 한다. 만약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원하는 행복은 절대로 오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는 그렇게 노력하는 만큼 목표들이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을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에서 경험을 그 반대의 것으로, 합목적적인 것을 무목적적인 것으로, 필연적인 것을 임의적인 것으로 전환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운명처럼 생각한 일, 꼭 이루고 말겠다던 목표, 기대했던 경험들보다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우연한 일들이 오히려 우리를 기쁘게 한다는 것이다. 무의미하고 사소한 것들에서 즐거워하고 웃음이 터질 대 소소한 행복감이 찾아온다.
  • 니체는 행복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한 어떠한 지침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고유한 법칙들을 내면에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 니체는 이어서 “결코 제때에 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제때에 죽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려면 지금 당장 고통으로 가득 찬 현재의 삶을 긍정해야만 한다.
  • 자기 자신을 초인으로 긍정할 수 있는 인간, 자신의 힘에의 의지로 삶을 극복하고 창조할 줄 아는 인간, 삶의 모든 순간이 영원히 회귀한다고 해도 기쁘게 받아들이고 긍정할 수 있는 인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사랑할 줄 아는 인간, 이런 건강한 인간이 바로 ‘디오니소스적 인간’이다.
  • 깊은 고통은 사람을 고귀하게 만든다.
  • 한 번도 아파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미래에 진정으로 성장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