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용의 에세이 #23] 나를 지키는 거리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깨닫는 시점이 있다.

문득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느낄 때, 시끄러운 곳이 싫을 때, 이대로가 좋다고 느낄 때. 새로운 것이 싫을 때, 느린 것이 좋을 때, 혼자인 게 좋을 때 그리고 가끔 무척 편안할 때.

그럴 때 있다. 세상은 세상, 나는 나. 그것과 내가 분리돼 온전히 나로서 생각할 수 있을 때. 세상에 속한 내가 아닌, 내가 속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나로서 세상에 속할 수 있을 때.

나로 살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대부분 사람은 즐겁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모르는 것만큼 답답한 시기는 또 없을 것이다. 하고자 하는 것을 하는 것에서 많은 사람이 삶의 의미를 찾는다.

평생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걸 인생의 목표로 하기도 한다. 내가 누구인지 깨닫기 위한 여행이 삶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찍이 자신의 방향을 찾은 이들은 성공하고, 많은 이의 부러움을 산다.

많은 삶 속에서 나로서 사는 것은 꽤 큰 도전이며, 가치 있는 행동이다. 그런데, 나로서 사는 것이 전부인가?

세상에 속하기

우리가 왜 이곳에 머무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 어떤 캐릭터로 머물지, 자신으로 머물지, 만들어진 자신으로 머물지는 선택이다. 다만, 그 캐릭터로 견디는 것 역시 자신의 몫이다.

세상에 속하려면 나로서만 살아선 안 된다. 때론 내가 아닌 세상의 일부가 될 수 있어야, 다시 나로 돌아올 수 있다.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세상의 일부가 되는 시간은, 어쩌면 그 시간도 나로서 존재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그렇게 존재해야 할까?

나를 세상으로부터 지키기

적당한 거리는 적당한 시간을 확보한다.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시간 말이다.

왜 나로서 존재해야 하느냐 물으면, 왜 여전히 나로서 존재하지 않느냐 되묻겠다. 나로서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모른다면, 세상 역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세상에 사는지 모르며, 세상에 산다면. 그것은 세상을 사는 것인가?

어떤 세상을 원한다 해도, 역시 현재 세상에 존재해야 어떤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나로서 살기 위해 세상의 일부로 사는 것과 같다.

결국 세상과의 거리는 나를 위함이든, 어떤 세상을 위함이든. 어쨌거나 그 거리를 지켜야 한다.

마무리

나로서 사는 것을 정의했다면, 나로서 사는 것은 내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이다. 나로서 사는 것이 단단하다면, 꽤 거대한 어떤 것도 견뎌낼 수 있다. 그게 거리든 뭐든 말이다.

그렇게 어떤 것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그렇게 어떤 거리를 보고 있자면, 나로서 살기 위한 몸부림이 보이는 듯하다.

결국 그 거리는, 나를 지키기 위함이 아닌가.

Share:
오세용

오세용

글 쓰는 감성개발자 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도밍고컴퍼니를 창업해 뉴스 큐레이션 서비스 도밍고뉴스를 만들었습니다. 소프트웨어 전문지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CODEF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