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용의 에세이 #17] 내가 온전히 허용되는 곳은

평소 사람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개개인이 갖는 캐릭터, 그 캐릭터를 보다 끌어내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 그리고 끌어낸 캐릭터를 모아 한 팀으로 만들었을 때 흥미를 느낀다. 그렇게 만들어진 팀이 결과를 낼 때 흥분을 느낀다. 이 모든 과정을 즐기는 내 모습에 만족을 느낀다.

협업 시대에 내 캐릭터는 꽤 괜찮다고 할 수 있다. 함께일 때 성과를 내는 건 꾸준히 중요해왔고, 노마드 시대에 다양한 캐릭터와 함께할 수 있는 건 좋은 능력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함께일 때보다, 혼자일 때 역량이 급격히 떨어진다.

우아한 백조, 그리고 백조의 발길질

우아한 백조의 물밑이 화려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백조만의 문제가 아니다. 찰리 채플린이 그랬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비단 한 사람의 문제겠는가? 어떤 조직도 성과를 내기 위해 누군가는 발길질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발길질은 어떤 역량일까?

축구에서도 발길질과 비슷한 역할이 있다. 영원한 캡틴 박지성이 그랬고, 프리미어리그 첼시의 귀요미 은골로 캉테가 그렇다. 발길질도 화려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선수들이다. 하지만, 흔히 발길질은 티가 나지 않는다.

발길질에 있어 중요한 역량은 어쩌면 부족한 야망과 타인에게 잘해야만 하는 착한아이 증후군, 소심한 마음과 겁쟁이 따위일지도 모른다. 발길질에 만족하며 팀에 헌신하는 멤버가 있어야만, 백조는 우아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떠오른 백조를 바라보는 누군가에게 백조의 발길질은 우아함의 대상이 아니다.

발길질을 우아하다 표현하는 이도 있다. 끝없는 헌신에 감동한 팬이 있는가 하면, 발길질로 인해 우아함만을 취할 수 있는 팀원일지도 모른다. 이 경우 두 사람이 똑같이 ‘너의 헌신이 있어 고맙다’고 말했을 때 뉘앙스는 같지 않다.

발길질은 누구에게나 우아할 수 있을까?

욕심

다양한 캐릭터를 좋아하는 만큼, 나 역시 다양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때로는 리더, 때로는 팔로워, 때로는 게으름뱅이, 때로는 부지런쟁이, 때로는 염세주의자, 때로는 정치인.

어떤 능력치가 어떤 능력치를 상쇄하는 것은 참 신비롭다. 가끔 창조주에게 무한한 놀라움이 느껴지는 이유다. 어떤 능력치를 가졌으면서, 때론 어떤 능력치마저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참 놀랍다. 가끔 창조주에게 무한한 신뢰가 느껴지는 이유다.

어떤 포지션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답답하기도 하다. 만족할 수 있는 이가 때론 롤모델이기도 하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원하는 게 없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스스로의 잣대에 충실하지 못하는 내 믿음이 한없이 하찮아 보이기도 한다.

포기보단 노력이 더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만족 없는 노력보다 피곤한 게 또 있을까? 꾸준히 발전해왔으면서도 늘 고개를 위로 드는 내 모습에 나조차 피로를 느낀다.

목 디스크는 완치가 가능했던가?

조금 더 넓은 닭장

훗날 내 모습을 되돌아보면, 어느 부분이 재밌을까? 그때의 나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모든 스탯을 초기화한 후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스탯을 감소시키고, 어떤 스탯을 증가시킬까? 하느님을 만나 십자가를 고르는 이야기처럼, 혹시 나는 지금과 같은 스탯을 만들진 않을까?

잃는 것이 무서워 얻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형편없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버린 만큼 얻지 못한다면, 이는 버리지 않은 것보다 형편없는 행동이 아닐까?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무엇일까? 더 나은 닭장이 있을 거라며 여행을 떠난 닭에게 조금 넓은 닭장을 추천해줘야 할까? 더 나은 닭장의 정의는 내릴 수 있는 걸까?

언제나 온전한 나로서 지낼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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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용

오세용

글 쓰는 감성개발자 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도밍고컴퍼니를 창업해 뉴스 큐레이션 서비스 도밍고뉴스를 만들었습니다. 소프트웨어 전문지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CODEF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