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All In)을 선호하지 않는다. 한 번 엎어지면 끝이 아닌가? 다양한 선택지를 두고 내 캐릭터에 맞는 것을 선택해야 행복하다. 선택지가 많아야 좋은 건 아니다. 나쁘지 않은 선택지가 많아야 한다.

복수 선택을 선호한다. 단 하나만 선택하는 것은 내게 고통을 준다. 자동차, TV, 아이폰, 집 등 단, 하나만 선택해야 할 때 꽤 고통받는다. 바꿀 수 있겠지만, 비용이 꽤 많이 드는 큰 것들 말이다.

게임 플레이에 앞서 닉네임을 고를 때도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닉네임을 바꿀 수 있는 게임도 있지만, 바꾸기 전까지는 계속 사용해야 하지 않는가? 내 이름을 정하는데 어찌 대충할 수 있겠는가?

축구 게임 FM(Football Manager)에서 선수를 고를 때도 무척 많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한다. 센터백을 살 때는 점프력과 헤딩 능력을 필수로 본다. 태클과 수비위치선정도 괜찮길 바란다. 일대일 마크와 예측력도 좋다. 스피드가 따라준다면 더욱 좋겠다. 빌드업을 위해 패스도 괜찮으면 좋겠고, 태클을 적시에 할 수 있게 대담성도 높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어리면 좋겠고, 프로의식도 높으면 좋겠다. 자국 리그 국적이면 더 좋다. 아직 주목받지 못한 원석이면 더 좋겠다. 아, 리더십을 갖춘다면 더 좋겠네.

즐길 수 있는 모임

나는 커뮤니티 STEW를 만든다. 커뮤니티 STEW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모조리 때려 넣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고, 독서소모임, 경영소모임, 아세안 비즈니스 랩 등 다양한 소모임을 운영한다.

시작은 즐거움이었다. 이 친구들이라면 늘 웃을 수 있고, 계속 자극받을 것 같았다. 긍정적 시너지를 내는 성장 말이다. 그렇게 2011년에 시작한 STEW는 어느새 8년을 지나 9년 차다. 10년도 머지않았다.

STEW는 멤버를 다 합치면 40명도 넘을 거다. 40개 캐릭터를 이 조직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내게 큰 행운이다. 이들과 함께하는 것은 내 최고 즐거움 중 하나이며, 앞으로 더 많은 친구와 함께할 생각에 두근댄다.

하지만 캐릭터가 늘며, 즐거움의 정의는 달라졌다. 각자가 원하는 즐거움이 다르니, 그저 즐거운 내가 바빠졌다. 함께하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게 됐다.

성과를 내는 모임

먹고, 마시는 모임은 우리와 거리가 멀다. 사실, 먹고 마시는 것은 어디서든 할 수 있지 않은가? 어디나 있는 모임이 되고 싶지도, 돼서는 안 되기도 하다. 우리 만남에서 뭔가 얻는 것이 필요했다. 뭐든 각자가 얻어가야 했다.

성과를 내야 했다. 누군가는 이력서 한 줄이 필요했고, 누군가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누군가는 참여할 여지가, 누군가는 돈이 필요했다. 가까워질수록 캐릭터가 강해졌고, 캐릭터가 강해질수록 원하는 게 명확해졌다. 원하는 게 명확해질수록 STEW에 만족하지 못했다.

모임을 더 만들기 시작했다. 각자가 원하는 뭔가를 충족하고 싶었다. 모임 날짜, 장소, 프로그램, 깊이 등 각자가 원하는 그림이 달랐다. 리더로서 이들 중 누구라도 잃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길을 잃어 찾아오면, 남았던 누군가가 떠나갔다. 떠나간 누군가를 데려오자 인원이 반으로 줄었다. 그런데 나는 어디 갔을까?

성과를 내면서,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었다. 나는 이 모임을 지속하고 싶다. 즐거움과 성과가 함께하는 이 모임을 버릴 수 없었다. 그 어떤 것도 버릴 수 없다.

지속하는 모임

루틴을 만들었다. 이번 달에 못 나오는 친구를 위해 다음 달 모임을 만든다. 다음 달에 못 나오는 친구를 위해 그다음 달 모임을 만든다. 이런 모임이 이제는 4개다.

즐거웠기에 함께했고, 함께하기 위해 성과를 냈고, 모두를 위해 지속했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다 보니 점점 단단한 모임이 돼 갔다. 어떻게든 빈 공간을 메울 수 있어 기뻤다. 빈 공간은 내 몫이고, 그렇게 내 몫이 많아졌다. 모임 어디에든 내가 있었고, 모임 어디에든 내가 있어야 했다. 모임 어디에든 내가 있어야만 했다.

물리적 한계에 닿았다.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내 삶에 빈 공간을 만들었다. 빈 공간을 메우는 것은 또 다른 빈 공간을 만드는 제로섬 게임. 열심히 할수록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상황이 닿았다. 달릴수록 더 달려야 하는 다람쥐 쳇바퀴같이.

즐길 수 없고, 성과가 없고, 지속할 수 없는 모임

쫓는 것인지 쫓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즐겁지만 즐겁지 않은 상황이 지속한다. 톡 치면 와르르 무너지는 게임이 끝나기 전 젠가와 같다. 성과를 내기 위해 즐길 수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과만 추구해선 안 되는 상황. 이상하다. 난 즐기기 위해 시작하지 않았나?

나는 무엇에 즐겼을까? 무엇이 성과일까? 무엇이 지속일까? 지속하기 위해 성과를 내선 안 되고, 성과를 내기 위해선 즐길 수 없는 거라면, 즐기는 것은 성과와 지속을 가질 수 없는 걸까?

나는 올인을 선호하지 않는다. 올인을 선호하지 않는 성향이 즐거움과 성과, 지속 중 그 어느 것도 가질 수 없게 한다면. 나는 올인을 해야만 할까? 올인을 하면 나는 어떤 것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떤 것을 가지는 것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어떤 것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시작은 즐거움이었다. 즐거움만 있으면 만족할 것 같았다. 그 즐거움이 모든 것을 가져올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즐거움이 낳은 성과와 지속은 무엇일까? 함정일까?

다 가지려다 그 무엇도 가질 수 없다면, 무엇이라도 가져야 하는 걸까? 아니, 다 가진다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다면, 분명 가진 것 중 뭔가 잃을 텐데. 난 뭘 잃게 될까? 잃으면서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이 있을까?

복수 선택을 선호했다. 단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고통을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 하나만 선택하는 것은 단 하나도 선택하는 것보다야 낫다. 0보단 1이 낫지 않은가?

어쩌면 이제, 차선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명품

싸고 좋은 명품은 없다. 어쩌면 이는 ‘한 달 연봉 2억’과 같은 다 틀린 문장과 같다. 싸면 좋지 않고, 좋으면 싸지 않다. 애초에 명품은 싼 것과 좋은 것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명품은 그저 명품일 뿐이다.

싼 것은, 좋은 것은 어떤 것과 비교 결과다. 비교는 또 다른 비교를 낳기에, 비교를 지속하는 결과뿐이다. 굳이 고른다면, 싼 것도, 좋은 것도 아닌 명품을 고르겠다. 나로서 사는 게 명품 아닌가?

다시 즐김으로 돌아가련다. 즐김은 성과의 비교 대상이 아니고, 성과는 지속의 비교 대상이 아니다. 즐김과 지속 역시 그렇다. 즐김은 즐김이고, 성과는 성과고, 비교는 비교다.

흔들리지 않기로 한 다짐도 버린다. 흔들림 역시 비교 대상이 아닌가? 여기저기 둘러보는 게 내 스타일이라면, 하나라도 더 둘러보지 뭐. 둘러보는 것은 소비자의 특권 아닌가?

싸지도, 좋지도 않은 것이 나라면, 그래도 나로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