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벨 연구소 이야기 ★★★★★

[ 읽게 된 동기 ]


커뮤니티 STEW 2018 독서소모임 10월 도서.


[ 한줄평 ]


푸른별 지구의 본격 판타지물


[ 서평 ]


벨 연구소.
왜 모르겠는가? 가장 유명했던 연구소! 그래, 나는 딱 그정도로 알고 있었다.

초반부 내용은 사실 지겨웠다. 고등학생 때 물리 시간이 떠오르는 듯 했다.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내가 왜 이 공부를 하나… 싶었다.

책을 덮고 나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지금 이 글도 컴퓨터로 쓰고 있는데, 6년간 개발자로 일 했으면서 과연 나는 현대 과학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세히 들여다본 이 세상은 다른 세계였다.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어쩜 이리 다를 수 있을까? 이곳은 그저 내게 ‘판타지’다.


#트랜지스터, 위성 그리고 정보이론

몰랐다.
트랜지스터가 이렇게 세상을 바꿔 놓은 발명품인줄.

몰랐다.
위성이 벨 연구소에서 시작된 것인줄.

정말 부끄럽지만, 몰랐다.
정보이론이 벨 연구소에서 시작된 것인줄.

컴퓨터를 4년간 공부하고, 개발자로 6년. 무려 10년간 컴퓨터를 공부한 내게 이 분야에 이토록 무지한지 정말 몰랐다.

심지어 트랜지스터 내용을 읽으면서도 ‘이걸 내가 왜 읽어야 하나’ 싶은 감정을 가졌으니… 얼마나 부끄러운가… ㅜㅜ

그후 벨 연구소의 휴대전화 팀은 FCC 제안서 작업을 시작했고, 캘리포니아 주 산타 클라라의 반도체 회사인 인텔(빌 쇼클리의 첫 반도체 회사에서 도망쳐 나온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세운 회사)은 ‘4004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혁신적 통합 회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4004 마이크로프로세서는 2,300개의 트랜지스터를 담고 있는 작지만 강력한 컴퓨터였다. 4004는 1세대 장치로, 휴대전화 단말기에 넣으면 고도로 복잡한 필수적인 연산을 처리할 수 있었다.

벨 연구소에서 나온 쇼클리가 있었고, 쇼클리의 회사에서 나온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인텔을 만들었다. 결국 벨 연구소가 뿌리 아닌가? 

세상에 실리콘밸리조차 벨 연구소를 뿌리로 하고 있다니. 막연히 쳐다만 본 실리콘밸리의 윗 세대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그야말로 ‘판타지’다.

트랜지스터는 관련 정보와 책을 좀 더 읽어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책을 다 읽고난 뒤의 첫번째 감상은 역시 ‘부끄러움’ 

스스로가 무엇을 몰랐는지 아는 상태가 배움의 첫 단계이니, ‘벨 연구소 이야기’는 내게 공부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해준 매우 의미있는 책이다.


#켈리, 쇼클리, 피어스, 피스크, 베이커. 벨 연구소의 천재들

나는 판타지를 좋아한다.

현재 출판되는 B급 판타지들은 비슷한 세계관을 갖는다. 검에 오러를 입히고, 마법을 사용하며, 드래곤이 나온다. 이 세계관을 활용해 RPG 게임이 만들어지고, 나는 흔하디 흔한 이 판타지가 편하고 좋다.

흔한 판타지물을 읽고 있자면, 시시함을 느끼기도 한다. 최근 몇몇 판타지를 읽으며 식상함을 느꼈는데, 벨 연구소 이야기 속 인물들이 어째 판타지보다 더 판타지 같이 느껴진다.


벨 연구소를 만든 연구원들은 하나 같이 천재다. 그 천재들의 리더로서 이끈 켈리.

“그쪽은 여기에서 하루에 일곱 시간 반을 보내기 때문에 월급을 받는 거요. 하지만 칭찬받고 승진하려면 나머지 열여섯 시간 반을 잘 보내야 됩니다.” 첫 출근한 직원들을 사무실로 부른 켈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괴짜지만 독보적인 두뇌를 자랑한 쇼클리.

쇼클리는 벨 연구소 동료 여럿을 서부로 데려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가 벨 연구소에서 채용할 수 있었던 건 결국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쇼클리는 대부분 다른 기업들에서 유망한 과학자들을 발굴해 채용했다. 고든 무어, 로버트 노이스, 장 회르니, 유진 클라이너가 대표적이었는데 이 네 명이 후에 실리콘밸리라는 지명을 지도상에 올리게 된 이들이었다. 신입들 중 어느 누구도 쇼클리가 관리자로서는 부족하다는 점을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았다. 설사 좀 부족하다 해도, 쇼클리의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은 분명 매력적인 일이었다.

너무 많은 인물이 나와 특성이 다 기억은 안나지만, 피어스, 피스크, 베이커 역시 벨 연구소의 황금기를 이끈 중요한 인물들이다.

개인적으로 이들 중 현재의 한국에 필요한 인물은 ‘켈리’라고 생각한다. 머빈 켈리. 

천재들의 리더로 이들을 미래로 이끌었다. 특히 켈리는 확고한 운영 방침을 세웠는데, ‘더 좋거나 더 싸거나, 둘 다거나’라는 규칙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살펴보고 전화 시스템 향상에 도움이 될지 판단하는 일을 맡은 시스템 엔지니어들은 켈리의 ‘더 좋거나 더 싸거나, 둘 다거나’라는 규칙에 충실했다.

그야말로 한국에 필요한 카리스마형 리더다. 쇼클리 등 톡톡 튀는 천재형은 한국에서 시기와 질투에 이겨내기 힘들다. 적절히 정치적 싸움이 가능한 켈리가 현재의 한국에 필요하다 생각한다.

하지만, 벨 연구소 멤버 중 내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다.


#클로드 섀넌

정보이론의 아버지. 현재의 정보통신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다

섀넌은 어떤 메시지의 정보 함유량과 메시지 내 정보 비율을 측정하는 데 있어서 단위를 사용하면 매우 도움이 될 것이고, 이 단위를 ‘비트bit’라고 부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비트라는 단어가 이 의미로 사용돼 출판물에 실린 적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세운 정보이론은 이와 같다.

1. 모든 의사소통은 정보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2. 모든 정보는 비트를 단위로 가진다. 3. 측정가능한 비트로 구성된 정보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고, 또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옳다.

섀넌은 천재들이 아낀 천재다. 그의 활약을 읽으며 ‘엘런 튜링’이 떠올랐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 엘런튜링을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역시 천재끼리는 통하는게 있겠지.

섀넌은 완전히 다른 그 무언가였다. 1930년대 말 MIT의 한 교수는 섀넌이 비행기 조종술에 관한 수업을 듣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불행한 비행기 사고로 과학계가 섀넌을 잃는 일이 없도록, 섀넌이 그 수업을 듣지 못하게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MIT 교수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섀넌과 같은 인물은 여간해서는 나오지 않으므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첫째로 트랜지스터를 공부해봐야겠다 생각했다면, 둘째는 섀넌의 일대기와 결과다. 이 책에서 느낀 바로는 섀넌은 현재 대다수의 비즈니스를 가능케 한 사람이다. 

쇼클리 팀의 경우 벨 연구소에서 트랜지스터를 발명하지 못했더라면, 유럽이나 미국의 누군가가 금방 이것을 만들었을 거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오래 걸려봤자 2, 3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섀넌의 경우 한 학자가 ‘그의 눈부신 정보이론은 어떤 사람이 한 분야를 다지고, 그 분야에 있어 중요한 문제들을 제시한 후 거의 한 번에 전부 증명해버린’ 드문 사례라고 말할 정도였다.

역시 이런 사람을 왜 몰랐나 하는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푸른별 지구의 다음 판타지는?

벨 연구소의 부흥기가 끝나고 AT&T와 정부의 정치적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이야기를 읽으며, 참 안타까웠다.

이 책을 읽으며 궁금해진 세 번째가 AT&T다. AT&T는 어떻게 이정도의 수직적 통합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재판을 추진하는 윌리엄 백스터에게 있어 AT&T의 근본적인 문제는 AT&T가 수평적으로도, 그리고 수직적으로도 통합돼 있다는 것이었다. 수직적 통합은 AT&T가 자사의 연구와 개발, 제조, 출시를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회사의 필수 구성 요소를 나타내는 각 상자는 하나씩 포개져 쌓여 있다. 아이디어와 혁신이 시작되는 맨 아래의 상자는 벨 연구소였다. 그 위에 혁신을 대량생산하는 웨스턴 일렉트릭이 있다. 제일 꼭대기에는 신기술을 원거리와 지역시장에 출시하는 AT&T가 있었다.

연구조직으로 벨 연구소를 가지고 있으며, 웨스턴 일렉트릭으로 생산하고, AT&T로 판매한다. 이보다 완벽한 수직적 통합이 있을까?


벨 연구소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현재는 연구 대상이다. 어째서 현재는 그때 만큼의 발명이 없는지 많은 이들이 아쉬워할 만한 부분이다.

수학 부서 관리자였던 연구원 앤드류 오들리즈코는 1995년 미국의 기술에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 그것이 벨 연구소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다룬 논문을 배포했다. 벨 연구소 같은 오래된 산업 연구실을 비롯한 학계의 성과 덕분에, 이제는 과학의 기초가 너무 방대해져서 회사가 판도를 바꾸는 발견이나 발명보다는 이익이 되는 전략을 좇는 것만으로도 수익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앤드로 오들리즈코에 따르면 결국 벨 연구소는 당분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생에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오들리즈코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가까운 미래에 미국과 유럽 산업에서 제한 없는 연구로 돌아갈 가망은 크지 않다. 현재의 동향은 비좁은 시장에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벨 연구소만을 지향할 필요는 없다. 현재는 그동안의 발전을 기반으로 산업에 치중할 시기이고, 이 시기에 사는 우리는 이에 맞게 최적화 돼야 할 것이다.

스티브 잡스와 빌게이츠 등이 지금의 시대에 맞는 천재들이다.


오랜만에 여운이 길게 남는 책이다. 


[ 인상 깊은 문구 ]


  • “문제의 핵심은 만족할 만한 전화 중계기 또는 증폭기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과연 그런 중계기를 개발할 수 있을까? 아니다. 왜? 우리가 과학에서 아무런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 너무 늦지 않게? 아마도 그럴 것이다. 2년 안에 ‘아마도’를 ‘확실히’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이들 실험의 목적은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아널드의 요지는 일반적인 공학이 회사 운영에 도움이 되듯, 천재성도 회사 운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재성은 예측할 수가 없으므로, 알아서 발휘될 여지를 줘야 한다.
  • AT&T임원진은 1924년 12월의 이사회에서 공학 부서를 반독립적인 회사로 분리시키기로 결정했다. 회사의 이름으로는 ‘벨 전화 연구소’라고 정했다.
  • 공교롭게도 대공황은 과학적 지식을 배우는 데 있어서는 축복이었다. 벨 연구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직원의 근무 시간을 줄였는데, 시간이 많아진 젊은 직원들이 맨해튼 외곽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에 등록한 것이다.
  • 처음에는 전화벨도 존재하지 않았다. 발신인이 수화기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질러서 수신인이 전화를 받도록 했다.
  • 그리고 웨스턴 일렉트릭에서 생산하는 제품들의 특정 사양과 품질을 충족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월터 슈하트라는 연구소의 수학자는 대량생산을 통계적으로 관리하는 기법을 창안하기도 했다. 이 기법은 곧 ‘품질관리’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리게 된다. 이 기법은 그 후 몇십 년간 벨 시스템 내에서 제품 생산의 지침 역할을 했으며, 이윽고 전 세계의 산업 공정과 제품에도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 켈리는 공학을 ‘과학을 응용하여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로 정의했다. 엔지니어들은 자신의 산업과 국가를 위해 과학이라는 ‘공공 저수지’에서 물을 길었다. 따라서 엔지니어들은 평시에는 자동차나 전화 장비 등 돈이 되는 상품을 주로 만들었고 전시에는 군함, 군용 비행기, 군수품과 군용 통신 장비를 주로 만들었다.
  • 진주만 피습 이후 몇 년 동안 벨 연구소는 군을 위해 전차용 무전기로부터 산소마스크를 쓴 조종사를 위한 통신 시스템, 비밀통신을 암호화하는 기계에 이르기까지 거의 1,000건에 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에 따라 켈리는 직원 수를 수천 명 더 늘려야 했다. 전쟁 전에 4,600명이었던 연구소 직원이 전쟁 중에 9,000명으로 두 배나 불어났다.
  • ASWORG팀은 IBM 데이터 처리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서 미군의 모든 대잠수함 작전에 대한 기록을 관리했다. 그들은 컴퓨터 전문가 한 명과 보험계리인 몇 명을 초빙해서 ‘명중’과 ‘빗나감’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했다.
  • 새로운 기기들은 물리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이 머리를 맞대고 기초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발견된다고 믿었다.
  • 브래튼은 한 번을 지는 법 없이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기로 유명했다. 라이플총을 들고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고상한 과학의 성역에 몸담고 있다고 해서 그가 워싱턴 주 변두리에서 배운 싸움닭 기질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었다.
  • 발견은 자연에 대해서 과학적 시선으로 관찰한 것을 기술하는 것이다. 또한 발견은 과학적으로는 큰 성과이지만 경제적 수익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 쇼클리는 벨 연구소 연구팀뿐 아니라 이제 3년째에 들어선 트랜지스터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됐다. 그 개인적으로는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브래튼이 ‘올스타팀’이라 일컬었던,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쇼클리팀의 팀원들은 크게 허탈해했다. 더군다나 쇼클리는 연구소 내 반도체 연구를 독식하기 위해 관련 직원들에게 강력한 압박을 가했다. 이에 크게 낙담한 존 바딘은 어바나에 있는 일리노이 대학의 교수직을 얻어 연구소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월터 브래튼도 쇼클리에 대한 불쾌감을 내비쳤다.
  • 결국 고체 물리 연구팀에는 쇼클리라는 인간 말종이 있었던 셈이었다.
  • 연구소 고위 간부들은 트랜지스터 기술을 경쟁자들과 공유하고 라이선스를 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벨 연구소가 트랜지스터로 이득을 보려 한다면, 규제 당국에서 제동을 걸어올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을 공개함으로써 규제 당국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정치적 논리가 임원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다. 또한 기술을 공개함으로써 얻는 이득도 있었따. 벨 연구소에서 이룬 기술 혁신은 연구소의 위상을 한층 더 빛냈다. 당시 일각에서는 벨 연구소의 모기업인 AT&T의 시장 독점으로 과학이나 대중에게 돌아갈 혜택이 있을까라는 의혹의 눈초리가 있었다. 그러나 트랜지스터 기술을 대중에게 공개하면, 이런 불신을 해소하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 다음 이틀 동안은 여러 가지 종류의 트랜지스터들과 그 쓰임새에 대한 심도 있는 프레젠테이션들이 이어졌다. 라이선스료는 2만 5,000달러였다. 하지만 트랜지스터를 보청기에 사용하고자 하는 회사들은 라이선스료를 내지 않아도 됐다. 이는 과학자로서의 경력 중 대부분의 기간을 청력을 잃은 채 보내야 했던 AT&T의 창립자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 섀넌은 완전히 다른 그 무언가였다. 1930년대 말 MIT의 한 교수는 섀넌이 비행기 조종술에 관한 수업을 듣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불행한 비행기 사고로 과학계가 섀넌을 잃는 일이 없도록, 섀넌이 그 수업을 듣지 못하게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MIT 교수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섀넌과 같은 인물은 여간해서는 나오지 않으므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 벨 연구소 시절에 상금이 1만 달러나 걸린 크로스워드 퍼즐 콘테스트가 열린다는 글을 신문에서 읽은 섀넌은 거의 2주 동안 연구소 도서관에 처박혀 있었다. 이 때문에 코드를 고안하고 또 푸는 것을 연구하는 군사용 연구는 섀넌이 제일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하면서 돈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또한 언어, 특히 영어가 불필요한 중복으로 가득하며 암호의 뜻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실제로 나중에 섀넌은 영어가 75~85퍼센트가량 중복된다고 계산했다. 이는 암호학에 있어 많은 의미를 가진다. 메시지 내에 반복이 적을수록 암호를 해독하기 어려워진다.
  • “통신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곳에서 선정된 메시지를 다른 곳에서 정확하거나 거의 정확한 수준 정도로 재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라고 섀넌은 논했다. 아주 당연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섀넌은 이 문제가 왜 심오한지 설명했다. 벨 연구소가 여전히 ‘보편적 연결성’을 추구하고, 미래의 통신시스템이 켈리의 말처럼 ‘인간의 두뇌와 신경계처럼 생물체의 체계’와 비슷해진다면 이러한 꿈의 실현은 트랜지스터 같은 신기술, 즉 하드웨어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에 더해 섀넌 자신이 해온 것처럼 엔지니어들에게 수학적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지침은 데이터 전송에 있어 최적의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한 청사진이 돼줄 것이었다. 그는 모든 의사소통 시스템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점심시간의 수다건, 소인이 찍힌 편지건, 전화건, 라디오나 전화 송수신이건 상관없었다. 모든 메시지는 상당히 단순한 패턴을 따라간다.
  • 섀넌은 어떤 메시지의 정보 함유량과 메시지 내 정보 비율을 측정하는 데 있어서 단위를 사용하면 매우 도움이 될 것이고, 이 단위를 ‘비트bit’라고 부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비트라는 단어가 이 의미로 사용돼 출판물에 실린 적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 1. 모든 의사소통은 정보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2. 모든 정보는 비트를 단위로 가진다. 3. 측정가능한 비트로 구성된 정보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고, 또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옳다.
  • 특정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불필요한 부분을 덧붙임으로써 메시지 전송의 정확성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가장 간단한 예로, ‘FCTSSTRNGTHNFCTN FCTSSTRNGTHNFCTN FCTSSTRNGTHNFCTN’처럼 의도적으로 메시지를 세 번 반복함으로써 잡음이 많은 채널에서도 메시지가 분명하게 전달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섀넌은 사소하지만 보다 명쾌한 방식으로 이런 종류의 자기 수정 암호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줬다. 연구소의 몇몇 수학자들은 그 구체적인 방식들을 도출하는데 거의 평생을 바쳤지만, 섀넌은 그런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 고체 물리 연구팀이 효과적으로 연구를 진행하려면 금속을 처리하는 사람, 화학 물질을 다루는 사람, 전기적 계측을 진행하는 사람, 이론 물리학을 하는 사람 등이 필요했다. 이 모든 재능을 한 몸에 갖춘 이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 쇼클리 팀의 경우 벨 연구소에서 트랜지스터를 발명하지 못했더라면, 유럽이나 미국의 누군가가 금방 이것을 만들었을 거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오래 걸려봤자 2, 3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섀넌의 경우 한 학자가 ‘그의 눈부신 정보이론은 어떤 사람이 한 분야를 다지고, 그 분야에 있어 중요한 문제들을 제시한 후 거의 한 번에 전부 증명해버린’ 드문 사례라고 말할 정도였다.
  • 섀넌은 노드에게 제출한 사직서에서 “좋은 점도 안 좋은 점도 전부 하나로 묶어놓고 보니, 벨 연구소와 그곳에서의 학문적 삶은 평균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15년을 보내고 난 지금은 삶이 지루하고 생산적이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라고 적었다. 섀넌이 MIT에서 정확히 무엇을 하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하게 될 일은 정보, 통신, 컴퓨터 등 여러 주제에 대해서 학생과 교수진을 상대로 강의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또한 암호학과 국가 간 통신 해독을 주로 하는 국방부 산하의 비밀조직인 미 국가안보국과도 몇 건의 프로젝트를 함께하기로 했다.
  • “그쪽은 여기에서 하루에 일곱 시간 반을 보내기 때문에 월급을 받는 거요. 하지만 칭찬받고 승진하려면 나머지 열여섯 시간 반을 잘 보내야 됩니다.” 첫 출근한 직원들을 사무실로 부른 켈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 물론 변화에 둔감하고, 몸을 사리는 데다 앞으로의 행동이 뻔한 모기업이 그 산하에 정말 창의적인 연구소를 두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었다. ‘타임’은 AT&T를 두고 “AT&T보다 보수적인 기업도 없다. 허나 그보다 창의적인 기업도 없다.”고 평했다.
  • 하지만 켈리가 부소장으로 있는 동안 개발부 및 시스템 공학부에서 수행한 프로젝트들 역시 과학 연구 프로젝트들만큼이나 야심찬 것들이었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개발부 및 시스템 공학부의 프로젝트가 다른 일보다 더 어렵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개발에서 실수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제품이나 기술을 고안해 기존 전화 시스템에 통합시키는 일은 항상 완벽을 요구했다.
  •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살펴보고 전화 시스템 향상에 도움이 될지 판단하는 일을 맡은 시스템 엔지니어들은 켈리의 ‘더 좋거나 더 싸거나, 둘 다거나’라는 규칙에 충실했다.
  • 켈리의 계산에 따르면, 해저 케이블 사업에 투자된 비용을 회수할 수 있으려면 케이블이 적어도 20년 동안은 문제 한 번 일으키지 않고 운영돼야 했다.
  • 즉, 약 64킬로미터마다 중계기가 있는 해저 케이블을 매설할 방법을 고안하고, 이 케이블이 20년 동안 새거나 방해받는 일없이 작동하게 할 방법을 고안하면 됐다. 이는 여러 면에서 과학보다는 기술적 문제였다. 하지만 ‘엄청난 규모, 장대한 범위, 하나하나의 부품들이 제 기능을 하면서도 20년 간 고장이 나지 않도록 설계돼야 할 필요성’ 앞에서는 그 대단한 켈리마저도 초라해 보였다.
  • 때로 연안에서 어업을 하던 트롤선 탓에 이 최초의 케이블은 손상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개통된 후 22년 간 이 기술은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 쇼클리는 벨 연구소 동료 여럿을 서부로 데려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가 벨 연구소에서 채용할 수 있었던 건 결국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쇼클리는 대부분 다른 기업들에서 유망한 과학자들을 발굴해 채용했다. 고든 무어, 로버트 노이스, 장 회르니, 유진 클라이너가 대표적이었는데 이 네 명이 후에 실리콘밸리라는 지명을 지도상에 올리게 된 이들이었다. 신입들 중 어느 누구도 쇼클리가 관리자로서는 부족하다는 점을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았다. 설사 좀 부족하다 해도, 쇼클리의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은 분명 매력적인 일이었다.
  • 윌리엄 화이트는 1956년 ‘조직인’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것은 미국의 기업 문화 및 창의적 사고의 이점을 분석한 책이었다. 화이트는 자신의 저서에서 특히 클로이드 섀넌 등 독창적인 사람들이 이룬 성과를 가리키며 “GE와 벨 연구소는 자유로운 연구가 주는 장점을 증명하는 곳이다. 기업 연구소 중 이 두 곳이 특히 높은 수익을 창출했고 최고의 인재들이 몰렸다. 왜일까? 다음의 사실이 앞의 두 사실을 설명한다. 이 두 곳은 ‘쓸데없는 호기심’의 가치를 믿고 있다.”라고 말했다.
  • 벨로는 트랜지스터와 섀넌의 정보이론이 어우러지며 발생한 힘이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썼다. 이 발명들이 태어날 당시 섀넌과 쇼클리는 이 두 가지가 합쳐질 거란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 10년 간 그들의 아이디어는 복잡하게 얽혔다. “트랜지스터는 소형이고 저렴하며 수명이 무한하다. 전력 소모도 매우 적다. 바로 이 작은 기기가 대량으로 사용돼 섀넌의 이론을 구현하는 것이다.”
  • 피어스가 아버지보다는 똑똑한 어머니를 더 좋아했던 것처럼, 연구소에서도 가장 똑똑한 사람들에게 끌렸다. 연구소의 똑똑한 사람들 역시 피어스에게 끌렸다. 놀랍게도 그의 인기는 쇼클리에게 별로 뒤지지 않았다.
  • 피어스는 벨 연구소에서 천재인 섀넌과 관리자인 켈리의 중간쯤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피어스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도록 시켰어요. 저 자신은 게으른 편이지만…” 인터뷰 하는 사람이 “그런 일이 당신의 경력이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피어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그 자체가 제 경력인걸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떠올린 모든 아이디어를 쫓기에는 아이디어와 관심사가 너무 많았다. 그는 한 가지에만 집중하지 않았고 항공기, 전자학, 음향학, 전화, 심리학, 철학, 컴퓨터, 음악, 언어, 글쓰기, 예술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 이렇게 자신이 쓴 글이 되돌아오면 피어스는 심하게 화를 냈다. 전혀 감상적이지 않은 피어스였음에도 그는 죽을 때까지 출판 거절을 알리는 편지들을 모아둘 정도였다. 그렇게 모인 편지가 수백 통이었다.
  • 플렉스터는 생물학에서 연구의 개별적 성과는 거의 활용되지 않고, 성과 자체도 불분명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이 모여 엄청난 효과를 만드는 과정을 봐왔다고 말했다.
  • 메리 제이크스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다들 모여 있었어요. 잔디 언덕에 앉아 기다렸죠. 일하는 사람들은 건물 안에, 여자와 아이들은 밖에 있었고요. 모든 것이 이 발사를 위한 거였어요. 로켓이 발사됐고, 실패였죠. 모여 있던 모두가 가족 중 한 명이 죽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 그 말의 요점은 에코 이후 겨우 1년 만에, 위성이 흥미로운 실험에서 치열한 비즈니스가 됐다는 것이다. 1961년 6월 ‘포춘’에 따르면 이미 수많은 다국적 기엄, 그중에서도 RCA, GE, ITT는 어마어마한 위성을 우주에 설치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위성은 점점 부담이 되고 있는 해저 케이블을 대신해주는 것이다. 어떤 경제학자들은 궤도 위성이 10년 안에 연수익 10억 달러짜리 비즈니스가 될 것으로 예측했다.
  • 텔스타는 발명품 하나가 아니라, 지난 25년 간 연구소에서 개발한 16가지 기술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뉴욕 타임스’에서는 이점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텔스타에 쓰인 기술 중에 우주에 보내려고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이 기술들이 모두 모였을때야 미로소 능동위성의 전개가 가능했던 것이다.
  • 그의 1957년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FCC에게서 휴대전화 분야를 떼어올 방법이 없을까?” 그 시기에 피어스는 이미 10~20년 앞을 내다보고 벨 연구소가 먼저 휴대전화 연구를 시작했으면 하고 바랐다.
  • 전자식 전화기와 새로운 전자 교환에 대해 ‘뉴욕 타임스’는 “가정주부가 집 밖에 나와 있을 때도 전화로 오븐을 켤 수 있고, 사무실 직원이 통화 중인 곳에 전화를 걸어도 앞 통화가 끝나면 자동으로 연결된다.”라고 썼다.
  • 일반적으로는 파장이 짧을수록 주파수가 높고 담을 수 있는 정보의 양도 많다.
  • 또 연결된 트랜지스터는 정보를 대신하거나 이를 통해 정보를 기억할 수도 있었다. 이것이 수백, 수천, 수만 개를 동시에 연결한다면(10억 개가 한꺼번에 맞물리는 것은 당시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엄청난 기능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빌 베이커는 이것을 ‘모든 인간의 지식과 경험이 완벽하고도 정확하게 2진법으로 표현되는 경이로운 우연의 일치’라고 표현했다.
  • 벨 연구소에서는 이윽고 세상을 바꿀 만한 다른 업적 몇 가지를 이뤄냈다. 그중 하나는 머레이힐의 컴퓨터 과학자 몇 명이 모여 ‘유닉스’라고 하는 가히 혁명적인 컴퓨터 운영체제를 만들어, 다른 언어의 컴퓨터 기반에까지 깔리게 된 일이었다.
  • 줄리어스 몰나르는 텔레비전 전화를 소개하는 글에서 텔레비전 전화는 엄청난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 설명했다. 장 보러 나갈 필요가 없어지거나, 멀리서도 얼굴을 보며 통화할 수 있기 때문에 인구 밀집 지역의 과밀도가 줄어들고 교통량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이다.
  • 인간의 머리카락보다 조금 두꺼운 유리 가닥은 극도로 순수한 유리의 두 가지 성분으로 구성될 것이었다. 안쪽에는 고체로 된 유리의 ‘핵’이 들어가고, 그 바깥으로 유리의 ‘껍질’이 씌워진다. 핵과 껍질은 아주 큰 차이가 있었는데, 바로 껍질의 굴절률이 핵의 굴절률보다 조금 작다는 점이었다. 안과 밖의 굴절률 차이는 핵을 따라 보내지는 빛의 파동이 껍질을 벗어나 흩어지지 않게 해줄 것이다.
  • 더 큰 단점은 FCC가 휴대전화에 대해 FM 라디오 주파수를 조금 웃돌 정도로 소량의 전파 스펙트럼만 할당해줬다는 점이었다. 스펙트럼이 좁다는 것은 전화를 할 수 있는 채널이 크게 한정돼 있다는 뜻이다. 당시 할당된 스펙트럼으로는 맨해튼 전체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자동차 전화는 채 12대도 안 됐다.
  • 휴대전화 서비스를 위해 고성능 안테나 하나를 도시 중앙에 배치하는 것보다 여러 개의 저출력 안테나를 넓게 퍼뜨려 배치한다는 발상이었다. 링과 영의 제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휴대전화의 범위를 중앙의 안테나가 그리는 큰 원이 아니라, 구석구석 세워진 안테나들이 만든 작은 6각형이 그리는 벌집 형태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휴대전화가 신호를 수신할 때, 각 6각형은 직경 몇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있어 별도의 지역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각 6각형은 각기 다른 범위의 주파수를 나타내는 것이다.
  • 벨 연구소의 연구 취지는 수백 명의 인원을 포함한 대규모 프로젝트로 확고히 옮겨가는 듯했다. 이제 벨 연구소는 소수의 인원이 조용한 연구실에서 신형 증폭기에 대한 과감한 연구를 하는 모습은 찾기 힘들어 보였다. 그보다는 대규모의 팀이 어려운 문제를 놓고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연구하는 쪽이었다.
  • 그후 벨 연구소의 휴대전화 팀은 FCC 제안서 작업을 시작했고, 캘리포니아 주 산타 클라라의 반도체 회사인 인텔(빌 쇼클리의 첫 반도체 회사에서 도망쳐 나온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세운 회사)은 ‘4004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혁신적 통합 회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4004 마이크로프로세서는 2,300개의 트랜지스터를 담고 있는 작지만 강력한 컴퓨터였다. 4004는 1세대 장치로, 휴대전화 단말기에 넣으면 고도로 복잡한 필수적인 연산을 처리할 수 있었다.
  • 시스템 기술자들은 프로젝트를 실현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기준과 기술, 경제성을 고려한다. 또는 복잡한 신기술을 나머지 시스템에 어떻게 통합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 세상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고 소음은 대화를 방해한다. 도심의 소음은 시골의 소음보다 침해 정도가 더 크다. 자동차 엔진과 기차, 전자 장치 들은 돌발적인 혼선을 만든다. 고층 빌딩은 수신 지역을 가리거나 신호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튕겨버린다. 그러나 지방에서도 무선 전송을 방해하는 소음은 존재한다. 고가 고속도로와 고압전선, 산과 나무 등이 그랬다.
  • 재판을 추진하는 윌리엄 백스터에게 있어 AT&T의 근본적인 문제는 AT&T가 수평적으로도, 그리고 수직적으로도 통합돼 있다는 것이었다. 수직적 통합은 AT&T가 자사의 연구와 개발, 제조, 출시를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회사의 필수 구성 요소를 나타내는 각 상자는 하나씩 포개져 쌓여 있다. 아이디어와 혁신이 시작되는 맨 아래의 상자는 벨 연구소였다. 그 위에 혁신을 대량생산하는 웨스턴 일렉트릭이 있다. 제일 꼭대기에는 신기술을 원거리와 지역시장에 출시하는 AT&T가 있었다.
  • 1982년 1월 8일 금요일 아침, 머레이힐에는 AT&T의 찰리 브라운 회장과 사법부의 윌리엄 백스터가 합의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돌았다. 실상은 단순했다. AT&T가 현지 전화 회사의 권리를 잃는 데 동의했고, 전화 회사들은 모두 각자의 권리를 갖는 별개의 기업이 된 것이다.
  • 쇼클리는 엄청나게 형편없는 관리자, 어쩌면 그 이하였다. 1957년, 무어와 그의 동료 7명은 쇼클리를 떠나 직접 회사를 차리기로 했고, 이들에게는 이후 ‘8명의 배신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쇼클리는 회사 내 누군가가 회사일에 훼방을 놓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어는 쇼클리가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거짓말 테스트를 시도하려고 한 때가 ‘결정타’였다고 지적했다.
  • 사실 섀넌은 자신의 일이 가져오는 하루하루의 가치에 관심을 가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신은 제 아이디어에 실제보다 조금 더 실용적인 목적을 부여하는 것 같군요. 저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밤낮으로 이것저것 떠올립니다. 공상 과학 작가처럼 ‘이랬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이런 종류의 흥미로운 문제가 없을까?’ 같은 생각을 하죠. 이건 제가 문제를 푸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내내 그 일에만 매달리죠.”
  •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 섀넌에게 주식시장은 일종의 집착을 불러일으켰다. 섀넌이 투자를 한 것은 돈이 필요해서가 어니었다. 그에게는 MIT에서 받는 봉급과 연금이 있었고, 벨 연구소에서 자문을 하면서 받는 돈도 충분했다(비록 섀넌이 머레이힐에 더 이상 관련되지 않았음에도 연구소 사장이었던 빌 베이커는 계속해서 임금을 지불했다. 베이커는 ‘정보이론의 창시자’가 어떤 종류의 재정 곤란도 겪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섀넌이 1985년 영국 브라이튼에서 열린 정보이론 국제 회담에 말도 없이 나타난 일화는 유명하다. 섀넌은 자연스럽게 군중 틈에 섞여 들었다. 그는 친절하고, 정중하고, 호리호리한 흰 머리의 여느 신사와 다름없었다.
  • 수학 부서 관리자였던 연구원 앤드류 오들리즈코는 1995년 미국의 기술에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 그것이 벨 연구소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다룬 논문을 배포했다. 벨 연구소 같은 오래된 산업 연구실을 비롯한 학계의 성과 덕분에, 이제는 과학의 기초가 너무 방대해져서 회사가 판도를 바꾸는 발견이나 발명보다는 이익이 되는 전략을 좇는 것만으로도 수익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 오들리즈코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가까운 미래에 미국과 유럽 산업에서 제한 없는 연구로 돌아갈 가망은 크지 않다. 현재의 동향은 비좁은 시장에 집중하는 것이다.”
  • 영리하고 능력 있는 기술자인 김종훈이 벨 연구소의 사장으로 임명됐다. 김종훈은 벨 연구소를 살리려면 연구소의 구조와 비전, 전략을 바꿔야 한다고 판단했다. 김종훈은 연구소는 일치단결해서 연구소의 혁신이 어떻게 루슨트에 도움이 될지에 초첨을 맞춰야 한다고 봤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이렇게 기록했다. “김종훈은 아마도 연구소의 타당성을 유지하는 최선의 희망일 것이다.” 그러나 김종훈은 벨 연구소를 과학과 학문의 거점으로 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연구소가 기업가적 사고의 온상이 되기를 원했다.
  • 현대의 삶 속에서 벨 연구소의 DNA를 하나도 포함하지 않은 요소를 찾기란 쉽지 않다.
  • 과학원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미국 인력의 4퍼센트만이 과학자와 기술자로 구성돼 있으며, 이 그룹이 나머지 96퍼센트를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는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 켈리는 가장 가치 있는 아이디어는 여러 명의 물리학자들이 다른 부서와 원칙에 부딪힐 때 발생한다고 믿었다. 레이저 과학자 헤르비그 코젤닉은 설명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드는 것은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상호작용, 여러 가지 원칙의 조화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켈리의 가장 위대한 통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벤처 경제는 적어도 지난 몇 십 년간 머빈 켈리의 혁신 모형보다는 더 수용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실리콘밸리(그리고 보스턴 교외 128번도로까지)에서 나오는 제품은 전자 하드웨어의 새로운 응용에서 컴퓨터 소프트웨어, 생물공학과 클린에너지의 새로운 응용에까지 유동적으로 진화했다. 단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면 벤처 회사들은 당연히 새로운 기초적 지식을 찾는 기업가에게 투자하는 것을 기피했다는 점이다.
  • 클로이드 섀넌은 말년에 이런 말을 했다. “다른 방에 20개가 넘는 상을 보관하고 있었지만 수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호기심에 이끌렸던 것이 더 컸죠. 돈이나 재정적 이득은 아무런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습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해 더 높은 급여를 받겠다고 노력을 한 적은 없습니다.”
  • 벨 연구소의 오랜 전통 중 하나를 본 딴 경우도 있다. 조엘 엥겔이 홈델의 블랙박스에서 휴대전화 시스템을 계획했던 것처럼, 구글은 직원들에게 관심이 가는 프로젝트에 자신의 시간을 최대 20퍼센트까지 투자할 것을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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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용 Domingo

오세용 Domingo

글쓰는 감성개발자 오세용입니다. IT, 책, 축구, 커뮤니티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