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개념이 유행이었다. 말콤 글레드웰의 도서 ‘아웃라이어(2009)’에 나오면서 유명해졌다. 어떤 분야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1만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건데, 매일 3시간씩 훈련하면 약 10년이 걸린다는 거다. 그래서 10년은 일해야 팀장도 하고, 시니어 취급도 받고 그랬다.
2/ 챗GPT가 나오고, 2023년에 독서모임에서 20대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어차피 GPT가 다 아는데, 뭐하러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이길 자신도 없고요’ 명문대를 다니던 그 친구는 자신 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굉장히 우울하다 말했다. 지난해 전문직에 합격했다며 연락이 온걸 보면, 역시나 똑똑한 친구다. 지금은 챗GPT를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3/ 최근 스트레스가 심해 1년 반만에 하루 휴가를 냈다. 휴가 외에도 외근을 잡아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내가 의지하는 멘토도 만나고, 선배도 만나고, 후배도 만나고, 이제 시작하는 예비창업자들도 만났다. 오랜만에 여유를 갖고 오프라인 서점에 한동안 머무르기도 했다. 다양한 포지션을 만나며 여러 관점에서 두뇌를 자극해서인지 그간 멀리 미뤄뒀던 주제를 손에 쥐었다. AI다.
4/ 우선 책을 좀 샀다. 회사에 AI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책도 사고, 바이브 코딩 책도 샀다. AI 에이전트 책도 샀고, 너무 많이 사는 거 같아 장바구니에도 많이 넣어뒀다. 집에와서 책장을 보니 딥러닝 책과 인공지능 수학 책이 있어 모니터 옆에 두었다. 책을 보며 브라우저에 검색을 해서인지 SNS와 유튜브에 AI 주제가 덮였다. 문득 호기심이 들어 맥북을 열었다.
5/ 사실 나는 IDE에도 관심이 많았고, 새로운 라이브러리나 새로운 개발 방법론에도 흥미를 느꼈던 주니어 개발자였다. 이클립스에서 안드로이드 스튜디오로 넘어가던 시기 회사에서 가장 먼저 안드로이드 스튜디오를 사용했고, http 통신 라이브러리도 혼자서 다른걸 사용해보겠다며 공통 소스도 바꾸곤 했다. 바쁜 프로젝트에서 IDE를 바꾼다거나 공통 코드를 건드리는 건 괜한 부스럼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그게 재밌었다. 이번 주말은 그때 감정이 올라왔다.
6/ 구글에서 바이브코딩 IDE가 나왔다더라. 안티그래비티다(Google Antigravity) 바이브코딩은 주위에서 많이 들어왔는데, 2025년에 잠깐 해본바로는 유용하나, 상용 서비스에 사용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다. 시스템에 코드를 수정할 권한을 부여한다는데 굉장한 거부반응이 있었다. 누가 책임지라고? 그런데 이번주 사용해본 안티그래비티는 놀라웠다. 간단히 인스타그램 정보를 긁어오는 크롤러를 만들어보라고 했더니 로그가 몇 개 올라오더니 다 만들었다고 하더니만, 확인할 어드민을 만들라고 했더니 역시나 몇 가지 승인을 요구하더니만 완성했단다. 놀랍게도 브라우저를 띄우더니 작동되는 걸 보여주기까지 했다. 단순히 계정 정보 뿐만 아니라 이미지를 긁어서 분석해보라 했더니 로컬 AI를 설치해서 구현하더라. 이렇게 만들기까지 30분 정도가 걸렸는데, 어이가 없었다.

7/ 나는 안드로이드 개발자로 6년 일했는데, 이 시기에는 ‘세팅이 반이다’라고 할 정도로 환경 세팅이 참 번거로웠다. 조금만 어긋나도 빌드가 되지 않아 이를 해결하는 것도 문제 해결 능력 중 하나였다. 그런데 Python을 설치하고, Flask로 UI를 만들고, Transformer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나는 세팅을 지시한 적이 없다. 그냥 알아서 묻고, 승인을 구했을 뿐이다.
8/ 오늘은 좀 더 AI를 활용해보려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전부터 궁금했던 오픈소스 LLM을 설치했다. 올라마(Ollama)를 세팅해서 LLM을 돌려보려고 했는데, dmg를 설치하니 세팅이 전부 끝났다. 챗GPT UI를 보여주더니 LLM 모델을 선택하면 다운 받아 자동으로 실행했다. 초기 챗GPT 느낌이 났다. gemma3:1b 모델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기에 gemma3:27b 모델을 설치했다가 맥북에어 M1이 뻗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최근에는 대부분 문서 작업이나 이메일, 리서치 등만 해왔기에 불편함이 없었는데 로컬 LLM을 돌리니 바로 뻗어버렸다. 4년만에 처음으로 맥북프로를 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9/ 지난주 내내 이슈였던 오픈클로(openclaw. 구, moltbot. 구구, clawdbot)에 관심이 갔다. 맥을 하나 더 사야 하나 싶었는데 클라우드플레어(Cloudflare)가 월 5달러에 클라우드 환경에서 오픈클로를 제공한다기에 이걸 해봐야겠다 싶었다. 구글 제미나이와 함께 세팅을 마쳤는데 연결이 되지 않더라. 텔레그램으로 지시를 해보고 싶었는데 분명 시키는대로 한 거 같은데 안 되더라. 오랜만에 개발할 때 느낌이 났다. 몇 시간을 끙끙댔는데, 결국 연결을 못 했다. 좀 짜증이 나는데 이걸 이미 활용하는 사람들과 이걸 만든 사람들이 생각났다.

10/ 만약 SNS의 누군가의 의견처럼 2026년은 본격 AI 에이전트의 시대가 열린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이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고 휩쓸려버리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될까. 이 시기를 오랫동안 준비해온 사람도 있을 텐데, 이제야 흐름을 느끼려니 사실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누군가는 모든 개념이 다 망가진다 하고, 누군가는 드디어 자비스가 나타났다 하는데. 언제나 있었던 호들갑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정말 거대한 변화가 생기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11/ 눈 앞의 무언가에 아등바등 했던 몇 개월이 있었고, 그 전에는 약간의 확신을 갖고 땀나게 뛰었던 몇 개월도 있었다. 갈피를 못 잡겠던 몇 개월도 있었고, 그 앞에는 굉장한 좌절의 시기도 있었다. 조금 열기를 식혀보면 사실 어떤 기술적 개념이 출시됐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뀌었던 적은 없다. 실제 산업에 적용되기까지, 그리고 시장에서 받아들이기까지는 정말 많은 상호작용이 필요할 거다.
12/ 하지만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대부분의 사람이 ‘1만 시간의 법칙’ 아래서 땀을 흘렸다면, 이제는 그 법칙을 따르는 범위가 꽤 좁혀졌지 싶다. 어쩌면 전문가라는 개념도 다시 쓰여져야 하지 싶다. 그저 어떤 전문가가 되고 싶었던 나로서는 오늘의 내가 마치 한물 간 맥북에어 M1처럼 느껴져 다소 씁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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