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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린더가 빼곡하다. 매주 20여개 일정이 빼곡하게 달려있다. 어느 날은 오프라인 미팅만 7-8개 잡히고, 어느 주간은 주말 모두 미팅이 잡힌다. 매달 정기적으로 처리할 행정 처리도 갯수가 늘어나 모두 외우기 어려운 정도가 됐고, 가끔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내가 잊어버린 일정이 있나 싶어 흠칫 놀라기도 한다. 수시로 적는 것을 넘어 어디에 적었는지 잊어버리기 시작한 건 꽤 됐으며, 누군가에게 무언가 요청하고 놓치는 일은 꽤 흔한 일이다.

그럼에도 주요 일정을 꼬박꼬박 챙기는 건 내가 주간, 일간 업무일지를 쓰기 때문이다. 창업 후 몇 개월은 일간 업무일지만 썼는데, 매일매일 일한다고 해서 성과가 모두 쌓인다거나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건 아니더라. 주간 일지를 쓰기 시작한지도 어느새 1년이 훌쩍 넘었다. 잊으면 안 되는 일정은 곧바로 캘린더에 적고, 매주 그리고 매일 업무 일지를 쓰는데도 놓치는 것들이 있다.

물론 팀에서 협업 도구도 사용한다. 2주 단위 스프린트도 진행하고, 각 채팅 채널에 스레드로 잘 기록해두는데도 까먹는 일이 생기곤 한다. 어쩌겠나, 그러니 팀으로서 함께 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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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 사업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사업을 만드는 건 사람의 손가락 지문처럼 무수히 많은 방법이 있는 것 같다. 누군가는 처음부터 딱 성공 궤도를 그리고 달리는가 하면, 누군가는 몇년 뒤 목표만 딱 정하고 세부 계획은 그때그때 만들어 가더라. 저마다 장점이 달라 그림만 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동안 안 보이더니만 갑자기 나타나서는 시장을 휘젓고 다니기도 한다.

그중 나란 사람은 포기할 수 없는 몇몇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준을 지킬 수 있다면 꽤 많은 부분에서 유연함을 가져가려 노력하는 편이다. 때문에 누군가는 굉장히 빡빡하다고 느끼지만,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쉬운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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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만들어가는 측면에서 내가 가진 장점은 꾸준함이 가장 큰 것 같다. 내게 적합한 패턴을 찾고, 루틴을 지키되 꾸준히 사람을 만나고, 꾸준히 대화하고, 꾸준히 공부하고, 꾸준히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내가 가장 잘하는 것 같다.

솔직히 부러운 사람이 많다. 누군가는 정말 똑똑한 것 같은데, 이미 좋은 학벌과 커리어를 가지고 있어 굳이 똑똑함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는 쉽게 가질 수 없는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던가, 누군가는 강력한 인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누군가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장애물을 부숴버리는가 하면, 누군가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돈도, 사람도, 일도 어디선가 탁탁 만들어내기도 하더라. 볼 때마다 부럽고, 가끔은 그들과 내가 너무 비교돼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초기 기업에게는 그리 많은 기회가 허락되지 않는다. 어쩌다 주어진 운과 같은 기회는 눈치 채지도 못하고 지나가기도 하고, 어렵사리 만든 기회가 허무하게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때문에 기회다 느껴지는 매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고, 정말 정말 잘하고 싶은 마음에 되려 망쳐버리기도 한다. 이런 운을 달고 다니는 사람 역시 부러움의 대상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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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지난 칼럼에서도 말했듯 사람에 관한 운이 감사하게도 끊이질 않는다. 지금껏 내게 찾아온 수 많은 귀인들 덕에 많은 기회를 만날 수 있었고, 그중 몇몇 기회는 잘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운과 같은 기회 말고 다른 기회를 말해보고 싶다.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려본다. 마치 영화 속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내가 오늘 연락했을 때의 우주, 내일 연락했을 때의 우주. 아이디어를 실현했을 때의 우주, 실패 했을 때의 우주. 수많은 우주를 상상하며 최적의 우주를 찾는다. 이때 역시 나란 사람이 포기할 수 없는 몇몇 기준을 끊임없이 대입하며, 나머지 포기할 수 있는 지표를 넣어 주사위를 돌린다.

포기할 수 없는 기준이 꽤나 빡빡한 터라 대부분의 우주는 머릿 속에서 폐기된다. 상상력와 시간은 무한하지 않기에 대부분은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그림을 찾는 건 실패한다. 아마 내가 생각이 많은 건 남들보다 우주의 가짓수를 더 많이 생각해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조금 더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 우리가 덜 고생할 수 있는 방법. 더 기술적인 방법. 더 비전 있는 방법 따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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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피곤한 방법은 원하는 우주를 떠올리는 것 자체에 큰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은 물론, 우주를 폐기하는 순간 순간마다 심적 에너지를 꽤나 소모하고, 이 모든 과정에서 꽤나 날카로워진다. 그리고 이 방법의 가장 큰 단점은 결국 우주를 떠올린다 해도 그 우주를 갖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거다.

수많은 우주를 폐기한 뒤에 찾은 우주는 너무도 소중하고, 꼭 지켜내야 할 미래다. 내 대부분의 기준을 만족하는 우주는 정말 흔치 않기에 이 우주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마음을 다한다. 지금껏 수많은 귀인이 이 우주를 위해 도왔지만, 결국 이 우주마저 눈 앞에서 놓치기도 한다.

우주를 찾아 마음을 다했으나, 결국 손에 갖지 못했을 때 굉장한 좌절감에 빠진다.

누군가는 내가 너무도 바보 같이 보일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정말 일부만 보이기 때문이다. 고작 그거 하나 가지고 뭘 그래. 또 하면 되지. 그정도면 잘 했어. 말은 쉽지만, 나도 그 위로에서 위안을 얻고 싶지만. 그들이 보는 일부 뒤에 무수히 연결된 거대한 우주가 또 다시 폐기되는 걸 보고 있자면. 이 좌절감을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는 걸 깨닫곤 그저 괜찮다며 회피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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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피곤한 방법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결국 우주가 만들어졌을 때의 굉장한 희열과 성취감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만들려는 우주는 제각기 다른 크기를 가지며, 때로는 1개 우주를 만들기 위해 10개 우주가 필요하기도 하다. 각 우주는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여러 지표를 만족하기에, 그동안 내가 만들어낸 우주를 모두 합치면 수십, 수백억번의 연산으로도 턱없이 모자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결국 하나의 소우주를 만들었을 때면, 순식간에 그간 거쳐온 많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 우주를 만들기 위해 수도 없이 폐기했던 우주들. 그렇게 이 우주를 만들기 위해 매일 같이 쌓아올린 수많은 순간들.

내가 수천번의 우주를 폐기만 했더라면, 분명 몽상가가 됐을 거다. 하지만 폐기하지 않은 우주를 위해 마음을 다하고, 여기에 내 가장 큰 장점인 꾸준함이 더해지니 가끔은 작지만 내가 원했던 우주를 손에 쥐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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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꽤 오랜만에 소우주를 손에 쥐었다. 이 우주를 위해 얼마나 많은 우주를 폐기했었나. 비록 내가 떠올렸던 것보다는 더 작았지만,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여러 지표는 충실히 지켜냈다.

어쩌면 나를 보며 웃을지도 모른다. 고작 저것에 기뻐한다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 소우주 뒤에 무수히 연결된 우주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 소우주로 인해 내가 그린 거대한 우주가 연결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오늘은 8월 중 가장 기분 좋은 날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