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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김영사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로 전한 메시지를 잊지 못한다. 그가 자료 속 진실을 찾아, 과거를 머릿속에 그리는 능력은 놀라울 정도다. 더욱이 그 그림을 전 세계 독자들 머릿속에도 그렸다는 것은 정말 마법과도 같다. 그렇게 그가 던진 메시지를 떠올리자면, 숙연해질 정도다.

그런 그가 사피엔스, 호모데우스에 이어 쓴 이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은 2020년 12월을 마감하기에 적절한 책이었다. 최근 내 고민과 올해 아쉬움으로 마친 내 도전을 보면, 유발 하라리는 과거뿐 아니라 미래마저 보는 것 같다.

종교, 어리석은 인간을 다룰 정도로만 덜 어리석은 그것

난 종교를 믿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종교를 등에 업은 ‘종교인’을 믿지 않는다.

천주교 모태 신앙이며, 유아세례를 받고, 복사단과 학생회장을 지나 교리교사까지 했던 내가 등을 돌린 건, 어쩌면 현시대 천주교를 말하지 않을까 싶다.

여전히 기도를 하는 부모님에게 나는 차라리 그 시간에 TV를 보는 게 낫겠다고 말한다. 가만히 앉아 바라는 걸 되뇌는 행위가 과연 무엇을 바꾸겠는가? 때로는 스스로 화도 났다. 성당에서 보냈던 내 시간을 모아 다른 걸 했더라면, 적어도 조금은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신앙생활을 했을 땐 꽤 깊이 그들과 함께했다. 때문에 가까운 종교인들도 있었고,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봤다. 때문에 나는 그들을 종교와 동일시 할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바꾸려 했다.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 어디쯤 자리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귀를 막았고, 지친 나는 스스로 떠났다. 결코 그들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종교라는 것 자체가 싫어지기도 했고, 그렇게 시야가 좁아져 귀를 막은 그들이 미웠다.

이런 내게 유발 하라리는 종교의 무서움을 말한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이유.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이유.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그들의 이야기.

어쩌면 기계와 알고리즘 세상에서 방향을 잃은 더 많은 사람이 찾아갈 곳은 종교가 아닐지. 그렇게 그들을 조종할 종교란 무엇인지. 마치 펜으로 맨 등판을 벅벅 긁는 듯한 아픔이 있는 글자들이었다.

21세기의 종교는 비를 내리게도 못하고, 병 치료도 못 하고, 폭탄도 못 만들지만, ‘우리’가 누구이며 ‘그들’은 누구인지, 누구를 치료해야 하고 누구에게 폭탄을 투척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그렇게 종교가 알고리즘에 침투하고, 기계 속에 자리 잡을 때면 그들은 인간들을 사로잡기 위해 건드린 ‘인간적인 면모’처럼. 기계를 사로잡기 위해 ‘기계적인 면모’를 건들지 않을까.

기술, 인간 역사의 모든 것

어떤 사건이 생기고, 그 사건에 휘말려 모든 것을 망쳤을 때. 홀로 어둠에 남아 집히는 걸 모조리 던지며 눈물을 뿌릴 때. 그러다 지쳐 헛웃음만 나올 때. 문득 생각한다. 그냥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유발 하라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인류를 발전시킨 ‘기술’이 결국 모든 악의 근원인가 싶다. 그래도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이란 기술로 밥 먹는 내게 이는 꽤 큰 딜레마다. 어쩌면 ‘기술’이란 종교에 몸 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렇다.

최근 관심 두는 투자자 중 캐서린 우드가 있다. 우드는 ARK라는 성공적인 액티브 ETF 운용사를 이끈다. ARK는 올해 가장 성공적인 ETF 운용사 중 하나다. ARK는 ‘파괴적 혁신, 4차 산업혁명’ 등 키워드로 ETF를 운용한다. 바이오, 핀테크, 인터넷, 로보틱스 등 향후 인류 미래를 바꿀 산업에 투자한다.

캐서린 우드는 지금까지 인류를 뒤흔든 기술로 증기기관, 철도, 전기, 전화, 자동차, 컴퓨터, 인터넷 등을 꼽는다. 그리고 앞으로 인류를 뒤흔들 거라 예측하는 기술과 산업에 투자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 가슴이 두근거린다면, 어쩌면 당신도 ‘기술’이란 종교에 빠졌는지 모른다.

개발자로 꽤 오랜 시간 살아온 덕에 종종 듣는 말이 있다. 개발자여서 좋겠다는 말이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도 만들고, 웹 애플리케이션도 만들지 않느냐고. 만들고 싶은 거 만들 수 있어서 부럽겠다고 한다. 글쎄, 마냥 그럴까.

처음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울 때보다 경험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나아지지 않은 부분이 없다. 그럼에도 공통적인 고민이 있는데, 나보다 더 나은 기술자들에 관한 부러움. 그들과 좁혀지지 않은 간극, 그래서 나는 뭘 만들고 싶은 것인가 하는 고민. 그래서 나는 어떤 기여를 하는가 하는 부끄러움. 앞으로 뭘 해야 하나 하는 막막함.

결국 똑같다. 기술은 무한하고, 발전 속도를 따라가는 것마저 벅차다. 마냥 기술만 좇아서 될 일이 아니다. 늘 사람과 함께해야 하고, 때론 기술보다 중요한 게 많이 있다. 기술자로 살아가는데도 말이다. 하물며 인류 전체를 본다면, 정말 ‘기술’이 언제나 정답일까.

기술 자체는 나쁘지 않다.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때에는 기술이 그것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앞으로는 기술이 나를 대신해 나의 목표를 결정하고 나의 삶을 통제하기가 너무나 쉬워질 것이다.

알고리즘이 인류를 지배하고, 인류는 인조인간으로 살며 서서히 멸종한다는 이제는 흔하디흔한 이야기. 언젠가 올 수 있는 미래지만, 현실은 어긋난 텍스트를 정리하고, 인간이 만든 버그에 갇혀 머리를 뜯는 기술자들이 대부분이다.

기술을 모르는 학자들이 떠드는 미래에 관한 수혜자는 결국 그 학자들이 아닐까. 마케팅 용어를 만들어내고,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고 떠드는 중 결국 그 떠드는 일자리만 생겨난 게 현실 아닌가.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너무도 식상해져버린 비관적인 예측 뒤에 나오는 건, 더 비관적인 예측뿐이다. 모두가 우울함에 빠져서 기술 발전을 막는 게 결국 그들의 해답인가 싶다.

태양이 뜬 낮에도, 네온사인이 켜진 밤에도 왠지 모르게 어두운 거리가 있다. 마치 우리 시대가 그런 거리와 같이 보인다. 그런 거리에서도 누군가는 밝은 얼굴로 힘차게 걷는다. 그들이야말로 기술을 모르는 이들이 말하는 그 ‘기술’을 발전시키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두드리는 종교와 기술이라는 또 다른 종교를 두고, 스스로의 길을 걷는 사람들 말이다. 결국 인류에 관한 해답을 찾는 건, 그들이 아닐까.

그래도 결국, 인간 세상

마치 당장 인류가 멸망하리라 말한다. 마치 당장 내년이 되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 말한다. 아니, 마치 당장 내일, 아니 오늘. 새로운 오늘이 될 거라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지구가 멸망할 거라 말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유발 하라리의 이야기 속 논리는 꽤 단단해서 숨을 쉬지 못하게 한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도 인상을 쓰게 하고, 아무런 것도 떠오르지 않는데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렇게 한 장, 두 장 읽다 보면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들어간다.

사피엔스로 과거를 쑤시더니, 21세기 제언으로 미래를 논했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인 호모데우스를 아직 읽지 않은 게 아쉬울 정도다.

나는 올해 ‘루틴’에 빠져, 나를 발전시키기 위한 많은 장치를 만들었다. 운동을 하고, 부족한 공부를 하기 위해 삶을 빼곡히 채웠다. 부족함 투성이인 내가 부족함을 채우려면 부족함을 수치화할 필요가 있었다. 스스로 발가벗겨진 상태로 추운 겨울 집 밖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사상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누릴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늘 환자 신세가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 몸 어딘가에는 늘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항상 무언가 개선될 것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늘 부족함을 봤고, 그래서 늘 불안했다. 사자가 밀림의 왕인 이유는 밀림 한가운데서 낮잠을 잘 수 있기 때문이라더라. 사지 멀쩡한 내가 늘 불안에 떨며 뜬눈으로 밤 지새우는 이유는 결국 내가 약해서겠다.

조급해졌다. 어느새 주니어를 벗어나 시니어를 향해 다가가는 커리어. 누구도 내게 무거운 짐을 주지 않았지만, 기술을 모르는 학자가 기술을 우려하듯, 미래를 모르는 내가 미래를 우려했다. 마치 그들의 말처럼,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식이었다.

어떤 주제를 깊이 파고들고 싶다면 그만큼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특히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특권이 필요하다. 비생산적인 경로도 실험해보고, 막다른 길도 탐색해보고, 의심과 심심풀이의 여지도 둬야 하고, 작은 통찰의 씨앗이 서서히 자라서 꽃을 피우게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면 결코 진실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뭐라도 했지만, 뭐든 생각처럼 되지 않더라. 최소 2년. 내가 계획하고 성과를 바랐던 시기의 2년 뒤쯤. 정말 작은 것이 돌아왔다. 누군가는 나를 두고 많은 것을 가졌다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일까. 지금 내가 원하는 건 2년 뒤에나 가질 수 있을 텐데.

그렇게 2년이 흐른 뒤에야 손에 쥔 작은 것을 보며, 이제는 또 다른 것을 원하며 달리는 내 다리를 보며, 그보다 더 멀리 또 다른 것을 고민하는 내 머리를 보며. 그런데 쟤는 왜 나보다 더 가졌나 쳐다보는 내 눈을 보며. 내 영혼이 온전히 머무는 곳이 있기나 한지 스스로 고민하는 내 영혼을 보며.

각자의 세상도 온전히 다루지 못하면서, 더 큰 우주를 바라보는 이들과 나는 도대체 뭐가 다른지 혼란스러울 뿐이다.

마무리

어둠 속에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눈이 적응해 조금 흐릿하게 보이곤 한다. 그 찰나의 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견뎌보지도 않고 어둠을 논하는 건 꽤 어리석지 않을까.

그저 텍스트로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휘젓고, 내 머릿속을 마저 마구 휘저은 유발 하라리의 논리에 다시 한번 놀라움을 표한다. 할 수만 있다면, 유발 하라리에게 나에 관한 21가지 제언을 올려보라고 하고 싶다. 그는 과연 내 21가지 문제를 어떻게 고를까.

21가지 제언을 위해서 하라리는 인류의 수많은 정보를 수집해 읽고, 엮고, 그 정보 속에 살았을 것이다. 나에 관한 21가지 제언을 쓴다 해도 하라리는 똑같이 하지 않을까?

하라리에게 부탁할 수 없으니, 나 스스로 내게 21가지 제언을 해야 할 테다. 나 역시 그처럼 나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읽고, 엮고, 그 정보 속에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이라면, 내가 바랐지만 아직 얻지 못한 것들, 여전히 그것을 위해 움직이는 내 이야기 역시 무의미하진 않겠다.

내가 어디에 취했었든, 내가 어디에 취해있든. 어쨌든 나란 사람은 내 세상에 살 테니 말이다.

읽게 된 동기

스튜 독서소모임 지정도서

한줄평

유발 하라리가 되어 내게 쓸 차례다. 21가지 제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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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김영사

인상 깊은 문구

  • 하찮은 정보들이 범람하는 세상에서는 명료성이 힘이다.
  • 진부한 말이지만 모든 사적인 것은 정치적이다.
  • 인간은 사실 숫자, 방정식보다는 이야기 안에서 생각한다. 이야기는 단순할수록 좋다. 모든 사람, 민족은 자기 나름의 이야기와 신화가 있다.
  • 어떤 이들은 옛날의 계층화된 세상을 다시 그리워하게 되었고, 이제와서 인종적, 민족적, 젠더적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또다른 이들은(옳든 그르든) 자유화와 세계화라는 것이 결국에는 대중을 제물로 소수 엘리트에게 힘을 건넨 거대 사기라고 결론 내렸다.
  • 우리는 뇌를 설계하고 삶을 연장하고 우리의 생각도 임의로 죽이는 법까지 터득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은 언제나 도구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보다 발명하는 데 훨씬 뛰어났다. 강 상류에 댐을 지어 흐름을 조작하는 것은, 그것이 더 넓은 생태계에는 어떤 복잡한 결과를 초래할지 예측하는 것보다 더 쉽다.
  • 초자본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도 자유의 보호에는 최소한 어떤 식으로든 정부의 복지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굶는 아이에게 자유는 없다.
  • 그런 과두제 아래 살다보면 늘 이런저런 위기가 국민 의료나 공해 같은 따분한 문제보다 우선한다. 국가가 외부 침략이나 끔찍한 전복 사고에 직면했다는데 누가 과밀 병원과 강물 오염에 대해 걱정할 시간이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끝없는 위기의 흐름을 만들어냄으로써 부패한 과두제는 지배를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
  • 우리에게 남겨진 과업은 세계를 위한 갱신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산업혁명의 격동이 20세기의 참신한 이데올로기를 낳은 것처럼, 다가오는 생명기술과 정보기술 혁명을 맞이해서도 새로운 청사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인간에게는 두 가지 유형의 능력이 있다. 육체적 능력과 인지적 능력이다. 과거 기계가 인간과 경쟁한 것은 주로 순수 육체적 능력에서였다. 반면에 인간은 인지력에서 기계보다 월등하게 유리했다. 그 결과, 농업과 산업 분야의 수작업은 모두 자동화되었지만, 인간에게만 있는 인지적 기술이 필요한 새로운 서비스직들이 생겨났다. 인간만의 인지적 기술이란 학습과 분석, 의사소통, 무엇보다 인간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렇지만 AI는 이제 이런 기술에서도 점점 인간을 추월하고 있다.
  • 그 결과 음식부터 배우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 어떤 신비로운 자유 의지가 아니라 아주 짧은 순간에 확률을 계산하는 수십억 개의 뉴런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인간의 직관’이라고 과시해온 것이 사실은 ‘패턴 인식’으로 드러난 것이다.
  • 보행자의 의도를 예측하는 운전사, 잠재적 대출자의 신용을 평가하는 은행원, 협상 테이블에서 분위기를 감지하는 변호사는 마법에 의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뇌는 상대의 얼굴 표정과 음성의 높낮이, 손의 움직임, 심지어 체취까지 분석하는 방법으로 생화학적 패턴을 파악한다. AI가 적절한 센서만 갖춘다면 인간보다 훨씬 더 정확하면서도 믿을 만하게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 AI가 보유한 비인간 능력 중에 특별히 중요한 두 가지는 연결성과 업데이트 가능성이다.
  • 미국 연방 고속도로교통안전국이 2012년에 낸 통계에 따르면, 미국 내 교통사고 사망 사건의 31퍼센트가 과음, 30퍼센트가 과속, 21퍼센트가 운전자 주의 분산 때문이었다. 자율주행 차량은 이런 일을 절대 일으키지 않는다.
  • 따라서 단지 사람의 일자리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교통과 의료 같은 분야의 자동화를 막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보호해야 할 궁극의 목표는 사람이지 일자리가 아니다. 남아도는 운전사와 의사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좁은 범위의 규격화된 활동이 전문인 일은 자동화될 것이다. 하지만 넓은 범위의 기술들을 동시에 구사하고, 뜻밖의 상황에도 대처해야 하는 유동적인 일에서는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기란 훨씬 어려울 것이다.
  • 모든 형식의 예술 중에서도 특히 음악이 빅데이터 분석에 가장 취약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입력과 산출을 정확히 수학적으로 서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입력은 음파의 수학적 패턴이고 산출은 신경(에서 일어나는) 폭풍의 전기화학적 패턴이다.
  • 결과적으로, 인간 일자리가 많이 생긴다 해도 새로운 ‘무용’ 계급의 부상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두 세계의 최악을 함께 겪을 수도 있다. 높은 실업률과 숙련 노동력의 부족이 동시에 닥치는 것이다.
  • 수 세기 동안 체스는 인간 지능의 더없는 자랑거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알파제로는 완전 무지 상태에서 네 시간 만에 창의적 완숙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지도하며 준 도움도 전혀 없었다.
  •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인류의 상당한 비중이 고용 시장에서 밀려난다면 일-이후 사회와 일-이후 경제, 일-이후 정치를 위한 새로운 모델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그 첫걸음은 우리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정치적 모델이 앞으로 직면할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기에는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 사람들은 이제 웹페이지를 디자인할 때 어떤 사람의 취향보다 구글 검색 알고리즘을 취향에 더 신경을 쓴다.
  • 점점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한 가지 새로운 모델은 보편기본소득제(UBI)다. UBI는 정부가 알고리즘과 로봇을 지배하는 억만장자들과 기업들에 세금을 물려서 그 돈을 모든 개인에게 기본 필요를 충당할 만큼의 급료를 제공하는 데 사용하고자 제안한다. 이것이 빈곤층에는 실직과 경제적 혼란에 대비한 완충 역할을 할 테고, 덕분에 부유층은 포퓰리즘에 의한 대중의 격분으로부터 보호받을 거라는 구상이다.
  • 보편 기본 소득(자본주의 낙원)을 제공하느냐, 보편 기본 서비스(공산주의 낙원)를 제공하느냐. 어느 쪽이 나을지는 논쟁적인 주제다. 양쪽 다 장단점이 있다. 하지만 어떤 낙원을 택하든 진짜 문제는 ‘보편’과 ‘기본’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정의 내리는 데 있다.
  •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을 위해서만 설계되지는 않았다. 인간의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는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지만 기대는 조건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의 조건도 포함된다. 상황이 좋아지면 기대도 높아지며, 그 결과 여건이 극적으로 좋아진 후에도 이전처럼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 이스라엘에서 행해진 실험이 일-이후 세계에서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으로는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초정통파 유대교 남성의 약 50퍼센트가 일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종교 의식을 수행하는 데 삶을 바친다. 그들과 가족들이 굶어 죽지 않는 비결은 흔히 부인들이 일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에 부족함이 없도록 정부가 보조금과 무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야 말로 ‘그런 말이 생기기도 전’의 보편 기본 지원이다.
  • 열악한 환경 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로 가득한 대형 직물공장보다, 남성들이 함께 모여 탈무드를 공부하는 작은 방에서 더 큰 즐거움과 참여감과 통찰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를 묻는 조사에서 이스라엘이 상위권에 오르는 이유도 부분적으로 이런 무직의 가난한 사람들이 점수를 올려주기 때문이다.
  • 국민투표와 선거는 언제나 인간의 느낌에 관한 것이지 이성적 판단에 관한 것이 아니다. 만약 민주주의가 이성적인 의사 결정의 문제라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혹은 그 어떤 투표권을 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박식하고 이성적이라는 증거는 충분하다. 경제나 정치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에 관한 한 확실히 그렇다.
  • 좋든 나쁘든, 선거와 국민투표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게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묻는 것이다. 느낌에 관한 한 아인슈타인과 도킨스도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게 없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느낌이 신비롭고 심오한 ‘자유 의지’를 반영하고, 이 ‘자유 의지’가 권위의 궁극적인 원천이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더라도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자유롭다고 가정한다.
  • 우리는 대체로 감정이 사실은 계산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계산의 과정이 자각의 문턱 훨씬 아래에서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존과 재생산의 확률을 계산하고 있는 뇌속의 수백만 개 뉴런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뱀에 대한 공포나 성관계 상대의 선택 혹은 유럽연합에 관한 의견이 어떤 신비한 ‘자유의지’의 결과라고 착각한다.
  • 우리는 지금 엄청난 두 가지 혁명이 합쳐지는 지점에 와 있다. 한편으로는 생물학자들이 인간 신체, 특히 인간의 뇌와 감정의 신비를 해독하고 있다. 동시에 컴퓨터 과학자들은 우리에게 유례엇ㅂ는 데이터 처리 능력을 선사하고 있다. 생명기술 혁명과 정보기술 혁명이 합쳐지면 빅데이터 알고리즘을 만들어낼 것이고, 그것은 내 감정을 나보다 훨씬 더 잘 모니터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 권위는 아마도 인간에게서 컴퓨터로 이동할 것이다.
  • 사람들은 사상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누릴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 대문에 그들은 늘 환자 신세가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 몸 어딘게에는 늘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항상 무언가 개선될 것이 있게 마련이다.
  • 이제 수십억 명이 의미 있고 믿을 만한 정보를 찾을 때 구글 검색 알고리즘을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로 신뢰하게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정보를 검색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구글한다’. 우리가 어떤 답을 찾을 때 구글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짐에 따라 우리 자신의 정보 검색 능력은 갈수록 감퇴한다. 오늘날 이미 ‘진실’은 구글 검색의 최상위 결과와 동의어다.
  • 무엇을 공부할지, 어디에서 일할지, 누구와 결혼할지를 선택할 때도 AI에 기대기 시작하면 인간의 삶은 더 이상 의사 결정의 드라마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 테슬라가 생산하는 자율주행 차량은 두 가지 모델이 될 것이다. 바로, 테슬라 박애주의자와 테슬라 에고이스트다. 긴급 상황에서 박애주의자는 더 큰 선을 위해 주인을 희생시키는 반면, 에고이스트는 주인을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테슬라 에고이스트를 사는 사람이 더 많다고 테슬라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고객은 언제나 옳을 테니까.
  • AI 덕분에 막대한 양의 정보를 중앙에서 모두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AI는 중앙 집중 체계의 효율을 분산 체계보다 훨씬 높일 수 있는데, 기계 학습은 분석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을수록 성능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 경제 시스템은 나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늘리고 다변화하는 쪽으로 나를 내모는 반면, 나의 연민을 확장하고 다변화할 동기는 조금도 부여하지 않는다. 나는 증권거래소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고통의 깊은 원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가축화한 다른 동물과 비슷하다.
  • AI가 부상하면서 인간 대다수의 경제적 가치와 정치적 힘이 소멸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생명기술이 발전하면서 경제 불평등을 생물학적 불평등으로 전환하는 일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 동포가 수백만이고 공산당 동지가 수백만에 이른다 해도 그들은 한 사람의 진짜 형제자매나 친구와 같이 따뜻한 친밀감은 줄 수 없다. 그 결과 오늘날 사람들은 더없이 잘 연결된 지구상에서 더없이 외롭게 살고 있다.
  • 물리적 공동체에는 가상 공동체가 따라갈 수 없는 깊이가 있다.
  • 진정한 혁명에는 언젠가는 희생이 필요한데, 이것을 기업과 고용자, 주주 들이 감수할 리 없다. 그래서 혁명가는 늘 교회와 정당과 군을 구축한다.
  • 이슬람의 진정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두고 벌어진 열띤 논쟁은 한마디로 무의미하다. 이슬람교에는 고정된 DNA가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무슬림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 전쟁은 상업보다 훨씬 더 빠르게 사상과 기술과 사람을 확산시킨다.
  • 오늘날에는 단일한 정치 패러다임이 어디에서나 받아들여진다. 지구는 약 200개의 주권 국가들로 나뉘었지만, 이들은 일반적으로 동일한 외교 의례와 공통의 국제법에 의견을 같이한다.
  • 오늘날 인류가 동질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면은 자연 세계와 인간의 몸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다른 종교와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국가, 경제, 병원, 폭탄을 만드는 법)에 관한 한 거의 모두가 동일한 문명에 속한다.
  • 스웨덴과 독일, 스위스 같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자유주의 국가들은 모두 민족주의 감정도 강하다. 민족적 유대감이 부족한 나라의 목록을 보면 아프가니스탄과 소말리아, 콩고, 그리고 다른 실패한 국가들 대부분이 들어가 있다.
  • 과학은 기술적 질문에는 우리에게 명확한 답을 제시하는 데 반해, 정책 질문에는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상당 의견 불일치가 있다. 가령, 지구온난화가 사실이라는 데에는 거의 모든 과학자들이 동의하지만, 무엇이 최선의 경제적 대응인지를 두고서는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
  • 시아파의 이란이나, 수니파의 사우디아라비아나, 유대교의 이스라엘이나, 힌두교의 인도나, 기독교의 미국이나 경제 정책에 관한 한 큰 차이가 없다.
  • 미국 복음주의 교회 목사들은 ‘지옥 불’ 설교에 환경 규제에 반대하는 주장을 담는가 하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구온난화를 비판하는 운동을 이끌고 있다.
  • 견해 차이의 진정한 원천은 근대 과학 이론과 정치 운동에 있지, 성경에 있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는 우리 시대의 거대한 정책 논쟁에 기여하는 바가 사실상 별로 없다. 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했듯 종교는 겉치장일 뿐이다.
  • 21세기의 종교는 비를 내리게도 못하고, 병 치료도 못하고, 폭탄도 못 만들지만, ‘우리’가 누구이며 ‘그들’은 누구인지, 누구를 치료해야 하고 누구에게 폭탄을 투척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 일본은 고유 종교인 신도를 일본 정체성의 초석으로 고수했다. 사실 신도를 재발명했다. 전통 신도는 다양한 정령과 신령, 귀신에 대한 믿음이 뒤섞인 애니미즘 신앙이었다. 모든 마을과 신사가 자기만의 정령과 지역 관습을 갖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일본은 국가 공인 신도를 만들면서 수많은 지역 전통들을 억압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 신도’에는 민족성과 인종이라는 대단히 근대적인 사상이 주입됐다. 일본 엘리트들이 유럽 제국주의에서 따온 요소였다.
  • 이민 협상을 평가할 때 양측 모두 상대편의 의무 준수보다 위반 사례에 훨씬 큰 무게를 둔다. 만약 이민자 100만 명은 준법 시민인데 100명이 테러 집단에 가입해서 수용국을 공격한다면, 이는 크게 봐서 이민자들이 협상 조건을 준수한 것일까, 위반한 것일까?
  • 이미 굳은 선입견을 피하기 위해 두 허구의 나라를 상상해보자. 이름을 ‘냉대국’과 ‘온화국’이라고 하자. 이 두 나라는 문화적으로 차이가 큰데, 그중에는 인간관계와 개인 간의 갈등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도 있다. 냉대국 사람은 유아기부터 학교나 직장, 심지어 가정에서도 누군가와 갈등이 생기면 감정을 누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배운다. 고함을 지르거나 화를 내거나 상대가 맞서는 것은 피해야 한다.
  • 반면, 온화국은 유아기부터 갈등은 밖으로 드러내도록 교육받는다. 분쟁에 휘말리면 속만 끓이거나 억누르지 말라. 처음부터 감정을 밖으로 발산해라. 화를 내고 고함을 치고 상대에게 자신의 기분을 정확히 말해주는 것이 좋다.
  • 온화국 사람은 직장 동료와 갈등이 생길 때마다 탁자를 치고 고성을 지른다. 그렇게 하면 문제에 집중해서 그것을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다. 몇 년이 지나 승진 기회가 생긴다. 온화국 사람은 승진에 필요한 자격을 다 갖췄다고 해도 상관은 냉대국 지원을 선호한다.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네, 온화국에서 온 그 사람은 장점이 많긴 해요. 하지만 인간관계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다혈질인 데다 주변에 불필요한 긴장감을 유발하고 우리 회사 문화를 해칩니다.”
  • 냉대국 사람이 온화국으로 이민 갔을 때도 거의 같은 일이 일어난다. 냉대국 사람은 온화국 기업에서 일을 시작하자마자 잘난 체하는 속물이라거나 냉혈한이라는 평판을 얻는다. 친구도 잘 못 사귄다. 사람들은 그가 신의가 없는 데다 사교술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상급자로 승진도 못한다. 기업 문화를 바꿀 기회도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 사람들은 전통적인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영웅적인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사이 전쟁터가 이동했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결과 전통적인 인종주의는 줄어들고 있는 반면, 오날날 세계는 ‘문화주의자들’로 가득하다.
  • 우리는 이민을 둘러싼 유럽의 논쟁이 명확한 선악의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민 논쟁은 어떤 협상 불가능한 도덕적 명령에 관한 비타협적 투쟁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두 가지 정당한 정치적 입장 사이의 토론일 뿐이며, 표준적인 민주 절차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
  • 테러범들은 2001년 9월 11일 이래 매년 유럽에서 약 50명, 미국에서 약 10명, 중국에서 약 7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지구촌을 합치면 사망자는 2만 5,000명에 이른다. 반면 교통사고로 숨지는 사람은 매년 유럽에서 약 8만 명, 미국에서 4만 명, 중국에서 27만 명 등으로 모두 합치면 125만 명 가까이 된다. 당뇨병이나 높은 혈당 수치 때문에 숨지는 사람도 연간 350만 명이나 되고,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망자도 연 700만 명에 이른다.
  • 테러범은 도자기 가게를 부수려는 파리를 닮았다. 파리는 너무나 미약해서 찻잔 하나도 혼자서 움직일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파리 한 마리가 도자기 가게를 부술까? 파리는 먼저 황소를 찾아낸 다음 귓속으로 들어가서 윙윙대기 시작한다. 황소는 두려움과 분노로 미쳐 날뛰면서 도자기 가게를 부순다.
  • 프랑스에서는 공식 집계에 따르면 매년 1만 건 이상의 강간 사건이 일어난다. 신고되지 않는 사건도 수만 건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강간범과 폭력 남편을 프랑스 국가의 실존적 위협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역사적으로 국가는 성폭력을 근절하겠다는 약속 위에 건설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테러는 훨씬 드문 사례라 해도 프랑스 공화국에 치명적인 휘협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근대 서방 국가는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국경 내 정치 폭력은 불허하겠다는 명시적 약속 위에 정당성을 확립해왔기 때문이다.
  • 오늘날 과학자들은 도덕성이 사실은 진화 과정에서 나왔으며, 그 뿌리는 인류가 출현하기 전 수백만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지적한다.
  • 지난 200년 동안 중요한 유대인 과학자들은 대부분 유대교의 종교적 권역 바깥에서 활동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예시바를 뒤로하고 연구소를 택한 후에야 비로소 과학에 놀랄 만한 기여를 하기 시작했다.
  • 나는 개인적으로 존재의 신비에 관해 늘 궁금해해왔다. 하지만 그것이 유대교와 기독교, 힌두교의 성가신 법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모든 동물들보다 경쟁에서 우위를 보이고 마침내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 개인의 합리성이 아니라 대규모로 함께 사고할 수 있는 전례 없는 능력 덕분이었다.
  • 집단사고에 의존한 덕분에 우리는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고, 지식의 착각 덕분에 스스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남들의 지식을 신뢰한 것이야 말로 호모 사피엔스에게 대단히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 어떤 주제를 깊이 파고들고 싶다면 그만큼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특히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특권이 필요하다. 비생산적인 경로도 실험해보고, 막다른 길도 탐색해보고, 의심과 심심풀이의 여지도 둬야 하고, 작은 통찰의 씨앗이 서서히 자라서 꽃을 피우게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을 나입할 수 없다면 결코 진실도 찾을 수 없다.
  • 글로벌 이슈를 논할 때 나는 늘 다양한 소외 집단들보다 글로벌 엘리트들의 관점을 우선시하는 위험에 빠진다. 글로벌 엘리트들은 대화를 주도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관점은 놓칠 수가 없다. 반면에 소외된 집단들은 대개 말이 없다. 그러다보면 그들의 존재마저 잊기 쉽다. 이 모든 게 고의적인 악의가 아니라 순전한 무지에서 생기는 일이다.
  • 설사 세계가 당면한 주요 도덕적 문제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어도 우리 대부분은 더 이상 그럴 능력이 없다. 사람들은 수렵, 채집인 두 명이나 스무 명 사이, 혹은 두 이웃 씨족 사이의 관계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수백만 시리아인이나 5억 명의 유럽인, 혹은 지구상의 모든 교차 집단과 하위집단 간의 관계를 이해할 능력은 없다.
  • 1,000명의 사람이 어떤 조작된 이야기를 한 달 동안 믿으면 그것은 가짜 뉴스다. 반면에 10억 명의 사람이 1,000년 동안 믿으면 그것은 종교다.
  • 아담과 이브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지만 그래도 샤르트르 대성당은 여전히 아름답다. 성경은 상당 부분이 허구일지 몰라도 여전히 수십억 신도에게 기쁨을 줄 수 있고, 사람들에게 연민과 용기와 창의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 사람들은 상자 안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이미 자신들이 상자(자신의 뇌) 안에 갇혀 있으며, 그 상자는 다시 더 큰 상자(무수히 많은 기능을 갖춘 인간 사회)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 많은 교육 전문가들은 학교의 교육 내용을 ‘4C’, 즉 비판적 사고, 의사소통, 협력, 창의성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학교는 기술적 기량의 교육 비중을 낮추고 종합적인 목적의 삶의 기술을 강조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것을 학습하며, 낯선 상황에서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일 것이다.
  • 기술 자체는 나쁘지 않다.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때에는 기술이 그것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앞으로는 기술이 나를 대신해 나의 목표를 결정하고 나의 삶을 통제하기가 너무나 쉬워질 것이다.
  • 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이야기는 두 가지 조건만 충족시키면 된다. 첫째, 내가 맡을 어떤 역할을 부여해야만 한다. 둘째, 좋은 이야기는 무한정 확장될 필요는 없지만 지금 나의 지평은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 어느 현명한 노인에게 인생의 의미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지상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는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소.” 어떤 미래 유산이나 집단 서사 같은 거대 사슬의 서사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가장 안전하면서 가성비 높은 이야기는 아마도 로맨스일 것이다.
  • 대부분의 이야기는 기초가 튼튼해서라기보다는 지붕의 무게 덕분에 탈 없이 유지된다.
  • 근대 서구에서는 유교가 의식에 집착한 것을 두고 흔히 인간에 대한 얕은 이해와 의고주의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공자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어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을 깊이 꿰뚫어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 문화(중국을 필두로 이웃 나라인 한국과 베트남, 일본)에서 극도로 수명이 긴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 자기희생은 극단적인 설득의 행동이다. 이것은 비단 순교자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켜보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 안식일은 금요일 일몰때 시작해서 토요일 일몰 때까지 지속된다. 그 사이에 정통파 유대교도는 거의 모든 종류의 일을 금한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끊는 것까지 삼간다. 이 문제를 두고 가장 박식한 랍비들이 논의를 벌인 끝에 화장실 휴지를 끊는 것도 안식일 금기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고, 그 결과 안식일에 밑을 닦고 싶은 신실한 유대교도는 미리 분절돼 나오는 휴지 주머니를 사전에 준비해둬야 했다.
  • 오늘날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도 단지 무슬림으로만 혹은 이탈리아인으로만 혹은 자본가로만 살아가지 않는다.
  • 악의 문제는 악이 실제 삶 속에서는 반드시 추악하지 않다는데 있다. 악은 사실 대단히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 IS 조직원들도 실제로는 순교하면 천국에 간다고 믿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니 그들이 폭격을 맞아 살해됐을 때 분노하는 것 아닌가?
  • 빨간 사과를 먹음직스럽게 만드는 것도, 똥 덩어리를 역겹게 만드는 것도 오로지 인간의 느낌이다. 인간의 느낌을 제거하면 남는 것은 분자 다발뿐이다.
  • 다른 모든 우주의 이야기처럼, 자유주의 이야기 역시 서사의 창조와 함께 시작된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창조는 매 순간 일어나며 창조자는 나 자신이다.
  • 부처는 우주의 세 가지 기본 현실을 설파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며, 지속적인 본질이란 없으며,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도 없다.
  • 부처에 따르면, 생에는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어떤 의미를 만들 필요도 없다.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집착과 공허한 현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하는 고통에서 해방되면 된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람들의 물음에 부처는 이렇게 조언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절대로 아무것도.”
  • 우리 인간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허구적 이야기를 만들고 믿는 능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특히 우리는 허구와 실체의 차이를 아는데 서툴다.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에게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만약 그럼에도 차이를 알고 싶어 한다면 시작점은 고통이다.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것은 고통이다.
  •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했을 때, 나는 이곳이야말로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망스러웠다. 학문 세계는 내게 지금까지 인간이 만든 모든 신화를 해체하는 도구들을 제공했지만, 인생의 큰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점점 더 좁은 질문에 초점을 맞추라고 권장했다. 결국 나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중세 병사들의 자전적 기록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 인생의 큰 질문을 할 때, 사람들은 보통 콧속으로 숨이 언제 들어오고 나가는지 아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자기가 죽고 난 후에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인생의 진정한 수수께끼는 내가 죽고 난 뒤가 아니라, 죽기 전에 생기는 것이다. 죽음을 이해하고 싶다면 삶을 이해해야 한다.
  • 최선을 다해 노력했음에도 내 숨이 콧속을 드나드는 것의 실체를 관찰하다 보면 10초도 지나지 않아 정신은 흩어져서 방황했다. 수년 동안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며 나라는 개인 브랜드의 CEO라는 인상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몇 시간 명상만으로도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충분했다.
  • 위빳사나의 기술은 정신의 흐름이 몸의 감각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통찰에 기반을 둔다.
  • 내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고통의 가장 깊은 원천은 나 자신의 정신 패턴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무너가를 바라는데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 때, 내 정신은 고통을 일으키는 것으로 반응한다.
  • 괴로움의 본질은 실체의 거부입니다. 당신은 어떤 것(고통이든 쾌락이든)을 경험하면서 그 밖의 것을 바랍니다. 고통을 경험할 때에는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 어떤 식으로든 ‘책의 경험’을 유지하는 것, 그러니까 140자 트윗이나 유튜브의 1분짜리 재미있는 고양이 동영상 같은 것들을 스치듯 훑고 다니는 게 아니라, 한 주제를 깊이 탐구하는 데 여러 시간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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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