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다는 말로 서평을 시작한다. 좋은 주제, 좋은 접근이 좁은 시야와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어떤 문제도 단순히 감정을 내세워 해결될 수는 없다.

여기에 사상을 더했다. 다양한 해법이 있을 터인데, 어째서 한 방향으로 결론 짓는지 모르겠다. 정해진 답을 향해 문제를 만들고, 풀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훌륭한 문제 제기

책은 훌륭한 문제 제기로 시작한다. 나는 매일 아침 30분씩 이 책을 읽었고, 5시간 만에 책을 다 읽었다. 보름 정도 걸린 셈이다.

5시간 만에 현 가족공동체의 단점과 아쉬운 정부 정책, 선진국 사례와 소외된 계층에 관해 빠르게 인식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저자 기본 커리어인 ‘기자’가 어떤 능력치를 갖는지 알 수 있었다.

“상처받음, 무서움, 속상함, 겁이 남, 외로움, 슬픔, 성남, 버려진 것 같음, 무시당함, 화남, 혐오스러움, 끔찍함, 창피함, 비참함, 충격받음.” ‘체벌’에 대한 아이들의 기억이다. 영국 세이브더칠드런이 2001년에 아이들이 맞았던 경험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정리한 기록이다.

난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체벌을 받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손을 든 적이 없으며, 내 실수에 몇 차례 나무란 것을 제외하곤 큰소리를 친 적도 손에 꼽는다. 때문에 나는 체벌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 논리라면 나는 어머니에게 체벌을 당했다고 볼 수 있다. 몇 차례 회초리를 맞은 기억이 있다. 전혀 괴로운 기억이 아닌 내게 저자 주장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그런데 저자는 체벌도 ‘학대’라고 한다. 때문에 일단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가 조사한 다양한 자료를 통해 ‘체벌’이라는 게 굉장히 넓은 범위를 말한다는 것, 그리고 적어도 나는 더 나은 방법으로 육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곳곳에서 내 배경지식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도 있었다. 혼외출산을 장려해야 한다느니, 해외 입양 자체를 부정하는 등 좀 더 정보가 있어야 고개를 끄덕일 만한 큰 덩어리도 나왔다.

그럼에도 저자가 제기한 ▲가정폭력 ▲친권 ▲미혼모 등 문제를 인식하는 데는 탁월한 글이었다. 한 번쯤 이 문제에 관해 생각하고, 더 나은 방안은 없을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했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문제 제기를 왜 이렇게 풀었을까?

길을 잃은 문제…방향은 사상으로

어떤 문제에 관한 정답은 학교에서나 찾을 수 있다. 어떤 정답에 관한 문제를 찾고, 그 문제에 관한 대안을 제시하고, 그 대안에 관한 문제를 찾으며 인류는 발전해왔다.

어떤 문제에 관한 정답 따위는 없다. 정답이 있었다면 인류사에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인류는 늘 선택을 했고, 승자는 선택을 정답을 만들기 위한 승자독식 사회를 만들어왔다. 어떤 문제에 관한 정답은 없다. 선택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저자는 정답을 강요한다. 그동안 문제 제기가 마치 개인의 정답을 논하기 위함으로 보일 정도다.

사회학자 김혜영은 이를 가족을 통한 국가의 통치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경제발전과정에 노동력, 특히 값싼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했던 국가는 핵가족을 찬양하면서 농촌 자녀의 도시 이주를 장려하고 여성의 노동시장 유입, 산아제한을 골자로 한 가족계획을 장려했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진전으로 농촌의 공동화 및 노령화가 문제가 되고 노인 부양의 필요가 제기되자 이번에는 핵가족을 비판하고 전통적 가족 부양의 윤리를 찬양했던 것이다.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저자는 모든 문제를 정치와 엮는다. 저자가 주장하는 정답은 ‘큰 정부’다. 대부분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줘야 한다는 논리다.

저자가 말한 ▲가정폭력 ▲친권 ▲미혼모 등 문제를 꼭 큰 정부로 풀어야만 할까?

이런 저자의 주장이 무섭기까지 한 점은 큰 정부라는 선택을 논하기까지 현재가 갖는 장점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점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진행돼야 하는 것은 ‘문제 파악’이다. 이 문제 파악에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만 논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프로그래밍 세계에서 상용 소프트웨어 문제를 해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른 문제 해결도 아니오, 정확한 문제 해결도 아니다. 기존 정상 기능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문제 A를 해결하겠다고, 문제없던 B, C, D를 문제로 만드는 게 주니어 개발자가 흔히 하는 실수다.

저자는 ▲가정폭력 ▲친권 ▲미혼모 등 문제 해결을 위해 기존 정상 기능을 부숴버리려 한다. 과연 현재 구조가 무조건 나쁜 것만 있을까? 현재 구조를 없앴을 경우 또다시 누군가는 소외될 가능성은 없을까? 왜 그런 언급은 없을까?

2017년 12월 국회가 이듬해 9월부터 소득 하위 90%의 만 0~5세를 대상으로 월 10만 원 아동수당을 선별 지급하기로 합의한 내용에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동수당을 선별 지급하면 수당을 받지 못하는 소득 상위 10%를 걸러내는 데 들어갈 행정 비용과 사회적 갈등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제도의 근본 취지도 심각하게 훼손된다.

아동수당을 모든 아이들에게 지급하고 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더 걷으면 될 일을 정치적 흥정에 붙여 선별 지급하겠다는 것은 양육을 가족 책임에서 사회 책임으로 가져오자는 아동수당의 근본 취지를 저버리는 것이다.

고소득자 기준은 어떻게 정하는가? 100억 원 자산가의 소득이 0원이라면, 이는 상위 10%로 들어가지 않는가? 소득 상위 10%에게 세금을 더 걷을 경우엔 사회적 갈등이 생기지 않는가? 이번 통신비 지원 2만 원을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알 수 있다.

큰 정부에 관한 이중잣대는 본문에서도 슬쩍 드러난다. 결국 정부가 많은 것을 보장하면, 행정 비용과 이를 행하기 위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은 어디서 갑자기 떨어지는 게 아니다. 현 정부 정책처럼 기존 민간 인력을 활용하게 된다.

창업 정책 중 팁스(TIPS)가 있다. 팁스는 이스라엘에서 가져온 정책으로 민간 투자기관이 1억을 투자하면 이를 신뢰하고 정부가 총 10억에 달하는 추가 투자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즉, 민간 투자기관이 좋은 기업을 찾아야 한다. 이 정책에서 핵심은 민간 투자기관의 역량이다.

큰 정부를 논하며, 기존 기관에 관한 불신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세 미혼모가 생계를 꾸리며 검정고시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아이를 24시간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는데, 보육료가 벅차 부담이 덜한 고아원에 딸을 맡겼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죽었다.

은비 엄마는 17세에 미혼모가 되어 홀로 생계를 꾸리며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하느라 딸을 24시간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다. 보육료가 벅차 전전긍긍하던 그는 하는 수 없이 보육료 부담이 없는 고아원에 딸을 맡겼다. 은비 엄마도 본인도 외할머니에게 자랐기 때문에 딸이 시설에서 자라는 걸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주변에서 입양을 보내면 아이가 가정에서 행복하게 자랄 수 있다고 해서 은비 엄마는 입양을 결심한다. 그러나 결국 딸은 싸늘한 주검으로 엄마에게 돌아왔다.

아이가 왜 죽었는지는 본문에 없다. 소름 돋게도 저자는 아이가 죽은 이유를 사회적 지원으로 꼽는다. 고아원이 아이를 죽이는 곳인가? 고아원에 아이를 맡기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다.

사회적 지원이 있었다면 미혼모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이 대신 검정고시를 준비한 것은 미혼모의 선택이었다. 미혼모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고아원에 아이를 맡긴 것이지, 검정고시를 위해 아이를 죽인 게 아니다. 여기서 잘못은 고아원에서 아이가 죽은 것이지, 고아원에 맡길 수밖에 없도록 사회적 지원이 부족한 게 아니다.

이쯤 되니 저자 논리 핵심이 보였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저자 논리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저자 논리에는 ‘감정’이 들어있다. 17세 미혼모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국가 지원이 적어 고아원에 딸을 맡기는 이야기에 미혼모 본인이 외할머니에게 자라는 이야기가 왜 들어가는가?

그저 ‘이렇게 슬픈 이야기니, 너는 여기서 마음을 아파해야 해’라고 들린다.

보육료 부담이 적어 고아원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보육료를 더 주고 24시간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게 하는 게 큰 정부인가? 24시간 어린이집에서는 아이가 죽지 않는가? 24시간 어린이집에서도 아이가 죽으면, 아이는 어디로 보내야 할까?

만약 24시간 어린이집을 ‘아이가 죽지 않는 곳’이라 정의한다면, 보육료 부담이 없는 고아원에서도 아이가 죽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게 더 근본적인 해결책 아닌가? 사회적 지원을 더 주면, 아무도 고아원에 가지 않는가?

▲감정에 호소하는 것 ▲정해진 답을 향해 논리를 푸는 것 ▲큰 정부를 세금으로 충당하려는 것 등에서 나는 저자가 ‘기자 출신이 맞구나’ 싶었다.

저자는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18년간 동아일보 기자, 6년간 국제구호 개발단체, 문화체육관광부 차관보, 여성가족부 차관 등 커리어를 보냈다. 나는 저자 커리어 중 ‘비즈니스 경험이 없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기자는 비즈니스를 모른다. 한국에 기자 출신 손꼽히는 창업가는 없다. 현시대는 자본주의다. 자본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현시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글을 쓰고, 구호단체에서 일하고, 정책을 만들며 저자는 얼마나 비즈니스를 이해했을지 의문이 든다.

저자는 이 책을 마치 기사처럼 썼다. 기사는 한 가지 큰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저자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결국 사상이라는 것에 큰 실망감을 느꼈다.

촛불집회에서 또 하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장면은 대거 참여한 청소년들이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촛불을 든다”라는 어른들에게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한 촛불을 드는 광장에선 ‘아이’가 존중받는 시민으로 설 틈이 없다.’

많은 시민이 참여해 비폭력 시위를 지킨 것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단지 몇몇 학생이 집회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하는 건 억지다.

집회에 참여하는 시점에도 미혼모는 검정고시와 고아원 사이 고통스러운 고민을 하고 있다. 정부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이 고민 자체를 없애주는 것 아닐까?

여러 선택지가 있음에도 마치 기사처럼 자신이 정한 주제를 위한 자료를 나열하고, 명사의 이야기를 끌어오고, 심지어 주제를 위해서라면 근거 없는 트위터 글까지 나열하는 것에 환멸을 느꼈다.

자신의 주장을 위한 자료만 나열한 저자에게 저자가 적어둔 글로 서평을 마치려 한다.

사람들은 외집단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으며 내집단보다 덜 도덕적이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공감의 한계 때문에 심리학자 폴 블룸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방식의 공감력 향상보다는 되레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성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아니, 인류 역사가 지속하는 한 문제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더 열린 마음을 가져주길 바란다. 특히, 권력을 쥔 많은 정치인이 그래 주길 바란다.

한줄평 ★★☆☆☆

대의 속에 감춘 개인 사상…좁은 시야가 신념을 가지면

인상 깊은 문구

  • 아동학대의 80% 이상은 집에서 일어났다.
  •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인의 삶의 질 종합지수’에서 지난해 10년 전보다 후퇴한 유일한 항목은 ‘가족・공동체’ 영역이었다.
  •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결혼제도 안에서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을 이상적 가족의 형태로 간주하는 사회 및 문화적 구조와 사고방식을 말한다. 바깥으로는 이를 벗어난 가족 형태를 ‘비정상’이라 간주하며 차별하고, 안으로는 가부장적 위계가 가족을 지배한다.
  • 국가인권위원회의 <2016년 국민 인권의식조사>에 따르면 여전히 국민의 절반가량은 아동, 청소년을 체벌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조사에서 체벌에 찬성한 절반의 국민도 거의 다 학대에는 반대할 거라고 확신한다. 체버로가 학대 사이의 경계를 제대로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오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 아이를 훈육하기 위해 때린다는 주장은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들을 괴롭히는 항변 1순위다. 상담원들이 신고를 받고 현장 조사를 나가면 “내 자식 내가 가르치는데 웬 참견이냐”라며 상담과 조사를 거부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학대 신고를 받아도 “부모가 그 정도는 할 수 있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조사에 불성실한 경찰들도 많다.
  • 평소 체벌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극도의 양육 스트레스를 겪을 때 이 스트레스가 촉매제가 되어 학대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체벌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양육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상황에서도 학대로 치닫는 경우가 없었다. 도구를 갖고 엉덩이를 자주 때리는 부모들이 그렇지 않은 부모에 비해 학대를 할 가능성이 9배나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 “상처받음, 무서움, 속상함, 겁이 남, 외로움, 슬픔, 성남, 버려진 것 같음, 무시당함, 화남, 혐오스러움, 끔찍함, 창피함, 비참함, 충격받음.” ‘체벌’에 대한 아이들의 기억이다. 영국 세이브더칠드런이 2001년에 아이들이 맞았던 경험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정리한 기록이다.
  • 서양에서 체벌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1900년대 초반 어린이도 개별적 존재로서 인권을 갖고 있다는 자각이 시작되면서부터다.
  • 법적 구속력을 지닌 협약으로 아동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1989년 <유엔아동권리협약>이 만들어졌다.
  • 협약이 정한 체벌의 범위는 몸에 국한되지 않늗나. 협약의 이행을 감독하는 기구인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2006년 발행한 논평에서 체벌을 “아무리 정도가 가볍다 해도 물리적 폭력이 사용되고 이로 인해 어느 정도의 고통이나 불편을 야기하는 모든 벌”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는 “손이나 채찍, 막대기, 벨트, 신발, 나무주걱 등의 도구를 이용하여 아이를 때리는 것”이 포함되며 “무시하기, 창피주기, 비난하기, 책임 전가하기, 협박하기, 겁주기, 조롱하기” 등도 비신체적 체벌의 예로 제시됐다.
  • 2017년 5월 현재 가정 내 체벌을 포함하여 아이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체벌을 명백히 폭력으로 규정하고 법으로 전면 금지한 나라는 전 세계 52개에 달한다.
  • ‘글로벌 이니셔티브’의 답신을 받은 직후에는 가정 내 체벌 금지를 법에 이렇게까지 명시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우리가 자문한 변호사들 중에서도 법원이 해석을 잘하면 되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가하면 안 된다’라는 조항을 넣은 <아동복지법>이 시행된 지 2년여 동안 사회적 규범과 인식 변화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성인 간의 관계에서는 상대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행위는 이유가 무엇이든 형사적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보호와 교양 목적의 징계’라는 말로, 상대에게 의도적인 해를 끼쳐도 된다고 법이 허용하는 유일한 대상이 아이들이다.
  • 친부모라고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당시 아이가 생기지 않아 시험관 시술을 해서 세쌍둥이를 얻은 부부가 둘째를 학대로 숨지게 한 사례가 있었다. 극심한 양육스트레스로 우울증에 시달리던 엄마는 첫째와 셋째는 건강이 안 좋은데 혼자 건강한 둘째가 왠지 얄미워 자주 학대했고 결국 숨지게 만들었다. 아빠는 온라인 게임에 빠져 아이들을 방치했다.
  • 아동보호전문기관에는 중산층 가정의 학대도 종종 신고되는데 체벌과 학대의 원인은 대부분 성적이다. 아들의 학업성적이 계속 좋지 않고 말을 듣지 앟ㄴ는다는 이유로 자기가 운영하는 병원 직원을 시켜 산에 데려가 묶어놓고 때리다가 아동학대로 신고된 의사도 보았다.
  • 부모로부터 과보호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청소년일수록 낮은 자존감과 우울로 인해 무기력하고 복종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런 아이들일스록 강한 아이들의 공격 표적이 되기 쉽다. 폭력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폭력 피해자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 2013년 보건복지부의 <아동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아이들 세 명 중 한 명은 하루에 30분 이상 놀지 못했다. 절반의 아이들이 방과 후 하고 싶은 활동으로 ‘친구들과 놀기’를 꼽았지만 실제 방과 후 친구들과 노는 아이는 5.7%에 그쳤다.
  • 2015년 나와 동료들이 ‘잘 노는 우리 학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아이들과 인터뷰를 할 때 열두 살의 한 여학생은 어디서 노냐는 질문에 ‘화장실’이라고 대답했다.
  • 더 이상 ‘동반자살’ 또는 ‘일가족 집단자살’이라는 표현은 쓰지 말아야 합니다. 부득이하게 그러한 사건을 보도할 경우 언론은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뒤 자살했다”라고 써야 합니다.
  • 가족 살해자의 전형적 특징은 대체로 가족에게 헌신적이고 충실해 보였지만 친구가 별로 없고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던 중년 남성들이라고 한다.
  • 다른 사람들이, 사회가 남겨진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인간 대접을 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 근대화의 전 과정에 걸쳐 이를 불행하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 흥미로운 점은 같은 유교문화권 중 일본, 한국, 대만, 홍콩은 이러한 유형의 사건을 모두 ‘가족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며 마치 가족 구성원 전체의 자발적 결정인 양 다루지만 중국 본토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 한국과 일본에서는 ‘가족’ 윤리가 우위지만 중국에서는 ‘개인’ 윤리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 이 사건을 알리는 기자들은 죄다 ‘무정한 계모’ ‘아직도 팥쥐 엄마가’ 등의 제목으로 비정한 계모를 부각시켰다. 그런데 기사를 읽다가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는데, 계모뿐 아니라 함께 아이를 폭행한 친아버지도 같이 입건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부부가 함께 입건됐다는 것을 알리는 제목은 없었다.
  • 부모와 아이를 분리하는 것이 아이의 안전과 삶의 질을 위해 더 낫다고 판단할 때 국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제도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국가의 아동보호제도다.
  • 친권 때문에 부모와 분리된 아이들의 위탁양육만 불편한 게 아니다. 자녀를 데리고 살지만 친권이 없는 한부모도 마찬가지다. 취학통지서도 직접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병원 진료도, 여권 발급도 어렵다. 겨우 먹이고 재우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다.
  • 한국 사례는 부모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신생아 수혈을 거부하자 병원이 의료진의 수혈행위를 부모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낸 것에 대한 동부지방법원의 판결이다.
  • 법원의 결정이 나자 부모는 병원을 옮겨버렸고 결국 안타깝게도 아이는 1주일 뒤 사망했다.
  • 흔히들 해외입양이 한국전쟁 직후 오갈곳 없던 전쟁고아들을 대거 선진국으로 보낸 일이라고들 알고 있는데, 해외입양은 한국의 경제가 초고속으로 발젛나던 1980년대에 가장 많았다. 그 대다수는 미혼모의 자녀들이다.
  •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박영미 대표에 따르면 파트너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절반가량의 미혼부들이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소식을 감춘다고 한다.
  • 일자리를 얻지 못한 저소득 미혼모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어떨까. 정부는 아이(만 13세 미만)를 홀로 키우는 저소득 미혼모에게 월 12만원(엄마가 청소년일 경우 17만 원)의 양육비를 준다.
  • 2009년 유엔총회 결의를 비롯한 국제인권규범은 아이를 원래의 가정에서 분리하는 것은 모든 방법을 다 써본 뒤 가장 마지막에 선택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아이를 직접 키우는 미혼모보다 아이를 버렸을 때 그 아이를 대신 키우는 사람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하는 한국 사회는 어떤가.
  • 최근 자주 거론되는 저출산과 연계해 보아도 미혼모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일이 시급하다. 출산율이 높은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가장 특징적인 차이는 혼외출산 비율이다. 한국의 혼외출산 자녀 비율은 세계 최하위권이다. OECD에 따르면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등은 혼외출산이 전체 출산의 절반이 넘지만 한국은 1.9%(2014년)로 조사 대상 42개국 가운데 제일 낮았다.
  • 해외입양 맥락에서 한국은 희한한 나라이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줄었지만 2016년에도 해외입양된 아이는 334명으로 거의 매일 아기들이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갔다. 이만큼 발전한 나라에서 부모가 돌보지 못하게 된 300명 안팎의 아이들을 보호할 시스템조차 없어 여태 해외로 입양을 보내야만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내는 유일한 나라이다. 중앙입양원 통계에 따르면 2016년까지 한국에서 태어나 해외로 입양된 사람은 총 16만 6,512명에 이르며, 이는 같은 기간 국내입양(7만 9,088명)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 1980년대의 무분별한 해외입양 러시는 88올림픽 전후 해외 언론으로부터 ‘고아수출 세계 1위’라는 거센 질타를 받았다. 거기에 해외입양 중개기관 4곳의 수익이 연 30억 원에 이르는 등 영리 목적 입양 알선이 도마에 오르자 정부는 또 1996년부터 해외입양을 전면중단하겠다는 대책을 발표한다. 하지만 이 방침도 1994년에 백지화하고 대신 “앞으로 국외 입양을 3~5% 줄여나가겠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도 얼마안가 IMF 경제위기로 유보하고 만다.
  • 입양되는 아이들의 90% 이상은 미혼모의 자녀다.
  • <헤이그협약>은 해외입양은 ‘보충성의 원칙’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말인즉슨 부모와 떨어지게 된 아이의 경우 국내에서 가정위탁, 국내입양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보호할 방법을 찾아본 뒤 정 방법이 없거든 최후의 보충적 수단으로 해외입양을 선택하라는 뜻이다.
  • 국내의 미등록 이주아동은 대략 2만 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체류기간이 만료됐거나 외국인등록을 하지 못해 미등록 상태인 이주아동의 경우 아마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가운데 가장 열악한 처지, ‘사각지대 중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일 것이다.
  • 무수한 비판 중 일상생활에서 이주민에게 실제로 피해를 당한 경험에 근거한 주장은 찾기 어려웠다. 대개 ‘왜 내가 낸 세금으로 불법체류 아동을 돕느냐’는 논리였다. 내가 낸 세금으로 남을 돕는 사회보장제도는 비난하지 않는 자칭 ‘민주주의자’들이 미등록 이주아동의 기본권 보장에 대해서는 ‘세금이 아깝다’는 논리를 들이밀었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부모들도 한국에서 일하며 사는 이상 지역 경제의 한 부분을 맡고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금을 낸다는 것도, 간접세 비중이 50%에 육박하는 한국에서 세금을 내지 않고 생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안중에 없었다.
  •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은 근대 이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어온 현상이다. 사회심리학자 헬렌 조페의 <위험사회와 타자의 논리>에 따르면 매독이 유럽을 휩쓸던 15세기에 매독은 영국에선 ‘프랑스 두창’으로, 프랑스에선 ‘독일병’으로, 플로렌스인들에겐 ‘나폴리병’, 일본인에겐 ‘중국병’으로 불렸다. 매독뿐 아니라 콜레라, 흑사병, 나병에 이르기까지 집단적인 불치의 질병은 늘 ‘타자’와 연관되어왔다.
  • 위기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개인을 받쳐줄 사회적 보호제도가 전무한 상황에서 개인이 부여잡을 지푸라기는 뭐였을까.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기댈 유일한 언덕은 ‘사적 안전망’인 가족이었다.
  • 전근대사회에서 가족주의가 지배적이었던 건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한국 사회의 특이한 점은 흔히들 가족주의가 약해지기 마련인 근대화 과정에서 가족주의가 더 강력해졌다는 점이다. 근대화 과정 내내 국가가 ‘선 성장, 후 분배’의 논리하에 거의 모든 사회 문제를 가족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 그나마 공공의 사회적 보호제도가 도입된 것은 1987년 민주화 대항쟁 이후의 일이다. 미뤄뒀던 국민연금이 1988년 시행됐고 같은 해 의료보험이 5인 이상 사업장에까지 확대됐다. 이듬해에는 의료보험이 전 국민 대상으로 확대됐고 <모자복지법>(1989년), <영유아보육법>(1991년) 등 사회적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법안들이 잇따라 만들어졌다.
  • 1990년대의 개인화가 더 발전하지 못하고 가족주의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지층을 뒤흔든 IMF 경제위기의 영향이 크다. 국가 경제가 파탄 나면서 모두 불안해졌다. 개인의 자유로운 성장은커녕 가족이 뭉쳐 살아남거나 흩어져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 취업이 어려우니 연애와 결혼, 출산은 유예 혹은 기피 대상이 됐다. 비혼의 급증은 개인화의 결과가 아니라 불안정해진 삶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혼을 해도 삶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모든 것을 일터에 바쳐야 하는 상황에서 가족에겐 ‘저녁이 없는 삶’이 일상화됐다. 시간이 있으면 ‘가족과 함께’는 커녕 몸값을 올리기 위한 ‘자기계발’이 시급했다.
  • 사실 핵가족은 근대의 발명품이 아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한국의 전근대 사회에서도 확대가족, 대가족은 드문 현상이고 부부 중심의 핵가족이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수명이 짧아 3대 이상이 공존하는 게 드문 일이었고 확대가족 유지에 필요한 경제력을 갖추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줄곧 핵가족 체제였는데도 핵가족을 이상화했다가 10년도 지나지 않아 비판하는 담론이 출몰했던 이유는 뭘까.
  • 사회학자 김혜영은 이를 가족을 통한 국가의 통치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경제발전과정에 노동력, 특히 값싼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했던 국가는 핵가족을 찬양하면서 농촌 자녀의 도시 이주를 장려하고 여성의 노동시장 유입, 산아제한을 골자로 한 가족계획을 장려했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진전으로 농촌의 공동화 및 노령화가 문제가 되고 노인 부양의 필요가 제기되자 이번에는 핵가족을 비판하고 전통적 가족 부양의 윤리를 찬양했던 것이다.
  • 남들이 다 하니까 안 하면 늦는다는 ‘공포마케팅’으로 돌도 되기 전의 아이들이 학원에 떠밀려 간다. ‘3세에 뇌 발달이 끝난다’는 식의 근거도 불투명한 ‘3세 뇌발달’ 마케팅이 번지면서 생후 6개월부터 시작하는 이른바 ‘0세 사교육’도 등장했다.
  • 일터에서 가족주의는 1970, 1980년대 고도성장의 시기에 자주 호출되어왔다. 기업은 ‘가족 같은 기업’을 내세우며 노동자들의 한없는 희생과 헌신을 요구했다. 법인과 사인의 계약 대신 가족의 논리를 일터에 끌어들여 권위적, 수직적 인간관계로 노동자들을 통제해왔다.
  • 2015년 EBS가 서울의 한 자치구를 골라서 관내 초등학교 전체 학생 수를 조사했더니 전체 32개 학교 가운데 학생 수가 300명이 안 되는 미니 학교는 모두 여섯 곳이었다. 이 학교들의 위치를 조사해보니 하나같이 임대아파트나 임대 단지 바로 옆에 있는 학교들이었다고 한다.
  • 법으로 부모의 체벌을 금지하는 것은 스웨덴 국내에서도 그렇고 국제적으로도 매우 논쟁적 이슈였다. 법이 제정됐을 때 유럽의 언론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는데 당시 한 프랑스 신문은 “미쳐버린 스웨덴인들” 같은 헤드라인을 붙여 보도하기도 했다.
  •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믿음이 팽배했던 시절 젊은 엄마였던 그 여성은 어느 날 어린 아들이 말을 듣지 않자 매로 가르치려고 아들에게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시킨다.
  • 그런데 이 소년은 회초리를 찾으러 나갔다가 한참 만에 울면서 돌아와 작은 돌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회초리로 쓸 만한 나뭇가지를 찾을 수 없었어요. 대신에 이 돌을 저한테 던지세요.” 아이는 ‘엄마가 나를 아프게 하길 원하니까 회초리 대신 돌을 써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스웨덴 정부는 법 통과 이후 이를 알리기 위해 대대적 캠페인을 펼쳤다. <체벌금지법>과 함께 체벌 대신 사용 가능한 훈육 방법을 설명하는 16쪽짜리 설명서를 자국어뿐 아니라 독일어, 영어, 불어, 아랍어 등 여러 언어로 만들어 아이가 있는 전국의 모든 가정에 배포했다. 또 두 달간 <체벌금지법>에 대한 설명을 우유병에 붙이도록 했다. 아동병원과 산전클리닉들도 캠페인에 참여했다. 그 결과 법안 통과 2년 후인 1981년엔 스웨덴 전체 가구의 99%가 이 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 2011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스웨덴 역사학자 라르스 트래가르드가 발표한 ‘스웨덴식 사랑 이론’이 그런 논리다.
  • 이 이론은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는 개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율적이고 평등한 개개인 사이에서만 사랑과 우정 같은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서로 의존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바라본다. 국가는 이런 굴욕감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 <세계가치관조사>에서도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사회적 신뢰도가 가장 높은 국가들로 꼽힌다. 개인의 자기실현을 가장 중시하면서도 낯선 이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을 신뢰한다는 응답도 50% 이상이었다.
  • 부모휴가를 통해 남성과 여성의 가사 분담이 자연스러워졌다. 한국에선 육아휴직의 부담 때문에 고용주가 여성 채용을 꺼리지만 남녀 모두 육아휴직을 쓰는 스웨덴에선 굳이 여성의 채용을 꺼릴 이유가 없다.
  • 스웨덴 아이들의 거의 절반은 결혼제도 밖에서 태어난다.
  • 출산율이 회복된 나라들에는 혼외출산을 ‘정상가족’에 대한 도전이나 일탈로 간주하며 차별하는 배타성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웨덴이 그 대표적 경우다.
  • 사람들은 외집단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으며 내집단보다 덜 도덕적이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이런 공감의 한계 때문에 심리학자 폴 블룸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방식의 공감력 향상보다는 되레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성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