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게 된 동기 ]


 
STEW 2017 독서소모임 두번째 지정도서. 페미니즘 분야.
 

[ 한줄평 ]


 
이미 굳어진 몸을 강하게 스트레칭 하는 기분이랄까? 아니, 굳어진 다리를 찢는 기분이랄까?
 

[ 서평 ]


 
연 초에 책을 참 많이도 샀다. HBR, 테크M 같은 잡지부터 경제, 기술 분야 전문서적까지. 읽을 책이 투성인데, 이번 독서소모임 책이 우선순위로 버티고 있기에 읽을 수가 없었다. 페미니즘 도서는 왜이리 마음먹기 어려운걸까? 심호흡을 몇번이나 하고나서야 읽기 시작했다. 아, 역시나 어렵다.
 

사회학자의 이야기, 본격 불편함의 시작.

 
저자 오찬호는 사회학자다. 사회학이라는게 사회적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학문이기에 이들은 사회적 문제점을 잘 찾아내야만 한다. 때문에 불편하더라.
구조를 바꾼다는 것, 문화를 바꾼다는 것, 사람을 바꾼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비즈니스에서는 고객을 바꾸려는 사업은 성공 확률이 너무도 낮기에 하지 말라고 한다. 사회적인 문제는 대부분 구조적, 문화적 문제다. 비즈니스 관점에서는 성공확률이 극악인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변수가 많은 사업 아이템은 좋은 아이템이 아니다. 변수를 관리하기 위한 자원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사회적 문제점들은 분명 문제는 맞는데, 바뀌어야 할 것 같은데 너무도 큰 구조적 문제기에 어디서부터 바꾸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게다가 무한대에 가까운 변수가 있기에 내 직감은 “건드리지마…” 라고 외쳐댔다.
 
 
저자는 민감한 내용을 대다수 건드렸다. 결코 득이 될 수 없는 주제 군대 이야기부터, 예쁜 여자 이야기, 김여사 이야기 등 지난 몇 년간 적어온 칼럼들을 주루룩 풀었다. 불편했다. 왠지 모르게 나를 겨냥하는 것 같아 불편한 것도 있고, 꼭 이렇게 말을 해야 하나 싶은 이야기들도 있었다.
확실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헛소리라며 덮어버리기엔 완전 말도 안되는 이야기도 아니었고, “맞아!!” 하며 수긍하기엔 깊은 공감이 가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아주 확실히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불편함에 저자의 글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이놈의 저자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었을까? 나는 결국 찾아냈다! 김여사 이야기를 언급하는 파트에서 2011년 보험연구원 조사 자료를 인용하는데, 인용했음을 적는 포맷이 잘못 되었다.
옳다구나!! 싶어 책을 추천한 친구에게 이를 언급하며 잘못 되었다고, 이 사람 박사학위 달고 이런 글을 써도 되는거냐고 마구 공격을 했다. “화법도 잘못 되었고, 굳이 이런 말을 했어야 할까? 싶어! 이 사람 평가는 어떨까?” 그래, 그렇게 공격해서 내 속이 좀 시원해졌을까? 책에 대한 공격을 마구 하는 내게 친구는 말했다.
 

“근데, 왜 이 책에 대해서만 유독 이런걸 찾아내? 인용부분이 잘못된건 알겠는데, 이 자료를 언급한 부분이 그렇게 중요해?”

 
그냥 이 사람이 날 불편하게 해서 싫다고… 그냥 이 사람도 기분 나쁘게 하고 싶다고… 말 할 수 없었다. 뭘까 나는 왜 이사람이 이렇게 싫었을까? 내가 느낀 불편함은 뭐였을까?
도대체 뭘까?
 
 

저기말야… 평소에 싸움을 좀… 피하는 편이야?

 
이틀 전 이 책을 다 읽고 마구 샘솟는 불편함에 서평을 쓸 수가 없었다.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아 그냥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이틀간 이 불편함이 뭘까 하는 고민을 하던 중, 어렴풋이 원인을 찾았다.
그래,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몇 해 전, 사내 지인들과 작은 다툼이 있었다. 당시 나는 일방적인 공격을 당했고, 분노를 삼키며 한동안 씩씩 댔다. ‘아니, 도대체 내가 뭐가 문제라고! 나처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어딨다고! 다 그 사람들 문제야!’
며칠간 속으로 분노를 삼키다가 반대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혹시, 내가 이상한가?? 아닌데… 나는 주변 지인들과 충돌이 별로 없는데… 혹시… 내가 정말 이상한걸까? 내 지인들이… 참는걸까??’
 
문득 이상함을 느낀 나는 친한 동기에게 물었다.
 

나 : “혹시… 평소에 싸움을 좀 피하는 편이야?”
동기 : “왜?”
나 : “아니, 그냥. 궁금해서”
동기 : “뭐… 그런 편이야. 난 별로 싸우는걸 안좋아하거든”

 
엄청난 충격이었다. 다 내가 좋은 사람이기에 그럴거라 생각했다. 내가 잘 하고 있는거라 생각했다. 헌데, 현실은 내 주변 사람들이 내 모난 성격을 맞춰주고 있는거였다니. 아냐!! 아닐거야!! 나와는 그런게 아닐거야!!
얼마나 걸렸을까? 그 대답을 받아들이기까지. 왜 나는 내가 모난 성격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가 잘못했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나를 들여다보지 않았을까?
왜, 나는 나를 몰랐을까?
 

옆에서 위에서 그리고 밑에서 쳐다보기.

 
그때쯤이었을까? 나는 사건이 생길때마다 ‘사색’ 노트에 글을 쓴다. ‘누가 나를 기분 나쁘게 했다. 누가 내게 칭찬을 했다. 롤모델을 만났다.’ 등. 어떤 사건이 생길 때마다 나는 글을 적는다.
사색 노트를 적을땐 최대한 솔직하게 적는다. 그리고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본다. 혹시 내가 먼저 기분 나쁘게 했을까? 내게 뭔가 잘못한게 있어서 잘해주는건가? 나는 누군가에게 롤모델이 되고 있는가?
 
나라는 프레임에서 스스로 벗어나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이는 자아가 강할수록 더 힘들다. 나만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던가? 이를 스스로 깨고 다시 쌓아 올리는 것은 참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수시로 이런 시간을 갖는다. 작은 원룸도 일주일만 방치하면 머리카락 투성이가 되게 마련이고, 화장실도 금새 더러워진다. 세수도 매일 하는데, 인격을 닦는 시간을 자주 갖지 못한다면 얼마나 더러워지겠는가?
 
이틀간의 사색 끝에 나는 불편함의 원인을 찾았다. 나는 내가 굉장히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나보다. 나는 차별하지 않고, 굉장히 배려심있는 아주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나보다.
헌데 저자 오찬호의 글이 불편했다. 읽는 내내 불편함을 꾹 참고 억지로 읽어가며, 스스로도 괴로웠다. ‘나는 왜 불편하지…?’ ‘아냐, 이 저자가 이상하게 쓴거야…’ ‘혹시… 나도 그냥 똑같은 남자인가? 안돼… 설마… 그런건가?’
 

나와 똑같을 거라는 착각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내가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내가 생각했을때 그랬던 것이다. 내 생각이었던 것이지. 마찬가지로 내가 말하는 것에 내가 기분 나쁘지 않으니, 상대방도 내 말에 기분 나쁘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아니~ 나정도면 좋은 상사 아니냐? 그게 기분나쁠 일이냐~? 너 좀 이상하다~?”

 
아놔… 나는 그저 잠재적 꼰대였던 것인가?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내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성적 농담을 걸렀고, 나는 내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차별을 걸렀다. 나는 내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언행을 상대방에게 던지며, 너도 기분 나쁘지 말라고 강요했다.
나는 철저히 상대방이 나와 똑같을거라 생각했다. 그래, 나는 나의 생각을 강요했다.
 

차별의 확인.

 
저자 오찬호는 참 다양한 이야기를 해줬다. 군대, 운전, 취업, 외모 등. 그 중에서 딱 하나만 꼽자면 EBS 다큐 <인간의 두 얼굴> 의 에피소드를 꼽고 싶다.
2009년 4월에 방영한 다큐 <인간의 두 얼굴> 은 서른세 살의 남자를 명동 한복판의 쇼윈도 안에 세워놓고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감상평을 하게 하는데, 한 번은 평범한 복장이고, 한번은 정장차림이었다. 평범한 차림일때 여자들은 공장에서 일할 것이다, 만두 가게 주인 같다고 하지만 정장을 입으니 변호사 같다고 한다.
내가 놀란 부분은 이 다음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영상을 대학생들에게 보여주면 ‘일관된 반응’이 나온다. 남자의 평상시 복장을 보고 여자가 ‘악담’을 퍼붓기 시작하면, 강의실에 있는 학생들은 (남자든, 여자든) 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들이 수군수군하는 내용은 “지랄하네!”, “지 얼굴 어떻게 생긴 줄 모르고”, “진짜 우습다” 등이다.

 
저자는 이 영상을 강의시간에 틀어주고 학생들의 행동을 관찰한다. 학생들의 반응은 영상 속의 여자들과 다른바 없다. 참 좋은 강의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강의를 기획했을까?
그리고 다음 부분에서는 ‘아! 나도 똑같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옷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여자를 봤다고 해서 전문직과 결부하는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저 ‘회사원일 것 같다’라는 두리뭉실한 답변이 가장 많을 것이다. 최고로 쳐서 평가해봐야 ‘대기업 정규직’, 아니면 ‘은행원’ 정도로 예상하고 연봉도 3,000 ~ 4,000만 원이라 예상한다.
이는 남자는 옷을 대충 입어도 ‘어느 정도의 노동생산성’이 있지만, 여자는 옷을 ‘잘’ 입어도 ‘특별난 노동생산성을 보유할 리 없다’는 사회적 인식을 그대로 나타낸다.

 
생각해보면 내가 받았던 교육은 이렇다.
‘외모도 중요하다! 때문에 잘 입고, 잘 꾸미고 다녀라.’
 
아직은 이부분까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외모를 깔끔하게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는 방법 중 하나다. 이는 심리학쪽 이론까지 건드리게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실제로 외모에 따라 사람의 평가가 극과극으로 갈리는 것을 보니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걸 보니 확실히 사회에 차별이 있구나 싶다. 특히, 잘 꾸민 여성을 보면서 ‘오! 잘나가는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을 내 모습을 보니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차별이 확실히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차별은 확실히 내 주위에도 있었다.
 

조금 더, 조금 더 존중을.

 
아쉽지만, 문제를 인지한 시점부터는 어쩔 수 없다. 방향을 바꿔야만 한다. 내 언행으로 인해 누군가가 불편하고, 상처를 받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게 아닌가?
물론, 내가 상대방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적어도 내가 머무른 곳 만큼은 내가 머무르기 전 보다 더 좋은 곳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전보다 더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난 아직까지도 페미니즘 등의 인권운동에 어떤 위치를 지켜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한 예로 페이스북 등에서 오고가는 대화에서 나는 두 의견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아니, 남자를 잠재적 성범죄자로 몰다니! 너무한거 아니야? 남자 전체를 그런식으로 말하면 안되지. 저 사람들이 나쁜거라고!”
“생각해봐. 그럼 여자는 잠재적 성범죄 피해자라고! 우리는 얼마나 무섭겠냐고!”

 
댓글을 주루룩 내리며 두 가지 의견을 확인 했을때 나는 두개의 의견 모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볼땐 두 의견 모두 서로를 존중해달라는 것 같다. 쉽게 말해 “내 입장에서 생각해 봐!” 랄까? 이런식의 토론은 무의미하고 소모적일 뿐이다. 결국 나를 좀 더 봐줘~ 라는 성숙치 못한 방법이다.
사회학자가 쓴 페미니즘 도서를 한 권 읽었다고 해서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내가 남자로 태어난 이상 여성 인권에 대해 이해한다는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건 그저 상대를 존중할 뿐이다.
 
상대를 좀 더 존중하고 배려한다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렵기에 세상은 늘 문제투성이지만, 이 어려운 세상 속에서도 늘 다음을 만들어왔던게 인류 아니던가.
 
거창하게 생각하면 너무도 막막하다. 그저, 나부터 내 주위의 친구들을 조금 더, 조금 더 존중하는데서 시작할 뿐이다.
 

[ 인상 깊은 문구 ]


 

  • 약한 모습 다시 보이면 끝장날 수 있다고 마음먹었는지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보다 더 악질적으로 변한다. 괴물의 탄생이다. 말 그대로 군대 가더니 사람이 되었다.
  • 교사는 학생들의 책상 배열부터 바꾼다. ‘모든’ 학생과 ‘한 명’의 교사가 마주보는 전형적인 그 교실 구도로 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존칭’을 사용하라고 한다. 또한 누군가가 의견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어디선가 익숙한 광경이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경험하는 일상이 어떤 곳에서는 ‘실험’에서나 등장한다).
  • 그래서 이 강의는 늘 ‘말들의 잔치’였다. 끝없이 ‘어떤’ 말을 해야 하니 때로는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은’ 말들도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게 마련이었다. 나 역시 어찌 보면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 이런 시기는 남자에게만 부여되었다. 그래서 ‘요즘 남자가 힘들어졌다’는 말은 실언(失言)이 아니라 실토(實吐)다.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지 않다는.
  • 이를 고려하면, 백여 명이 넘는 교양 강의에서는 나와 ‘지적 영감’을 교류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선택적으로 피드백이 갈 수밖에 없다. 당연히 내가 이름을 외우는 학생도 소수다.
  • 청년 취업 시장에서 여성들은 흔히 ‘남자가 최고의 스펙’이라는 자조 섞인 탄식을 내뱉는다.
  • 여자들을 상대로 ‘조 모임에서 남자들이 얼마나 황당했는지’를 물으면 이러한 증언들은 그칠 줄 모른다. 그렇다면 ‘조 모임’의 문제는 남녀 간의 차이로 벌어지는 문제가 아닌 사람 간의 차이로 일어나는 문제이다.
  • 그녀의 성명(姓名)은 ‘주논개’다. 같은 ‘활약’을 해도 남자와 여자가 후대에 기억되는 방식은 이렇게 다르다.
  • 그런데 단지 ‘내가 편해지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이용을 제한’하는 경우라면?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차별’이다.
  •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영상을 대학생들에게 보여주면 ‘일관된 반응’이 나온다. 남자의 평상시 복장을 보고 여자가 ‘악담’을 퍼붓기 시작하면, 강의실에 있는 학생들은 (남자든, 여자든) 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들이 수군수군하는 내용은 “지랄하네!”, “지 얼굴 어떻게 생긴 줄 모르고”, “진짜 우습다” 등이다.
  • 하지만 ‘옷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여자를 봤다고 해서 전문직과 결부하는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저 ‘회사원일 것 같다’라는 두리뭉실한 답변이 가장 많을 것이다. 최고로 쳐서 평가해봐야 ‘대기업 정규직’, 아니면 ‘은행원’ 정도로 예상하고 연봉도 3,000 ~ 4,000만 원이라 예상한다.
  • 이는 남자는 옷을 대충 입어도 ‘어느 정도의 노동생산성’이 있지만, 여자는 옷을 ‘잘’ 입어도 ‘특별난 노동생산성을 보유할 리 없다’는 사회적 인식을 그대로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