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게 된 동기]
몇 해 전에 사두고 읽지 않았던 책. 그동안 일을 위해 열심히 만들었던 나의 프레임을 스스로 깨기 위해 필요하다 생각이 들어 읽게 됨.
[한 줄 평]
결국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원하는 것을 정하고 그것을 위해 환경을 만들고 집중하면 얻을 수 있다.
[서평]
4년 전 쯤인가? 조언을 구하던 한 멘토님께 책을 추천 받았다. 프레임이었다. 그분은 대기업 교육팀 출신의 어른이었고, 이 주제로 강의도 하곤 하셨다. 200페이지 정도의 얇은 이 책을 왜 이렇게 읽기를 미뤘는지 모르겠다. 어제 밤에 잠깐 읽다가 오늘 아침에 다 읽어버렸다.
나는 마흔이 되어서도 내 자신이 이럴 줄은 몰랐다. 젊은 날의 나는 마흔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고상해질 줄 알았다. 마흔이 되기만 하면 어떤 마법에 걸린 것처럼 저절로 인생을 알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관대해지고, 무엇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될것으로 기대했다.
저자는 서울대 교수다. 네이버에 검색하면 나오는 유명인사로 온라인에 강의도 많이 올라와있다. 심리학 교수인 저자는 서문 첫 문단을 통해 나를 책 속으로 완전히 몰입시켰다. 서른즈음에 어떤 사람이겠다 생각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지금보다 뭔가 더 있었더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게 되더라. 그렇다고 지금의 현재가 싫은 것은 아니다.
<나를 만들었던 것들>
나는 대학교 3학년때 대폭 성장했다. 그리고 나는 단호히 내 삶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다지 깊은 생각을 하던 학생도 아니었고, 또래집단에서 인기가 많지도 않았다. 강하게 원하는 것도 없었고, 아마 그것이 밋밋한 학창시절의 큰 이유였으리라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대학교 3학년 시절의 내 환경은 성장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었다. 내가 군복무를 마치자 내 동생이 군복무를 시작했고, 덕분에 부모님의 걱정거리는 늘 동생이었다. 상대적으로 나는 집에서 어른으로 인정받았고, 착실한 부모님 덕에 집안은 늘 평온했다. 당시 내 애인은 내가 과 수석을 했을 때가 가장 멋졌다며 공부에 열심히 해주길 바랬고, 책을 읽으면 용돈을 받을 수 있었던 탓에 책을 참 많이 읽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나는 성당에서도 믿음직한 청년으로 인정받아 여러 일을 맡았었고, 학교에서도 그다지 기억나는 문제들도 없었다.
가장 행복하다고 답한 10%의 사람들과 나머지 사람들이 보인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 돈, 건강, 운동, 종교였을까? 아니다. 가장 큰 기준은 바로 관계였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222명 중 가장 행복한 상위 10%인 22명 중에서 21명이 조사 당시 이성 친구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1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나는 대폭 성장했다. 내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응원해주었고, 그 응원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내 발전에 집중했다. 그 결과 과 수석을 탈환했고, 지난 4년간 몸담았던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래, 난 그때쯤 많이 성장한 것 같아’ 라고만 생각했었다. 프레임을 읽으며 내가 왜 그때 성장했는지 회상해보았고, 그땐 내 프레임에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서 집중되었던 것을 발견했다. 꿈은 많고 클 수록 좋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가장 성장했던, 그 시절에 나는 ‘선택과 집중’ 을 했던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대학교 3학년 시절. 당시 나는 꿈이 없었다. 아이들과 대화하는게 좋아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당시에도 교대는 막강한 경쟁률을 자랑했다. 이벤트를 만드는게 좋아 이벤트학과로 편입을 할까 고민했지만, 큰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자의가 아닌 환경에 의해서 ‘선택’ 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컴퓨터학과생으로써 공부를 ‘잘’ 하겠다는 ‘선택’ 말이다.
애초에 내가 선택을 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선택을 하는데에 내가 능숙한줄로만 알았다. 헌데, 회사를 나오고 모든 것을 내 판단에 의해 결정하고 책임을 지려니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한 것이다.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가까운 미래나 현재의 일도 늘 상위 수준으로 프레임해야 한다. 일상적인 행위 하나하나를 마치 그것을 먼 미래에 하게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의미 중심으로 프레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꿈이 없던 그때, 나는 꿈을 정하기 위해 내 장점들을 적어 A4 용지를 가득 채워보기도 했고, 하고 싶은 일들을 모두 적은 뒤 좀 더 상위 직업으로 바꾸어가며, 작은 직업들을 지워가는 일을 해보기도 했다. 그때 최종적으로 적힌 일은 ‘축구 구단주’ 였다.
하지만 축구만을 위해 축구 구단주를 적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기도 했고, 명성을 쌓고 싶기도 했다. 주위에 도움을 주고 싶기도 했고, 업무적으로는 기획, 마케팅 등을 하고 싶었다. 물론 개발도 하고 싶었지. 그런 복합적인 많은 일들을 하나의 직업으로 모아보니 ‘축구 구단주’ 가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축구 구단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늘 웃는 삶’ 이었다. ‘항상 웃자’는 내 좌우명이고, ‘항상 웃는 것’ 이 내 진짜 꿈이다. 축구 구단주가 되었지만 내가 웃을 수 없다면 나는 축구 구단주의 삶을 버릴 것이다.
아마 그시절 많은 사색을 했던 나는 ‘먼 미래’ 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나는 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어떤 경험을 쌓아야 하는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내가 끝까지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 스스로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닫혀진 프레임. 창 밖으로>
나는 한 조직에 4년간 몸담았던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 이사를 10번정도 다녔고, 대학교는 4년이긴 하지만 군 휴학 2년에, 방학 등을 빼면 연결된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4년간 한 회사에 몸담으며 나는 시야가 많이 좁아졌다. 사람은 보인 것을 믿게 된다. 아니, 보이는 것만 믿게 된다. 나는 4년간 같은 것을 보았고, 나도 모르게 내가 보이는 시야 내에서의 나를 만들어가게 되었다.
싫었다. 내가 고민하고 노력하며 만들어 가던 내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거지?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거지? 이런 질문들은 수십번도 더 했다.
그렇다면 상위 수준과 하위 수준 프레임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상위 프레임에서는 ‘Why’ 를 묻지만 하위 프레임에서는 ‘How’ 를 묻는다는 점이다.
TED 에서 가장 유명한 영상 중 하나인 사이먼 시넥의 주장과 같은 문구다.
나는 상사에게도 ‘왜?’ 를 묻던 직원이었다. 이걸 왜… 하는거죠? 이건 누가 시킨거죠? 그 사람이 이걸 왜 시킨거죠? 아… 그래서 이걸 제가 왜 해야하죠?
특별히 노력한게 아니다. 그냥 그걸 알아야만 내가 움직일 수 있었다. 망할, 내가 왜 이걸 해야하는지 모르겠단 말이다. 내가 꿈꾸던 일이 아니었다. 한번은 내게 대전 출장을 다녀오라고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두달 정도를 합숙하며 지내야 했다. 왜 내가 여길 가야 하는지 모르겠단 말에 상사 한 분이 내게 말했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게 네가 할 일인데.’
그랬다. 그게 내 일이었다. 직장인은 시키는 일을 해야만 했다. 내 일이다… 내 일이다… 수십번도 더 되뇌이며 출장을 다녀왔다. 뭐, 생각보다 그리 무서운 일은 아니었다. 그 뒤로도 나는 ‘왜’ 에 대해서 물었고, 내 일이다 싶으면 했다. 내 일이니까. 나는 프로니까. 그렇게 나는 나를 프로로써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들어진 프레임. 프레임 속에 있었던 나. 그리고 그 프레임을 보다>
나는 그렇게 2년간을 더 일했고, 총 4년 2개월을 일한 뒤 회사를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고, 응원해줬다.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또한 나 스스로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이 모든 일들을 잘 만들어준 내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회사를 떠나고 6주가 흘렀다.
그간 나는 많은 일들을 겪었고, 그 일들을 겪으며 기록했다. 종종 그 기록들을 꺼내보곤 하는데, 최근 그 기록을 보며 최근의 내 생각과 다른 접근을 느꼈다.
지금의 나는 내 의지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사람들과 책들과 그밖의 모든 환경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주위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었고, 그 환경에 따라 내 행동과 생각들이 심하게 바뀌었다.
그러나 프레임이 항상 외부에서 강요되거나 은밀히 유도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건네는 ‘질문’ 혹은 ‘담화’가 우리에게 특정 프레임을 유도할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사건이 생기면 에버노트에 꼭 기록을 해두는데, 2011년부터 기록한 노트가 1100개가 넘었다. 특히 ‘사색’ 노트는 내 생각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내게 큰 영감을 주었는데, 무언가를 보고 들은 뒤의 내 속마음을 읽다보니 때로는 조금, 때로는 크게 바뀐 내 생각들이 굉장히 놀라웠다.
그렇게 나는 환경에 의해 프레임을 만들고, 그 프레임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프레임 만들기>
그렇게 만들어진 프레임 속에서 나는 다른것을 원했다. 내 프레임은 지난 5~6년간 만들어졌고, 처음 생각했던 내 꿈과는 다른 방향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래, 현실과 이상이 더이상 공존할 수 없는 지점에 도착한 것이다.
‘지혜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다 가질 수 있는 줄 알았다. 불가능하다. 이제는 안다. 수조원대의 부자가 되면서 늘 정직하고, 건전하며, 정의롭고, 밝으며, 건강하고, 타인을 위하며, 검손하고, 너그러울 수는 없다. 이건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걸 원했다.
나는 나 스스로의 행복을 다시 포지셔닝 해야 될 시점에 도달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생각해야 될 때가 온 것이다. 환경에 의한 선택은 선택을 미룰 뿐이다. 6년이 지나 그 선택지는 다시 내 앞에 도착했다. 이제는… 선택 해야만 한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 해결점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프레임하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답을 알면서도 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피하고 있다면 나는 왜 피하고 있을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일까?
내 성장에만 집중했던 그때처럼 내 환경을 만들었다. 아니, 그때보다 더 극단적으로 내 성장만을 위한 환경을 만들었다. 6년이란 시간을 달린 뒤, 6주동안 열심히 돌아왔다. 이제 다시 그때와 같은 출발선에 섰다.
과연 내가 만든 프레임은 무엇을 위한 프레임이었으며, 내가 정말 원하는 프레임은 뭘까? 나는 어떤 프레임을 만들고 싶은 것일까? 어떤 프레임을 만들어야만 할까?
자기 방어에 집착하지 말고 자기 밖의 세상을 향해 접근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새로운 일을 접했을 때 늘 접근의 프레임을 견지하라. 그것이 두려울 땐 기억하라. 접근함으로 인한 후회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안주함으로 인한 후회는 시간이 지날 수록 더 커진다는 것을!
출발선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두려울건 없다.
환경에 크게 흔들리는 나를 위해서, 나는 내 환경을 내가 만든다. 나 이외에 나를 정의하고 흔드는 것들은 최소화 한다. 지금까지의 프레임을 벗고 내 본질을 바라본다.
내 프레임을 내가 만든다.
[인상 깊은 문구]
- 나는 마흔이 되어서도 내 자신이 이럴 줄은 몰랐다. 젊은 날의 나는 마흔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고상해질 줄 알았다. 마흔이 되기만 하면 어떤 마법에 걸린 것처럼 저절로 인생을 알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관대해지고, 무엇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될것으로 기대했다.
- ‘지혜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상위 수준과 하위 수준 프레임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상위 프레임에서는 ‘Why’ 를 묻지만 하위 프레임에서는 ‘How’ 를 묻는다는 점이다.
- 상위 수준의 프레임이야말로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견지해야 할 삶의 태도이며, 자손에게 물려줘야 할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 안락한 지대를 벗어나 ‘지도 밖으로 행군’ 하는 용기 있는 행동은 오직 접근 프레임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도전적인 프레임이 있엇기에 비행기가 발명되고 우주선도 탄생할 수 있었다.
-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 해결점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프레임하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 그러나 프레임이 항상 외부에서 강요되거나 은밀히 유도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건네는 ‘질문’ 혹은 ‘담화’가 우리에게 특정 프레임을 유도할 수도 있다.
-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후에 내리는 모든 판단에 대한 확신을 지금보다 훨씬 더 줄여야 한다.
- 이 연구의 응답자들은 9년 전 자신의 태도를 회상하면서 그때의 태도가 현재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 시간이 지나고 나면 웬만한 것들은 다 사소하게 보이는 법이다.
- 사람들은 이득상황으로 문제가 프레임되면 모험을 감행하기보다는 안전하고 보수적인 대안을 선택한다. 그러나 동일한 문제가 손실 상황으로 프레임되면 안전한 선택보다는 모험을 감행하는 경향을 보인다.
- ‘어느 부모에게 양육을 맡겨서는 안 되는가?’ 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장점보다 ‘단점’을 찾는 프레임이 활성화된다.
-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가까운 미래나 현재의 일도 늘 상위 수준으로 프레임해야 한다. 일상적인 행위 하나하나를 마치 그것을 먼 미래에 하게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의미 중심으로 프레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 자기 방어에 집착하지 말고 자기 밖의 세상을 향해 접근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새로운 일을 접했을 때 늘 접근의 프레임을 견지하라. 그것이 두려울 땐 기억하라. 접근함으로 인한 후회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안주함으로 인한 후회는 시간이 지날 수록 더 커진다는 것을!
-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하는 것, 다른 사람들보다 물질적으로 더 잘사는 것이 주는 일시적인 만족보다는, ‘최선의 나’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 가장 행복하다고 답한 10%의 사람들과 나머지 사람들이 보인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 돈, 건강, 운동, 종교였을까? 아니다. 가장 큰 기준은 바로 관계였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222명 중 가장 행복한 상위 10%인 22명 중에서 21명이 조사 당시 이성 친구가 있었다는 점이다.
- 결국 글래드웰을 비롯하여 여러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성인기의 성취라는 것은 그것이 어떤 영역이든 ‘중단 없는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나 적절한 지적이다. 반복의 위력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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