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저자 바츨라프 스밀의 문장은 내 취향이 아님을 밝힌다. 지난 도서 <숫자는 어떻게 진실을 말하는가>는 맥락 없는 잡지 글의 묶음이라 실망이었는데, 이 책은 한마디로 피로했다.
도서 <음식은 넘쳐나고, 인간은 배고프다>는 저자가 식량 문제에 관한 온갖 데이터를 가져와 정리했는데, 일상에서 접하지 않는 헥타르 등의 단위부터 사하라사막 아래 아프리카 등 생각지 않은 주제를 던졌다. 그리고 역시 숫자를 과하게 가져왔는데, 이게 상당히 피로했다.
숫자 자체도 피로한데, 평소 생각 자체를 안 했던 분야라니. 이런식으로 독자를 불편하게 하며 화두를 던지는 스타일인 거 같은데, 내 취향이 아니다.
식량 문제
식량 문제는 학창시절부터 늘 떠나지 않던 주제다. 그리고 늘 재미 없던 주제다. 그럴 것이 우리 세대는 식량에 관한 어려움이 크게 없던 시기다. 가끔 래퍼들이 라면만 먹으며 일했다고 하는데, 그게 가사가 될 정도니 정말 일반적이지 않은 일인 것이다. 여전히 굶어 죽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있다며 뉴스에 나오지만, 역시 희귀한 상황이니 뉴스에 나오는 거라 생각한다. 당연히 사회적 문제로 해결돼야 하겠지만, 정말 극소수의 문제를 다루기엔 우리의 시간이 너무도 짧다.
가끔 비건을 만나곤 한다. 올해 만났던 사람 중 ‘저 비건이에요’라고 말하기에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함께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어떤 비건이에요?’를 물었고 직접적으로 고기를 먹지 않는 무슨 비건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와, 비건이라고 했을 때 왜 비건이냐고 묻지 않은 게 정말 오랜만이에요. 너무 좋아요’라고 하더라. 일반적이지 않은 케이스를 말하면 왜 그러느냐고 묻는 게 관심의 표현 아닌가? 이어진 말에 다시 한번 다짐했다. 비건이라 말하는 사람에게 대꾸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저자의 마지막 문장 중 이런 표현이 있다.
대규모 충돌과 유례없는 사회 붕괴가 일어나지 않는 한 세계는 21세기 중반 이후까지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나는 식량 문제는 이 문장이 우리 세대가 갖는 관심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1세기 중반 이후라면 2060~2070년 정도를 말할 것 같은데, 앞으로 40~50년 뒤라면 이미 대부분의 사회인이 사회 생활을 은퇴했을 무렵이다. 40~50년이라면, 우리나라 정치인에게 주어지는 1회 정치 임기의 10배다. 때문에 관심이 없을 수 밖에 없는거다.
또한, 시간의 흐름을 떠나서 현재 이 문제를 풀어야 할 성인들에게 여유가 너무 없다. 당장 풀어야 할 과제가 너무도 많은데, 자신의 은퇴 후 문제를 지금부터 논의하자고 하면 어느 누가 적극적으로 달려 들겠는가?
문제를 풀어야 할 세대에게 시기도 적절하지 않고, 여유도 없는 상황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저 급진적인 이념으로 다가온다. 직접적인 육류를 소비하지 않자는 비건부터, 미량의 육류도 포함돼선 안 된다는 극단적인 비건까지. 이들의 이념에 피로를 느끼고 있는 상황에 온갖 숫자를 들이대는 건, 억지로 ‘넌 이해를 해야만 해!’라고 들린다.
저자의 경제 관념
5장의 주제는 ‘더 중요한 것: 식량일까, 스마트폰일까’이다. 나는 이 챕터를 보면서 저자가 현실 감각이 너무도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이어지는 내용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이전 책들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비관주의자도 낙관주의자도 아니다. 나는 과학자다.
저자 바츨라프 스밀은 자연 과학을 전공하고 지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는 여러 연구를 하며 책을 쓰는 작가다.
당연히 식량과 스마트폰 중 일부가 사라졌을 때 인류에게 더 큰 충격을 주는 건 식량이겠다. 식량은 목숨과 직접적인 연관이 돼 있으니까. 하지만 스마트폰이 일부 사라지면 목숨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 없을까? 심지어 식량과 금융 산업의 중요성을 비교하기도 한다. 금융 산업보다 식량 산업이 저평가됐다는 거다. 식량 산업에 관한 중요성을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 단순 GDP를 가져와서는 식량과 금융 산업을 비교한 부분에서 상당한 불편함을 느꼈다.
GDP는 돈이 아닌가? 돈은 사람들이 가치를 느끼는 곳에 지불한다. 단순히 식량과 스마트폰이 일부 사라졌을 때를 비교하는 건 무의미한 가설이라 생각된다. 그런 식이라면 댐의 둑이 일부 터진다던가, 고속 열차의 전력이 갑자기 일부 사라진다던가 하는 등의 가설이 더 극단적 아닌가?
식량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었겠지만, 맥락상 이해가 가지 않는 챕터였다.
결국 개인의 역할은 미미하다
저자는 빌게이츠가 좋아하는 작가라고 한다. 이 책도 빌게이츠의 권유로 썼다고 하는데, 나는 이런 류 책에서 감명을 받은 건 빌게이츠가 쓴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이다. 이 책에서는 숫자를 가져오되 정말 기후재앙을 피하려면 인류가 개선해야 하는 걸 명확히 말한다.
온실가스 배출량 중 각각의 인간 행위가 차지하는 비중 ▲무언가를 만드는 것(시멘트, 철 플라스틱) 31% ▲전기(전력생산) 27% ▲무언가를 기르는 것(식물, 동물) 19%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비행기, 트럭, 화물선) 16% ▲따뜻하고 시원하게 하는 것(냉난방 시설, 냉장고) 7%
– <빌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중에서.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하지 말라던가, 텀블러를 사용하라던가. 이런 정치적이고 감정적인 메시지가 아닌, 시멘트 31%, 전기 27% 등 전체 시스템을 짚는다. 시스템을 바꿔야 개선된다는 거다. 개인이 종이 빨대를 쓰는 게 아니라.
또 이런 말도 썼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과 ‘2050년까지 제로 달성’은 비슷하게 들리지만, 굉장히 다르다.
잘못된 방식으로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감축하면 자칫 2050년까지 제로 달성을 못 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감축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은 2050년까지 제로를 달성하기 위해 해야 할 이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목표가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이라면 우리는 이 목표를 위한 수단에만 집중할 것이다. 설령 이런 방식이 제로달성이라는 궁극적인 목표 달성을 더 어렵게 하거나, 아니면 불가능하게 만들어도 말이다.
‘2050년까지 제로 달성’이 목표라면 석탄화력발전소를 가스화력발전소로 대체하는 데 돈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게 된다. 대신 우리는 투 트랙 전략을 구사하게 될 것이다. 투 트랙 전략이란 첫째로 제로 탄소 전기를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데 ‘올인’하고, 둘째로 화석연료에 의존적인 지역을 포함해 자동차부터 열펌프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전기화하는 전략이다.
‘2030년 감축파’가 보기에 2030년까지 감축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위 방식은 실패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성공으로 가는 길이다.
– <빌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중에서.
결정적으로 빌게이츠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엔지니어이지 정치학자가 아니다.
– <빌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중에서.
반면 스밀은 스스로 과학자라 했는데, 과학자보다는 연구자가 맞겠다. 실제 과학 실험을 하며 과학을 진보시키는 게 아니라, 통계 데이터를 기반으로 연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설령 과학자라 한다면, 과학을 해야지 왜 이런 불편하게 만드는 책을 쓰는지 모르겠다.
또한, 불편하게 만들었으면 어떤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제시한다는 게 ▲고기 덜 먹기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따위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피곤할 정도의 숫자로 제시했을 뿐, 결국 스스로가 만들어낸 대안은 없다. 그리고 그 대안을 위해 스스로 진행하는 일도 딱히 없는 것 같다.
빌게이츠는 정말 바츨라스 스밀을 좋아하는 게 맞는 걸까?
마무리
내용은 피로했고, 해법은 없었다. 옮긴이는 저자가 방대한 통계를 모아서 요약했다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싶다. 앞으로는 챗GPT가 훨씬 더 잘할텐데 말이다. 솔직히 뭐가 대단한지 싶다.
역시나 앞선 책처럼 저자는 스스로가 하려는 말이 없다. 이 방대한 데이터를 모은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연구 거리가 될 것 같아서? 책을 내면 읽을 독자가 많을 것 같아서? 이렇게 학계에서 움직이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서?
에너지, 환경, 식량, 인구, 경제, 역사, 정책 등 광범위한 분야를 연구한 게 자랑인듯 저자 소개에 넣어뒀는데, 이 광범위한 분야를 개인이 연구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러니 깊이가 없지.
한줄평
- 피로가 느껴지는 숫자와 관심 없던 식량
인상 깊은 문구
- 세계 식량 생산량은 현재 1인당 평균 약 3,000kcal이고, 하루에 나오는 세계 음식물 쓰레기는 1인당 약 1,000kcal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절실함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 오늘날 부유한 국가에서는 인구의 1~3%만이 식량 생산을 맡고 있다.
- 한 지역에서 땅을 가꾸는 활동의 점진적인 채택과 확산만이 인구가 더 많고 계층적인 사회를 지탱할 수 있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 국제 및 미국 전문가 위원회가 내놓은 현대 권장 식단표는 성인의 음식 에너지 최적 섭취량 범위를 제시한다. 45~65%는 탄수화물, 20~35%는 지방, 10~35%는 단백질에서 얻으라고 권한다.
- 2022년 세계 인구는 80억 명에 아주 근접했고, 연령 조성과 체중 분포를 감안한 평균 체중은 약 50kg이었다. 즉, 총 4억 톤에 달했다. 이 총무게를 다른 생물의 무게와 비교하려면 건조 중량이나 탄소량으로 나타낼 수 있다. 놀랍게도 이 총량은 현재 야생에 남아 있는 모든 척추동물의 총량보다 훨씬 많다. 총생물량이 이보다 더 많은 척추동물은 하나분이다. 바로 소다.
- 곡물 재배는 우리의 유일한 대안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 주식 작물이라는 지위는 진입 장벽이 높으며, 이 모든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즉, 비교적 빨리 익어야 하고, 수확량이 꽤 많아야 하고, 장기간 저장 가능해야 하고, 소화율과 좋은 입맛도 중요한 속성이다. 또 필수영양소를 비교적 높은 비율로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 인류의 약 3분의 2는 우유를 한 컵 마셨을 때 가벼운 불편함에서 설사와 복부 팽만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증상을 느낀다.
- 곡물과 콩은 비교적 높은 에너지밀도와 다량영양소의 바람직한 조합 외에도 다른 이점을 갖고 있다. 요컨대 몇몇 미량영양소의 좋은 공급원이다. 오늘날에는 무기질과 비타민 영양제를 강박적으로 먹으므로, 빻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영양소를 보충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양을 섭취하는 경우가 흔하다.
- 90일 동안 및밭 1헥타르에 닿는 태양에너지 중 약 0.27%만이 수확 곡물의 화학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이다.
- 이번 장에는 숫자와 단순한 계산이 가득했는데, 이유는 단순하다. 광합성 효율이 놀라울 만큼 낮고 물과 질소라는 주된 투입 요소의 수요가 아주 높다는 점을 이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 현재 우리가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수준의 동물 대사와 영양 단계 지식을 우리 조상도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어떤 동물종을 선호했을까? 정확히 똑같은 동물들을 골랐으리라는 것이 답이다.
- 어떤 과격한 조치도 취할 필요가 전혀 없다. 적어도 극단적 식단을 따르거나 비타민이든 무기질이든 간유든 특정한 식이 보저제를 대량 섭취하는 등의 행동을 할 필요도 전혀 없다.
- 한국과 일본은 국내 식량 소비량의 60% 이상을 수입한다.
- 순수한 영양 원소를 기준으로 할 때, 2020년 세계 농업은 연간 질소 약 1억 톤, 인 약 2,000만 톤, 칼륨 약 3,000만 톤을 사용했다.
- 이전 책들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비관주의자도 낙관주의자도 아니다. 나는 과학자다.
- 2011년에 나온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식량 손실과 낭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곡물은 약 30%, 부리 작물과 과일 그리고 채소는 40~50%, 기름씨-육류-유제품은 20%, 생선은 35%에 달한다. 예상한 대로 유럽연합과 북아메리카에서 음식물 쓰레기가 많이 나왔고,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과 동남아시아는 그보다 한 차수 더 낮았다.
- 영국 가정이 음식물 쓰레기를 연간 670만 톤 생산한다고 발표했다. 구입한 식품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 중 거의 90%는 생활 쓰레기로 수거해 대부분 매립했다.
- 음식물 쓰레기의 약 절반은 신선했다. 아마도 가장 놀라운 점은 피할 수 있는 쓰레기의 4분의 1 이상은 통째로 또는 뜯지도 않은 채 버려졌다는 것이다.
- 사료 낟알을 전혀 쓰지 않고 세계 목초지의 절반 이상을 이용하지 않으면서 부산물과 한정된 사료 작물 식물량에만 의존해도, 연간 모든 사람이 적어도 쇠고기 3kg씩을 먹을 만큼 생산할 수 있다. 육류의 환경 영향을 60~70% 줄이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평균 공급량 감소는 일부 사람에게 평소보다 적색육을 상당히 덜 먹으라는 의미이고, 생산자에게는 경제적 손실을 뜻한다. 그런 변화가 얼마나 멀리까지 그리고 얼마나 빨리 진행될지는 불확실하다.
- 대규모 충돌과 유례없는 사회 붕괴가 일어나지 않는 한 세계는 21세기 중반 이후까지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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