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개발자 시절, 나는 늘 허둥지둥했다. 늘 일정에 쫓겼고, 업무는 무거웠고, 자신감도 없었다. 회사에서는 내가 마음에 들어서 뽑았을텐데, 그 선택에 관한 의심도 있었다.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반면 내 선배는 늘 여유로웠다. 늘 나보다 모든 부분에서 빨랐는데, 그에게 나는 ‘누구보다 빠른 사람’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그런 선배와 함께하며 나는 생각했다.

“나도 선배처럼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여유는 어디서 나올까? 선배를 보니, 여유는 실력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실력이 여유의 답이라 생각하고 살아갔다.

실력이 여유를 만들더라

사실이었다. 해를 거듭하며 나는 조금씩 실력이 늘었고,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어떤 기능은 이전 프로젝트에서 만든 코드를 복사, 붙여넣기 하며 일정을 단축했고. 어떤 기능은 오픈소스를 빠르게 찾아 일정을 단축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니 나는 꽤 여유가 생겼다. 나는 스스로 실력이 늘었다 생각했다.

실력이 늘었는데 여유가 없어지더라

그런데 이상했다. 어느 시점이 되니 다시 여유가 사라졌다. 분명 전보다 더 실력이 늘었고, 분명 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있는데. 분명 더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어 일하기도 편해졌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다시 쫓기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 날은 일을 못 하는 사람이 돼 있기도 했다.

한 번은 프리랜서로 프로젝트에 투입이 됐다. 원래 하던 일이었고, 크게 난이도가 차이나지도 않았다. 다만 할당된 역할이 달랐다. 리더 역할을 했던 것과 달리, 막내 역할을 해야 했다. 막내가 되니 그간 내 업무를 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너무도 간단한 업무를 빙빙 돌아서 어렵게하는 걸 보고 있자니, 또 그렇게 하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었다. 그러나 누구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결국 프로젝트는 연기됐고, 리더가 변경됐다. 그렇게 리더가 된 나는 온갖 짜증을 부려대며 프로젝트를 완수했지만,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참 이상했다. 촉박한 프로젝트를 완수한 걸 보면 나는 실력이 더 늘었을텐데. 나는 왜 여유가 더 없어진걸까?

실력과 여유 외에도 많은 변수가 있더라

실력이 답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실력이 늘어도 여유가 없다면. 나는 실력이 충분하지 않은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더 실력을 늘리려 노력했다. 내 실력만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주변 사람에게도 요구했다. 실력을 키우라고. 그렇게 모두가 실력이 늘면 모두가 여유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주위를 보니 나는 누구보다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원했던 건 여유였는데 말이다.

신입 시절을 떠올렸다. 실력이 없어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실력이 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거라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그 시절에는 실력만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확히는 코딩 실력 말이다. 일을 하며 만나는 온갖 문제 중 내게 할당된 건 코딩 뿐이었다. 그러니 코딩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코딩에만 집중할 환경을 내 주위 사람들이 만들어줬다는 거다. 혼자가 아니었던 거다.

시간이 흘러 나는 코딩 실력이 늘었고, 코딩 실력 외 모든 걸 잃어 갔다. 내가 실력이라 생각했던 코딩은 늘었지만, 여유를 갖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게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여유라는 것을 결코 나 혼자만의 실력으로 갖기란 불가능한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니컬

한때 나는 무척 시니컬(cynical, 냉소적인)한 사람이었다. 나보다 코딩을 못 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말을 못 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사회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무시하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무시했다. 그들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 내 능력치가 깎인다고까지 생각했다. 그게 맞는 길이라 생각했다.

코딩을 잘하는 사람 중에는 시니컬한 사람이 꽤 있다.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코딩에서는 압도적인 능력을 보이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내가 만났던 압도적인 능력을 보이는 사람은 시니컬한 사람이 많았다. 그 시니컬조차 캐릭터로 받아들여져 때로는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시니컬했던 사람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많이 변해있더라. 5년, 10년 뒤 그들의 모습은 꽤나 둥글둥글해져있었다. 어쩌면 그들도 ‘코딩 실력’만을 좇다가 원하는 걸 잃어버린 것 아닐까?

시니컬해지지 말자

관리자가 된 뒤에도 풀지 못했던 문제였는데, 대표자가 되고 나서 깨달은 건 시니컬함이 굉장히 많은 상황에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낸다는 거다. 되려 문제를 키울 때도 있으며, 때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그냥 두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풀리는 걸 경험했다. 가끔은 섹시하게 보이기까지 했던 시니컬함이 엄청난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종종 다짐한다. 시니컬해지지 말자고.

쉽지 않다. 워낙 많은 사람과 연결이 돼 있다 보니, 타인의 감정을 억지로 받아들이는 상황이 놓이기도 한다. 화가 난 누군가의 감정을, 슬픈 누군가의 감정을 억지로 받아들일 때면 그 상황 자체에 화가 나기도 한다. 그래서 종종 시니컬해지고픈 욕구를 이기기 어렵다.

그래도 또 다짐한다. 시니컬해지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