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막 사회에 나왔을 때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1만 시간의 법칙>이다. 어떤 분야 전문가가 되기 위해 매일 3시간씩 10년을 노력하면 전문가가 되는데, 이게 1만 시간이라는 거다. 10년 뒤에는 나도 전문가가 돼 있겠지 하는 상상을 했던 시기다.

2.
사회에 나온지 어느새 14년이 됐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10년을 일했고, 짧은 몇몇 커리어가 있다. 그래서 1만 시간을 했느냐 묻는다면, 글쎄 10년 동안 매일 3시간은 훌쩍 더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전문가냐 묻는다면, 사실 잘 모르겠다. 그냥 해당 직종에서 일을 좀 해보긴 했다 정도를 인정 받는다면 딱히 억울하진 않을 것 같다.

3.
올해 내가 만난 가장 큰 행운을 꼽으라면 큰 고민 없이 <청년창업사관학교>에 합격한 것이라 하겠다. 너무도 많은 귀인이 찾아와 내게 도움을 줬지만, 한 번에 찾아온 40인의 귀인과 비교하기엔 물량에서 딸리지 싶다.

4.
<청년창업사관학교>를 시작하며 스스로 다짐한 것 중 하나가 나를 제외한 39명 모두와 밥을 먹는 거였다. 조금 전 세어보니 뭔가 같이 먹은 동기들이 27명, 조금이라도 대화를 나눠본 동기가 35명이다. 올해 절반을 지난 지금 이정도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5.
그렇게 만난 동기들과 시간을 보내며 세 가지 충격을 받았다. 처음엔 나이에 관한 충격이었다. 20대 초중반의 대표들이라니, 도대체 이들은 어떤 경험치를 가지고 사업을 꾸리는 걸까? 분명 이들은 1만 시간을 채우기엔 시간이 부족할 텐데 말이다.

6.
다음엔 경험에 관한 충격이었다. 놀랍게도 이들은 20대 초중반임에도 어떤 경험이 있었다. 누군가는 대학 때부터 스토리가 이어졌고, 누군가는 고등학생 때부터 창업을 했다, 누군가는 중학생 때부터 요리를 했고, 누군가는 초등학생 때부터 춤을 췄다. 서른도 되지 않은 이들이 이미 1만 시간을 훌쩍 넘긴 전문가였다.

7.
그리고 찾아온 건 겸손에 관한 충격이었다. 10년 정도면 그래도 개발 좀 했다고 말해도 될줄 알았다. 그런데 서른도 되지 않았는데 경력이 10년인 사람도 있고, 얼마 전에는 서른즘 된 인공지능 박사를 만났다. 내가 가진 10년의 경험과 그들의 경험을 번갈아 보며 떠올릴 수 있는 단어는 겸손 뿐이었다.

8.
생각해보니 나는 이들과 같이 걷고 싶었나보다. 그런데 때로는 내가 너무 늦게 시작해서, 때로는 내 재능이 부족해서, 때로는 기회가 없어서. 그래서 이들과 함께하는 것을 동경해왔나보다. 바쁠텐데, 할 일 많을 텐데. 어찌 그리 매번 출석하느냐는 물음에 ‘난 여기 오는 게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동경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9.
제주도 캠프에서 나와 룸메이트였던 동기가 있다. 장소를 오가며 버스도 같이 타고, 강의도 같이 듣고, 밥도 같이 먹으며 많이도 물어봤다. 왜 창업 했느냐, 왜 이 아이템이냐, 비즈니스 모델은 뭐냐, 그걸 만들 수 있는 근거는 뭐냐, 고객은 어디있냐, 만나 봤냐 딱히 인터뷰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묻다 보니 집중 취재가 됐다. 취재를 마친 후 머릿속에 맴돌던 문장을 뱉었다.

‘당신은 도대체 뭐냐?’

10.
우리 둘의 시간적 거리를 따지자면, 한 사람이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시간인데. 어째서 이 사람은 벌써 전문가가 됐나 싶었다. 본디 제품이라는 건 충분히 학습하고, 조사하고, 연구한 끝에 고심하고 또 고심하며 만드는 것일텐데. 어째서 벌써부터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건지 참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내가 상상한 제품을 현실화하기까지 우리 둘의 시간적 거리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데 말이다.

11.
내 동기는 기업의 SNS 마케팅 자동화 솔루션을 만든다. 시그마인(https://sigmine.ai/)이다. SNS 브랜드 정체성을 설정해두면, 매일 SNS 콘텐츠 주제가 추천되고 콘텐츠를 생성해 업로드 할 수 있다. 스레드, 인스타그램, 뉴스레터, 블로그 등 원클릭으로 콘텐츠를 만든다.

12.
제품을 출시했다기에 들어와 이것저것 눌러보는데 UX에 고민한 흔적이 보이고, 불편함 없이 흐름이 이어진다. 서비스 아이디어 단계부터 들어왔던 터라 정말 제품화가 된 것을 보고 있자니. 나이와 경험과 겸손에 관한 충격이 한 번에 밀려온다.

13.
AI 시대란다. 뉴노멀이니, 특이점이니 세상이 바뀌었다며 늘 만들어내던 마케팅 용어가 무색해질 지경이다. 어떤 단어를 붙이던지간에 여태 받아본 충격보다 늘 더한 충격이 이어진다. 그중 가장 큰 충격은 어쩌면 1만 시간 따위가 아닌 전문가라는 포지션 자체에 관한 재정의가 필요할 것 같다는 것이다.

14.
내 동기들이 1만 시간을 빠르게 만들어낸 이유도 있겠지만, 어쩌면 AI 시대에는 과거 누군가 정의한 1만 시간이라는 문법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 게 아닐까.

15.
내가 동경했던, 이제는 친구가 된 39인의 동기들을 보고 있자면. 1만 시간을 축적하던 시기가 앞당겨진 것을 보고 있자면. 아니, 1만 시간 따위가 필요 없는 것을 보고 있자면. 어쩌면 이제는 너무 늦게 시작해도, 재능이 없어도, 기회가 없어도. 새로운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