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예능 <뭉쳐야 찬다2>를 재밌게 보고 있다. 우연히 카바디 이장군 선수의 허벅지로 수박깨는 영상을 보고 흥미가 생겼는데, 세계적인 축구스타 루드 굴리트가 나오는 영상을 보곤 넷플릭스에서 정주행을 시작했다. 넷플릭스 정주행은 완전체 뚱보 4인의 <맛있는 녀석들>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안정환, 이동국

<뭉쳐야 찬다2>는 출연진 캐스팅만 해도 상당히 잘 짜여진 프로그램이다.

나는 선수 박지성만큼이나 선수 안정환을 좋아했는데, 안정환이 가진 인생사를 제외하고도 단순히 축구선수 안정환의 플레이 자체에 매료됐다. 화려한 기술을 앞세웠음에도 기필코 이기고 말겠다는 선수시절 필드 위 안정환의 독기어린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은퇴 후 후덕한 이미지의 슈퍼마리오 같은 안정환의 모습을 보면 상상할 수 없는 그 에너지는 이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안정환의 축구 예능이라는 것만으로도 볼 이유가 충분한데, EPL을 다녀온 이동국과 조원희라니. 필드를 떠난 이들을 계속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구팬으로서 굉장한 행운이다.

선수시절 이동국과 조원희를 떠올리자니 두 선수 모두 늦은 나이까지 현역 생활을 이어갔다는 게 기억에 남는다. 이동국은 무려 41세까지 23년 동안 프로선수 생활을 했다. 조원희는 무려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돌아온 선수다. 은퇴 직후 몸이 망가지는 선수는 물론 시즌 휴식기에도 몸이 망가지는 선수가 굉장히 많다. 은퇴 후 다시 현역으로 복귀한다는 건 체력을 떠나 엄청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조원희

다시 안정환, 이동국, 조원희를 떠올려보면 세 선수 모두 정신력이 대단했던 선수임에 틀림없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세 사람이 은퇴 이후에도 함께하는 걸 보면 정신력이 인간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 수 있다. 같은 수준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과는 오랜 기간 함께하기 쉽지 않다.

어쨌든 이들 세 명은 축구 외 각 분야 정점을 찍은 선수를 모아 축구 팀을 꾸렸다. ▲카바디 이장군 ▲테니스 이형택 ▲UFC 김동현 ▲스키점프 강칠구 ▲스피드스케이팅 모태범 ▲수영 박태환 ▲트라이애슬론 허민호 ▲태권도 이대훈 등 각 분야를 꼽으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선수들이 모여 ‘축구’를 한다.

<뭉쳐야 찬다2>는 예능 프로그램이기에 예능을 바탕에 두지만 경기가 시작되면 이들의 승부욕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각 분야 정상에서 조기축구 멤버가 된 이들이지만, 평생을 경쟁세계에 살아온 바탕은 숨길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 은퇴한 선수이며 나이대도 높아 잘 짜여진 상대 팀을 만나면 종종 아마추어 티를 벗기 어렵다. 뛰어난 승부욕이 늘 승리를 보장하진 않는다.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몸을 이끌로 숨을 고르며 하프타임 휴식을 보낼때면 감독 안정환은 늘 이런 말을 하며 소리를 지른다.

우리 축구를 하자고. 우리가 하던 걸 하자고. 왜 다 잊어버렸냐. 10골 먹어도 좋으니, 우리 축구를 하자.

정신 차려라. 상대는 강하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축구를 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축구 감독들은 늘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의 축구를 못 했다. 졌지만 우리는 잘 싸웠다.”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줬다. 우리의 축구를 했으니 괜찮다. 선수들이 자랑스럽다.“

나는 종종 주변 이야기에 내 인생을 올려본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는 물론이고 타인의 삶 위에 내 인생을 올려보기도 한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만약 축구가 인생이라면 나는 어떤 축구를 하고 있을까? 나는 전투적인 압박 축구를 하고 있을까? 화끈한 공격 축구를 하고 있을까? 승리를 위한 수비 축구를 하고 있을까?

<뭉쳐야 찬다2> 넷플릭스 정주행을 하며 수십번 들은 감독 안정환의 외침. 우리 축구를 하자는 메시지가 어쩐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축구는 뭘까?

나의 축구

막연히 멋진 사람들을 따라하던 때가 있었다. 성공한 인물의 자서전을 읽거나 누군가의 성공 스토리를 볼 때면 가슴이 두근대던 시기가 있었다. 그냥 그러려니 했던 것 같은데, 어쩐지 이들이 말한대로 따라하면 나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있던 때가 있었다. 그게 벌써 10년 전이다.

막연히 10년이 지나면 전문가가 돼 있을 거라 생각했다. 처음 시작이 모바일 개발자였으니 모바일 사업이 있는 어디든 갈 수 있는 경험치가 쌓일 거라 생각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차례 읽은 자서전 속 인물이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연히 사회는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신뢰할 수 없다며 내게 일을 맡기지 않은 팀장이 있었고, 보여준 게 없다며 투자를 보류한 투자자도 있었다. 가장 힘든 건 나를 떠나던 사람들이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건 당연한 것이다. 나 역시 여러 이유로 많은 사람과 멀어졌는데 그중 가장 힘든 건 아무 이유도 모른채 떠나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더라.

그럼에도 나는 나의 축구를 하려 노력했다. 모바일 개발자로서 한 사람 역할을 충분히 해냈고, 막연히 꿈꾸던 창업자가 돼 시장을 누비기도 했다. 새로운 기회를 위해 또 다른 시장의 바닥부터 시작하기도 했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용기도 냈다.

이런 나를 두고 누군가는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서 좋겠다’고 했다. 글쎄, 결코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지 못했다. 모바일 개발자로서 원하던 기업에 이직을 실패했고, 원하던 비즈니스로 창업에 실패했다. 새로운 시장에서 충분한 기회를 받지 못했고, 다시 돌아온 자리에서도 한 사람 몫을 하기 위해 그저 싸우는 중이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고민의 순간 온전히 나로서 선택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처음 모바일 개발자로 일을 시작할 때도, 첫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할 때도, 새로운 도전을 할 때도,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올 때도. 주변에 조언을 구했지만 나는 온전히 나로서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쌓여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됐고, 그 선택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됐다.

나의 축구를 하라는 건 어쩌면 이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온전히 경험을 쌓고 다음 경기에선 조금 더 나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그렇게 더 강해지기 위해. 선택의 시점에 분명 더 나은 선택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다지 후회는 없다. 더 나은 선택이 지금의 선택을 가능하게 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나의 축구를 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게 또 있다. 철학이 생긴다는 것이다. 축구 감독들은 저마다 철학이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더 유행하는 축구 철학이 있겠지만, 유행에 뒤쳐져도 확고한 축구 철학이 있는 감독의 축구는 매력적이다. 그리고 공은 둥글기에 완벽한 전술은 없다. 언제나 돌고 도는 게 축구다.

그런데 확고한 철학이 있어도 경기 내내 나의 축구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특히 축구를 결정짓는 ‘골’이 터질때면 자신의 축구를 의심하기 쉽다. 우리 인생으로 따지면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인생을 의심할 수 있겠다. 축구는 철학 외에도 이런 ‘흐름’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흐름을 거스르는 건 정말 쉽지 않다.

흐름

축구를 보다 보면 캐스터의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아, 흐름이 넘어갔어요. 우리 선수들 집중해야 합니다. 흐름을 찾아와야 합니다. 좀 더 압박해야 합니다.

머피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흐름을 빼앗기면 평소 잘 하던 것도 안 된다.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르고 사기가 떨어져 의욕이 사라진다. 빨리 경기가 끝났으면 싶기도 하다. 어쩌면 그 순간 경기는 이미 졌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의외로 흐름은 한 순간에 바뀐다. 어떤 한 선수의 헌신이 될 수도 있고, 상대의 황당한 실수가 될 수도 있다. 감독의 선수 교체가 될 수도 있고, 전략적 파울로 흐름을 끊어버릴 수도 있다. 이를 위해선 경기에서 한 발짝 뒤에 물러나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도 똑같다. 시험에서 떨어지고, 친구와 헤어지고,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부모의 병을 발견하는 등. 인생에서 흐름을 빼앗기는 순간엔 평소 잘 하던 것도 안 된다. 한 번 빼앗긴 흐름은 흐름 속에서 되찾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의외의 선물이나 응원, 행운 등으로 정신을 바짝 차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흐름에 잡아 먹히는 건 인생을 살아가며 가장 아쉬운 순간이 아닐까 싶다.

때문에 우리는 종종 일상에서 한 걸음 벗어나 흐름을 바꿀 필요가 있다. 뉴스 기사를 보면 한 순간 잘못된 선택을 한 가장의 기사가 종종 보이곤 한다. 기사의 주인공을 이해하게 된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인간은 나약해서 평소보다 다소 무거운 압박이 주어지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 조금만 지나고 보면 정말 별것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흐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선수들도 있다. 언제나 기대한 정도의 퍼포먼스를 내는 선수들. 갑자기 화려한 모습을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처참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 기복 없는 선수들. 이들이야 말로 감독이 신뢰하는 믿을맨이다.

언젠가 미술 입시학원 교사가 내게 말했다. 결국 좋은 학교에 가는 학생은 가장 미술을 잘 하는 학생이 아니라고. 가장 잘 할 때와 가장 못 할 때가 비슷한 학생이라고. 그런 학생이 좋은 대학에 간다고.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기복 없는 모습을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답은 기본기에 있다.

기본기

사회 생활을 10년을 하고 나서야 학창 시절 만화영화가 이해가 된다. 드리블 등 기본기 연습만 하던 <슬램덩크>의 강백호. 슬램덩크는 언제 하냐며 악을 지르지만 경기는 리바운드를 지배하는 자가 지배한다던 주장 채치수의 말. 그리고 슬램덩크의 클라이막스는 강백호의 슬램덩크가 아닌 강백호의 풋내기 슛인 이유. 그래서 만화영화는 아이가 아닌 어른을 위한 것이라 하나보다.

10년 동안 수백 명과 일했다. 유럽 어느 나라의 대통령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 코인 시장 꽤 핫한 인물과 포옹하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언제든 다시 일하고 싶은 사람과 일하기도 했고, 다시는 쳐다보기 싫은 사람도 기억에 남는다. 그들에게도 누구에게나처럼 흐름이 있었고 꽤 유명했지만 한 순간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사람도 한 둘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축구를 해야 한다. 우리는 화려한 골을 원하지만 경기 중 가장 많은 행위는 간단한 패스다. 어려운 킬러 패스가 아닌 단순히 내 팀원에게 건내는 가벼운 패스. 그리고 이 가벼운 패스가 실패로 이어질 때 엄청난 위기가 찾아온다. 그렇게 흐름은 한 순간에 넘어간다.

우리가 일하며 필요한 기본기는 정말 단순하다. 읽기, 쓰기, 말하기. 나는 지난 10년 동안 개발자로 살며 단언코 이 기본기 덕에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본기는 200권이 넘는 책을 읽고 쓴 서평에서 길러졌다. 개발자로 일했고, 기자로 일했고, 협업 도구 책을 쓴 작가가 되기도 했지만 이 순간순간 필요한 건 각 분야의 전문성 이전에 기본기가 있었다. 그리고 이 기본기가 결여된 사람을 너무도 많이 봤다.

자신이 맡은 좁은 부분의 업무는 하지만 다른 영역의 동료와 ‘말하기’가 서툰 사람. 말하기는 잘 하지만 문서나 메일 등의 ‘쓰기’가 서툰 사람. 아이디어가 있지만 정보가 부족해 맥을 짚지 못하는 ‘읽기’가 서툰 사람. 이들 모두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내더라도 결코 오래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이제는 월드 클래스가 된 손흥민에게 기본기만 7년 가르쳤다는 손웅정 감독. 나의 축구를 하기 위한 단 하나의 필수 조건은 기본기가 아닐까 싶다.

나의 축구를 하려면

평소 주변을 관찰하는 편이다. 관찰이라 함은 어떤 가능성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어떤 변화를 알아채려면 평소 모습을 관찰해야 한다. 얼마나 변화하는지 관찰하고 어떤 사건을 연결지을 수 있으면 더욱 좋다. 하지만 관찰은 꽤 큰 부작용을 낳는다. 늘 피로하고 예민하다. 언젠가부터 소리나 냄새 등에도 굉장히 예민해졌는데 이 상태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 ‘쉬는 법’을 종종 검색하곤 한다. 쉬는 게 어떤 건지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쉬었다고 생각하는데 주변에서 그건 쉬는 게 아니라고 하면 마음이 혼란스럽다. 넷플릭스를 보고 ‘쉰’ 결과가 이 글이니 내 증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나의 축구다. 어쩌면 나는 주변인이 말하는 ‘쉼’이 필요치 않을 수 있겠다. 때문에 꽤 외로운 편이다. 대체로 내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나의 축구라면 이제는 나라도 이해해야 하지 않겠나 싶다.

나의 축구라는 게 사실은 별게 아니다. 아무리 재밌는 축구도 결과가 안 나면 경질되고, 아무리 재미 없는 축구도 결과가 나면 명장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명장이 되기 위해 축구를 하는가?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인생을 사는가?

흐름을 잃고 싶지 않다. 온전히 나의 축구를 하는 게 내 목표이고 싶다. 오늘 경기에서 지더라도 내일은 좀 더 나을 수 있도록 온전히 나의 축구를 하고 싶다.

그게 나에겐 무엇보다 값진 골이다.